(뉴욕 성실장로교회 원로)
I. 칼 바르트 (Karl Barth)와 신정통주의 (Neo-orthodoxy) (3)
(3) 일반계시를 부정하는 바르트
요한 칼빈 (John Calvin)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 우리 인간의 마음속에 “신적 감각” (神的感覺) 혹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 (sensus divinitatis)”을 주셨다. 이것을 “하나님을 추구하는 의식, 종교의 씨앗, 그리고 종교성”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는데, 하나님의 형상 가운데는 하나님을 알고, 섬기고, 예배하는 요소가 있다. 이것이 곧 칼빈이 말한 우리 속에 있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 혹은 신적 감각이다. 바울은 롬 1:19-20에서 우리 속에 있는 신적 감각에 대해 말한다,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인간의 타락으로 이 신적 감각이 부패되었고, 심히 왜곡되어졌다. 바울은 이렇게 설명한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 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롬 1:21-25).
죄가 우리 속에 있는 신적 감각 (피조물을 통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타락시켜, 피조물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마땅한 일인데도 불구하고 온갖 종류의 우상을 섬기고, 육신의 정욕대로 사는 것을 합리적인 진리라고 왜곡시켰다.
죄가 우리의 이성적인 기능을 왜곡시켜, 우리의 지식까지 부패하게 만들었다 (noetic effect of sin). 그 결과 비진리를 진리로 생각하도록 만든다 (롬 1:21-25). 죄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기고” 또한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사용하게 만들었다. (롬 1:25-26)
그러나 성령께서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역사하시면, 성경의 하나님만이 참되고, 유일한 신이시며, 성경의 하나님만이 창조주와 구속주와 섭리주가 되심을 믿게 되게, 오직 성경의 하나님만 섬기고 경배하고 사랑하게 된다.
우리가 복음을 접할 때에 성령께서 우리에게 역사하시어 “신적 감각”의 기능이 정상적으로 회복되어 성경이 제시하는 복음을 믿게 된다.
자유주의 신학은 하나님의 일반계시를 너무 지나치게 강조하였다. 자유주의 신학은 하나님의 계시를 주로 인간의 종교적 체험에 있다고 보았다. 그들은 성경을 그 시대 사람들이 가진 깊은 신(神) 의식과 그들의 종교적 체험을 기록한 것으로 보았다. 물론 자유주의 신학은 매우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지만, 공통적인 것은 하나님의 초자연계시를 부인하는 일이다.
이러한 자유주의 관점에 반대하여 바르트는 특별 계시만을 강조했다. 바르트는 자연 계시를 반박하면서, 자연에 있는 것이든, 인간의 의식에 있는 것이든, 아니면 역사적 사건의 과정에 있는 것이든지, 피조물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를 절대적으로 부정하는 극단으로 나아갔다.
(4) 존재의 유비 (analogia entis)와 신앙의 유비 (analogia fidei)
바르트는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von Aquin)의 “존재 유비”를 거부하고 “신앙의 유비”를 주장했다.
유비(類比, analogy)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하나님을 설명하여야 하는데,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을 유비를 통해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토마스 아퀴나스에 따르면, 하나님의 특별 은총으로 부여된 계시 진리와 자연에 근거한 이성적 진리 (일반계시)가 모순되지 않고, 상호 보충적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아퀴나스는 유한한 인식능력을 가진 인간이 어떻게 무한한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답하면서 유비의 기능을 사용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에 역동적인 유사성이 있기때문에, 유비 (analogy)를 통해서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에 있는 엄청난 차이 (비유사성)을 인식할 수 있다고 말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을 설명하면서, 인간의 이성을 통한 경험을 토대로하여 하나님을 설명할 수 있다는 말이다. 볼 수 없는 존재를 인간이 체험하고 경험할 수 있는 세상의 언어를 가지고 설명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이것을 우리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존재의 유비 (analogia entis)” 라고 부른다.
그러나 바르트는 “유한은 무한을 포함하지 (이해하지) 못한다” (Finitum non capax infinitum) 라는 말을 통해 아퀴나스의 “존재의 유비”를 반대한다. 바르트는 “존재의 유비”를 통해 하나님의 존재를 설명한다면 궁극적으로 그것은 인간 존재의 연장일 뿐이며, 결코 무한하신 하나님의 존재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인간이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을 인간이 경험하는 세계의 언어로 설명한다면 (존재의 유비), 그것은 인간의 언어일 뿐, 결코 참된 하나님의 묘사가 아니라고 했고, 나아가서 그것은 하나의 우상에 불과하다고 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이 자기가 체험한 방법으로 하나님을 설명하고 그것을 믿고, 섬긴다면 그것은 곧 우상숭배라고 했다.
바르트는 하나님을 설명하는 방법을 “신앙의 유비” (analogia fidei) 라고 주장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면, 하나님이 진짜 우리의 아버지이기 때문이 아니라, 보이지 아니하는 영원한 하나님을 증언하는 것이며, 오직 이러한 인간의 언어 (아버지와 같은)를 사용하여, 전적으로 다른 (Wholly Other) 하나님의 세계에 도약 (leap)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바르트가 주장한 “신앙의 유비 (analogia fidei) 이다.
하나님의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인데, 하나님의 계시는 신비적이기 때문에, 명제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그 만남은 주관적이고, 말로 표현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Encounters with Jesus Christ, the revelation of God, is but mystical, not something describable propositionally, for the encounter is subjective and ineffable).
쇠렌 키에르케고르 (Søren Kierkegaard)의 전문가 철학자이며, 덴마크어로 된 키에르케고르 책들을 처음으로 영어로 번역한 데이비드 스웬슨(David Ferdinand Swenson, 1876– 1940)은 1916년 “키에르케고르의 반지성주의(The Anti-Intellectualism of Kierkegaard)”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H2에 O를 더하면 물이 되고, 물이 도약하여 얼음이 된다. 운동에서 정지로 또는 그 반대로 변화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해석할 수 없는 전환이다. 이것이 제노의 변증법의 기본 원리(the basic principle of Zeno’s dialectic) 이다. 따라서 그것은 초월적이고, 비합리적이며, 그 존재의 출현은 도약으로만 이해될 수 있다 (It is therefore transcendent and non-rational, and its coming into existence can only be apprehended as a leap).”
바르트는 실존주의 철학 (특별히 키에르케고르)의 영향을 받아 하나님의 계시는 객관적, 혹은 명제적이 될 수 없고 실존적인 만남임을 강조했다.
그러나 반틸은 바르트를 비판하면서 성경은 객관적인 하나님의 계시이며, 하나님의 계시는 명제적으로 (propositionally) 우리에게 주어졌다고 주장했다.
바르트는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진리가 현상계의 세계가 아니기 때문에, 현상계를 벗어난, 본체적인 세계 (noumena; 하나님, 영혼, 영적인 세계와 같은 것들)를 인간의 언어로 설명할 수 없다고 주장하며, 오직 신앙의 도약 (a leap of faith)으로만 가능하다고 한다. 이것이 바르트의 “신앙의 유비”(analogia fidei)이다.
바르트는 신앙의 세계가 인간의 언어로 표현될 수 없고, 이성으로 이해 될 수 없고, 오직 신앙의 유비로 신앙의 도약으로만 가능하기 때문에, 바르트는 성경 그 자체는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증언 (witness) 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바르트의 의하면, “계시는 마치 번개가 치는 것과 같아서, 번개를 맞아 쪼개진 나무는 보이지만, 쪼개진 나무 그 자체가 번개가 아닌것 처럼 성경이 계시가 아니다.” 그리고 “계시는 마치 화산의 폭발과 같아서 화산 폭발 후에 화산 폭발로 인한 분화구는 보이지만, 그러나 그 자체가 화산 폭발은 아닌 것과 같다” 하면서, 성경 그 자체가 하나님의 계시는 아니라고 주장한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때에,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이 그렇게 부르는 것이지 그 말이 합당한 말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러면 성경의 언어는 무엇인가? 개혁주의 입장은 이 문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개혁주의 신학자 반틸에 의하면 하나님의 지식은 본래적인 지식이며 (original), 인간의 지식은 유비적이다(analogical). 여기에서 바르트의 신앙의 유비 (analogy of faith) 혹은 신앙의 도약 (leap of faith)라는 말과 반틸의 “인간의 지식은 유비적 이다 (analogy)” 말을 혼동하지 말아야한다.
(다음호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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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24.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