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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신도를 위한 조직신학

이길호 목사

(뉴욕 성실장로교회 원로)

IX 교회론 (3) 

2. 성례

2) 성찬 : 성찬에 관한 성경 해석에는 다양하다.

a) 화체설 (transubstantiation): 로마 카톨릭교회의 주장이다. 떡과 포도주가 실제로 (really, truly) 예수님의 살과 피가 된다고 주장한다. 떡과 포도주의 속성들은 그대로 남아 있지만, 그 본질(substance)은 예수님의 살과 피로 변한다고 한다. 그들은 주님께서 “이것이 내 몸이니라”(마 26:26) 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로마 카톨릭의 잘못은 주님의 이 말씀은 (1) 은유로 해석해야한다. (2) 그리고 물질의 본질과 속성을 구별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일반적인 자연법칙을 위반한다. (3) 또한 그들은 성찬을 그리스도의 속죄제의 중복, 반복적이라고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은 단회적이다. 단번에 (once for all) 온전히 다 성취하셨다. 성찬은 하나님을 위한 제사가 아니라 신자들을 위한 영적인 양식이다. 이스라엘이 출애굽과 홍해를 건넌것으로 다 된것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광야에서 하나님께서 내려주시는 만나를 먹어야 했고, 반석에서 솟아난 물을 마셔야 광야를 통과할 수 있었다. 그리스도인들과 구원받고 난후에 광야같은 이 세상에서 믿음을 끝까지 지키기 위해서 계속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한다. 하나님의 은혜의 샘물은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있다. 영적인 음식은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요 6:55-56). 세례는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하는 길을 열고, 성찬은 그 열어 놓은 길을 계속에서 걸어갈 힘을 공급한다.

b) 공재설 (consubstantiation): 루터파는 예수님의 본성에는 신성과 인성이 연합되어 있기 때문에, 신성의 무소부재 (無所不在) 속성에 따라 예수님의 인성도 편재(遍在) 하신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신 말씀은 예수님의 몸이 (real body of Christ) 잔과 떡의 요소안에, 밑에 그리고 함께 임재하신다 주장한다 (the body and blood of Christ are present to the communicant “in, with, and under” the elements of bread and wine). 화체설과 차이는 빵과 포도주가 주님의 몸과 피로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몸이 성찬의 요소들 (빵, 포도주) 안에, 함께, 그리고 밑에 임재한다는 주장이다. 

공재설의 문제는 (1) 루터파가 카톨릭의 입장인 “성찬 그 자체가 역사한다 (ex opere operato)” 는 성례주의를 비판하지만, 그러나 실제로 그들은 성찬을 그 자체가 역사하는 것 처럼 생각하는 견해가 우세하다. (2) 루터파는 예수님의 양성 (신성과 인성)의 “속성 교류설” (communicatio idiomatum)을 주장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인성에 속하는 주님의 몸과 피가 신성과 같이 온 세상 어디에나 편재하실 수 있다고 생각했다. 주님의 신성만 편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성도 신성과 같이 편재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그러므로 성찬의 요소들인 빵과 포도주 “안에, 함께, 그리고 아래” (in, with and under)에 그리스도께서 현존하신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개혁주의는 그리스도의 성육신 이후에도 신성은 신성이고, 인성은 인성이다. 즉, 신성에 속한 성질과 인성의 속한 성질이 혼합되거나 합하여 제 3의 성질을 구성할 수 없다는 주장이다. 개혁주의는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은 혼합과 혼동됨 없이, 그리고 분열과 분리 없이 한 인격 안에 있다고 정의했던 칼케톤 신조 (Chalcedonian definition)에 충실하다. (칼케톤 신조: “주님이시요, 독생하신 자는, 양성(兩性)에 있어서 혼돈되지 않고, 변하지 않고, 나누어지지 않고, 분리되지 않음을 인정받으며, 성품의 구별이 연합으로 인해 결코 없어지지 않고, 오히려 각 성품의 특성이 보존되고, 하나의 인격과 하나의 실재로 작용한다.” 

(Only-begotten, to be acknowledged in two natures, without confusion, without change, without division, without separation; the distinction of natures being by no means taken away by the union, but rather the property of each nature being preserved, and concurring in one person and one subsistence, not parted or divided into two persons, but one and the same Son, and only begotten, God the Word, the Lord Jesus Christ.)

개혁주의는 그리스도의 신성이 그의 인성의 한계 내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고, 인성의 밖에서도(extra humanum) 존재하며 역사한다고 주장한다. 칼빈은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그의 지상 생활의 기간에도 성자의 신성은 그의 인성의 한계 내에만 계셨던 것이 아니라, 그 인성과 함께 하시면서도 동시에 인성 밖에서도 존재하며 작용하고 계셔서 그가 창세 때부터 하고 계시던 온 세상을 충만히 채우시며, 붙드시며, 통치하시고 인도하시는 일을 계속하고 계셨다”라고 주장한다. 즉, 그리스도는 이 지상에 계실 때에도 그의 신성으로는 계속 우주적 통치 사역을 하셨다는 의미이다. 이 주장은 네스토리우스주의에 대한 강력한 비판이며, 칼케톤 신조를 확언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신성은 인성의 한계 내에 있는 것이 아니며, 또한 그리스도의 인성을 신성을 생각하듯이 생각해서도 안된다.

성찬과 관련해서 말하며, 그리스도의 신성은 항상 무소부재의 성격을 지니고 있지만, 그리스도의 몸과 피는 동시에 여러 곳에 있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성찬에 그리스도께서 임재하시는 것은 그리스도의 영적인 임재(spiritual presence)이다.

그리스도께서 승천 이후 재림 때까지 그리스도의 인성은 그가 승천하여 오르신 하늘(heaven)에 계신다. 이것은 사도 베드로의 설교 가운데 잘 나타난다. “만유를 회복하실 때까지는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 두리라” (행 3:21). 그러므로 루터파가 주장하는 공재설은 성경적이라고 할 수 없다. 

 c) 기념설 (Memorialism): 쯔빙글리는 성찬이 그리스도의 죽음을 단지 기념하는 의식으로 생각한다. 

d) 영적 임재설 (spiritual presence): 칼빈의 주장이며 개혁주의 입장이다. 성찬에 예수님의 몸이 실제적으로 임하는 것도 아니요, 동시에 성찬식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기념에 불과한 것도 아니다. 성찬을 행할 때에 그리스도께서 믿음으로 참여자들에게 영적으로 임하여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 찰스 하지 (Charles Hodge)는 칼빈을 인용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성찬식에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능력으로 (dynamic) 임재한다. 이것은 마치 태양이 하늘에 있으면 땅에 태양의 빛과 열이 임하는 것과 같다. 그리스도의 능력이 성찬에 참여하는 자들에게 임한다.” 바빙크는 칼빈의 영적 임재설을 “신비설” (mystical theory)이라 칭했다. 

(고전 11:23-26 교훈)

고전 11:24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 말씀은 예수님이 우리 성도들의 죄 때문에 죽으셨다는 의미이다. 성찬은 이 진리를 우리에게 믿게 하고 또한 확신하며 살기를 원하신다. 

(1) 성찬식은 예수님의 명령이다. “이것을 행하여” (Do this) 두 번 나온다. 이것은 주님의 명령이다. 성찬은 주님의 권위로 우리에게 명령되어진 예식이다. (2) 성찬은 주님의 구속사역을 기억하는 일이다: “나를 기념하여” 두 번 나온다 (24-25절). 기념 (ἀνάμνησιν) 이라는 말은 “기억” (remembrance) 이라는 말이다. 기념은 단순한 행사일 수 있지만, 기념은 우리의 인식에서 잊어 버리지 않게 늘 기억하고 생각하기를 힘쓰는 일이다. 늘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생각하는 예식이 성찬식이다. (3) 성찬은 주님의 죽으심을 전파하는 일이다. 11:26,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X. 종말론 (1)

“종말론” (Eschatology) 이란 영어 단어는 헬라어의 두 단어(eschatos와 logos)가 합쳐져서 되었다. 이는 “마지막 일들에 관한 가르침”이란 뜻이다. 종말론에는 개인적인 종말론과 우주적인 종말론이 있다.

개인의 종말론은 육체의 죽음, 영혼불멸성, 중간상태, 그리스도의 재림, 죽은 자들의 대부활, 최후의 심판, 최후의 상태 등이다. 그리고 우주적 종말론은 세상의 마지막이다. 

A. 구약의 종말론

성경의 종말론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경계시의 유기적 연관성”을 알아야 한다. 종말론이란 성경 중 어느 한 부분이나 구석에서 찾아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구약의 다니엘서나 요한 계시록과 같은 책들에서만 가지고 종말론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 전체의 메시지를 유기적으로 일관성있게 바라보아야 한다.   

구약에 나타난 장차 오실 구속자의 대망사상은 종말론의 개념을 가진다. 인간이 타락하자마자 하나님께서 은혜의 언약을 주셨다. 구속자가 오신다는 언약 자체가 구약의 종말론의 핵심 사상이다. 앞으로 오실 구속자는 창세기 3:15에는 여인의 후손으로 묘사되고, 창세기 22:38 (26:4; 28:34) 에서는 구속자가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오실 것임을 예언하고, 그리고 창세기 49:10은 구체적으로 이 구속자가 유다의 지파로부터 나올 것을 예언한다. 이사야 7:14에서는 장차 오실 구속자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칭하게 될 것이다. 장차 오실 구속자는 선지자, 제사장, 그리고 왕이시며, 동시에 이사야서에서는 그 구속자를 하나님의 “고난받는 종”으로 묘사된다. 그리고 구속자의 타이틀이 다니엘 7장에서는 “인자”란 용어를 통해 표현되고 있다. 

그리고 구약의 종말론적 개념은 “하나님의 나라”와 “새 언약”의 개념을 통해서도 계시된다. 특히 예레미야는 유대 백성들이 우상숭배와 범죄들을 행함으로써 그들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을 깨뜨렸다. 예레미야의 메시지는 주로 저주와 심판의 메시지였지만, 그러나 동시에 장차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새 언약 (New Covenant)을 맺을 것이라는 소망의 메시지를 전한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예레미야 31:31). 이 새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로 성취된다.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눅 22:20). 

구약에 예언된 종말론적 사상 가운데 하나는 이스라엘의 회복이다. 이것은 구약의 다윗의 왕조의 회복이 아니라, 신약에 나타날 주님의 몸된 교회가 세워질 것을 예언한다. (아모스 9:11-12) “그 날에 내가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일으키고 그것들의 틈을 막으며 그 허물어진 것을 일으켜서 옛적과 같이 세우고, 그들이 에돔의 남은 자와 내 이름으로 일컫는 만국을 기업으로 얻게 하리라.”  

“무너진 다윗의 장막의 회복”은 이미 멸망한 다윗의 왕조가 바벨론 포로의 석방과 귀환으로 다윗의 왕조가 회복되는 것이 아니라, 다윗의 아들, 그리스도 안에서 다윗의 왕조가 회복된다는 예언이다. 이 예언의 성취는 사도행전 15장에서 야고보가 확증한다. (행 15:15-17) “선지자들의 말씀이 이와 일치하도다 기록된 바 이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허물어진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예루살렘 공의회의 의장인 야고보는 15절에서 “선지자들의 말씀이 이와 일치하도다” 선언했다.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사도들이 이방인 가운데서 행한 선교 활동에 대해 말했고, 야고보는 하나님께서 이전에 계시하신 내용을 요약하여 아모스 9:11-12을 인용했다. 신약에는 유대인이나 이방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어, 영적인 다윗의 왕조인 교회를 통하여 하나의 하나님의 백성으로 모인다는 것을 설명한다.

아모서 9:12절의 “에돔의 남은 자”는 다윗의 아들의 구속적 왕권 아래 놓이게 될 것이다 (under the redemptive kingship of David’s son). 에돔 (모든 민족)은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 있게 됨으로써 큰 유익을 얻을 것이다. (시 2:8). 행 15장에서 야고보는 이 구절을 하나님께서 택함을 받은 이방인들을 교회에 포함시키신 일에 적용한다. “에돔의 남은 자”는 열방 가운데 구원받은 자들이다 (the redeemed from all nations).

KHL0206@gmail.com

07.15.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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