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성실장로교회 원로)
VI. 인간론 (5)
L. 하나님의 언약 (The covenant of God)
무한하시고, 영원하시며, 불변하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유한한 피조물 인간과 어떠한 방법으로 관계를 맺을 수 있는가? 어거스틴은 “유한은 무한을 채울 수 없다” (finitum non possit capare infinitum)’, 칼빈도 이와 비슷한 말을 했다, “유한은 무한을 담을 수 없다.” 이것은 유한한 인간이 무한하신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무한하신 하나님께서 언약을 통하여 유한한 인간과 관계를 맺고 계신다. 언약의 본질은 하나님과의 관계이다. 죄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의 파괴이며, 구원은 관계의 회복이고, 성화는 관계의 성장이며, 영화 (천국)는 관계의 완성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언약에 대해 잘 설명한다. 7:1, 인간과 맺으신 하나님의 언약에 대하여 (Of God’s Covenant with Man) “하나님과 피조물의 차이는 매우 현격해서, 이성적인 피조물들이 자기의 창조자이신 하나님께 순종할 의무가 있기는 하지만, 그들은 결코 그분에게 축복과 보상으로서 어떤 성과도 거둘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으로서는 어느 정도 자발적인 비하에 의해서, 기꺼이 그것을 언약의 방식으로 나타내셨다.” (The distance between God and the creature is so great, that although reasonable creatures do owe obedience unto Him as their Creator, yet they could never have any fruition of Him as their blessedness and reward, but by some voluntary condescension on God’s part, which He has been pleased to express by way of covenant).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의하면 언약을 인간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자발적인 비하” (God’s voluntary condescension) 라고 정의했다.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인 인간 사이가 너무 크기 때문에 서로 교통할 수 없다. 무한하신 하나님께서 먼저 유한한 인간에게 자기를 계시해 주셔야 하고, 먼저 인간에게 찾아와 주셔야 관계가 이루어진다. 신앙고백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찾아오심을 “하나님의 자발적인 비하” (voluntary condescension on God’s part)라고 설명한다.
칼빈은 성경 해석의 원리를 설명하면서 “스스로 낮추어 상대방에게 맞춤”(God’s accommodation)을 강조한다. 무한하신 (infinite) 하나님께서 유한한 (finite) 인간에게 찾아오실 때 스스로 자신을 낮추시고 인간의 편에서 이해할 수 있도록 말씀하셨다. 칼빈의 “스스로 낮추어 상대방에게 맞춤” (God’s accommodation) 사상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언약 사상과 동일하다. 무한하신 (infinite) 하나님께서 유한한 (finite) 인간이 알아듣도록 인간의 수준으로 자기를 낮추시면서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며, 관계를 맺는 방법이 곧 언약 (covenant)이다.
그리고 언약의 하나님은 초월적인 (transcendent)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내재적인 (immanent) 하나님이시다. 만약 초월적 하나님만 강조하면 이신론 (deism)이 될 것이며, 내재적 하나님만 강조하면 범신론 (pantheism)이 된다. 둘 다 성경의 하나님은 아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초월적인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우리와 함께 하시며, 교통하시는 내재적인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초월적이시면서 동시에 내재적인 하나님이 될 수 있는가? 언약을 통해서이다. 무한하신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통해 유한한 우리와 관계를 맺으시고 우리와 함께 하신다. 언약을 통하여 하나님은 “나는 저들의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나의 백성이 된다” 하셨다.
언약의 하나님께서 “자발적인 자신의 비하”를 통해 사람의 몸을 입고 임마누엘의 하나님으로 오셨다. 언약 속에는 하나님의 축복과 동시에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책임과 의무가 존재한다. 이 책임과 의무는 노예적인 책임과 의무가 아니라, 언약의 백성으로서 영생과 축복을 가져오는 무한한 영광의 책임과 의무이다.
에덴동산에서 인간과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의 뜻은 여기에 있었다. 하나님은 아담 (인류의 대표로서)에게 영생을 약속하셨고,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기를 요구하셨다.
이것은 노예적인 순종과 시험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심을 받은 인간에게 영생과 축복을 주기 위한 순종과 시험이었다. 일반적으로 이 언약을 행위 언약이라 칭한다 (The covenant of work).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7:2. “인간과 맺으신 첫 언약은 하나의 행위 언약이었는데, 생명은 거기서 아담에게 약속되었고, 그의 안에서 그의 자손에게 약속되었다. 그 조건은 완전하고 개인적인 순종이었다.”
인간이 행위 언약에서 실패하자 하나님께서 새로운 언약, 은혜 언약을 맺어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경륜을 신앙고백 7:3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7:3. “인간은 그의 타락으로 저 언약에 의해 주어진 생명에 대하여 스스로 자격을 잃어버렸으나, 주님은 기꺼이 두 번째 언약을 맺으셨는데, 그것은 일반적으로 은혜 언약이라고 한다. 그분은 거기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생명과 구원을 죄인들에게 아낌없이 베푸신다. 예수 안에 있는 구원받을 만한 믿음을 그들에게 요구하시고, 영생하도록 작정된 모든 자에게 기꺼이 믿게 하시고 또 믿을 수 있도록 그분의 성령을 주시기로 약속하셨다.”
구약학자 팔머 로벗슨 (O. Palmer Robertson)은 언약은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피로 맺은 결속”이라고 정의했다. (A covenant is a bond in blood sovereignly administered). 하나님께서 인간과 언약을 맺으실 때에,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삶과 죽음의 결속 관계를 제정하셨다. 언약은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피로 맺어진 결속이다. (When God enters into a covenantal relationship with men, he sovereignly institutes a life-and-death bond. A covenant is a bond in blood, sovereignly administered.)
팔머 로벗슨의 언약의 정의에는 세 가지 핵심적인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1) 언약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이다(sovereignly administered).
신앙고백에서 말하는 언약의 정의에서 하나님의 “자발적인 비하”(voluntary condescension)는 하나님의 주권성을 말한다.
2) 언약은 피로 맺은 것이다 (A covenant is a bond in blood).
언약은 삶과 죽음의 문제이다. 피흘림이 없이는 사함이 없다. 피흘림은 언약을 파기한 자에게 주어지는 책임이다. 언약을 파기한 자에게 주어지는 결과는 죽음이다. “네가 이것을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하셨다.
히브리어로 언약은 “베리트 (brit)”인데 “쪼갠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피를 흘리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실 때 쪼갠 짐승 사이로 하나님께서 지나가심으로 피흘림의 언약을 맺으셨다. 언약은 피로 맺은 약정이다.
3) 언약은 구원의 약속이다.
이 약속을 보증하는 표와 인 (sign & seal)으로, 하나님께서 유월절 어린양과 할례의 예식을 주셨다. 둘 다 피흘림을 뜻하는 증표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는 곧 이 피흘림의 약속이 성취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은 곧 하나님이 맺으신 언약의 신실하심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은 인간은 실패해도 (행위언약의 실패),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언약을 신실하게 성취하셨다는 것을 나타내는 언약적 죽음이요, 언약적 속죄이었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이 아니었다면 인간의 죄를 해결하는 흠 없는 제물이 될 수 없다. 그리고 만일 그리스도가 인간이 아니었다면 그는 인간을 대표하는 언약의 머리 (head of covenant)가 될 수 없다. 우리의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완전한 사람이며, 완전하신 하나님이시다 (two natures in one person).
죄는 도덕적인 것 이전에 언약의 파괴이며, 하나님과의 관계의 단절이다.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속죄의 피는 관계의 회복이다. 은혜 언약의 중심은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한 하나님과 관계 회복이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구원 (구속)이다.
기독교 진리는 옳은 행위 (doing)를 논하기 전에, 먼저 옳은 신분 (being)이 요구되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언약의 의미이다. 죄는 일차적으로 행위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신분의 문제이며, 관계의 문제이다. 죄는 하나님과 관계의 파괴이다.
언약신학에서는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가 (새로운 신분) 먼저이고, 그리고 난후에 인간의 행위이다. 그리스도안에서 새사람으로 창조되는 것 (신분, 관계회복)이 먼저요 그리고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나온다. 이것이 언약의 핵심이다. 하나님과 관계의 회복이 먼저이며, 그리고 언약 백성들의 책임과 의무가 강조된다.
기독교 사상체계는 존재론 (하나님)이 먼저이고 그리고 인식론 (하나님의 존재의 전제), 또한 나아가서 기독교적인 행동(윤리)임을 알 수 있다. 무한하신 하나님께서 (존재론) 우리 인간에게 먼저 찾아오셔 우리에게 계시해 주심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 있고 (인식론), 이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우리와 언약을 맺음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게 되며, 그리고 구원받은 성도들은 언약의 백성으로 살아야 하는 언약적인 책임과 의무가 주어진다 (기독교 윤리).
타락 전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순종의 언약이 주어졌다. 이것이 행위 언약 (The covenant of works)이다. 이 언약은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함으로 성취되는 언약이다. 그런데 아담은 이 행위 언약에서 실패하였고, 아담뿐만 아니라, 아담 안에서 모든 인류가 죄인이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새로운 언약을 맺어셨다. 이 언약을 우리는 은혜 언약 (The covenant of grace)이라고 부른다. 이 은혜 언약의 머리는 그리스도이시다. 그리스도는 둘째 아담으로서 하나님의 요구에 순종하셨고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은혜 언약을 충족시켰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이 은혜 언약 안에 들어오게 되며, 율법의 정죄 함으로부터 자유함을 받는다. 은혜 언약은 우리를 대신하여 예수님께서 율법을 완성하신 언약이기 때문이다. 아담이 실패한 것을 그리스도께서 완성 하셨다.
성경은 언약의 책이다. 신구약 성경을 읽고 묵상할 때마다 무한하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무조건적으로 죄인인 우리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알 수 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언약의 의미이다.
이것이 우리의 영원한 찬송의 제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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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04.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