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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땅 (2) - 하나님의 안식

박성현 박사

 (고든콘웰 신학대학원 구약학 교수)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창2:2). 

모세의 가르침을 받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이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다는 것은 무엇을 뜻했을까?

먼저 본문의 번역을 살펴보자. 히브리어 원문과 비춰볼 때 창세기 2:2 상반절의 한글 개역개정 번역은 무난하다. 단, 하반절은 수정이 필요한데, “그치고… 안식하시니라”로 번역한 부분은 히브리어의 한 단어를 옮긴 것이다: ‘샤밭’하시니라(wayyišbōṯ). 

이 관찰은 그 다음절에도 이어지는데, “마치시고… 안식하셨음이니라”(창2:3)로 번역한 내용 역시 히브리어 원문상에서는 한 단어일 뿐이다: ‘샤밭’하셨음이니라(šāḇaṯ). 이렇게 하나의 히브리어 동사를 한글 개역개정에서 ‘그치고 안식하다’ 또는 ‘마치고 안식하다’ 등 두 동사를 동원해 옮긴 이유는 아마도 ‘샤밭’하다는 동사가 사전적으로 볼 때 ‘일을 마치다’는 뜻과 ‘안식하다’는 뜻 둘 다를 가지기 때문인 것 같은데 실제로 한 단어가 문장상에서 가질 수 있는 뜻은 하나일 뿐이다. 그래서 영어 ESV의 경우 이를 “rested” 한 단어로 옮기고 있는 것은 잘한 것이다. 

이처럼 한글번역에도 정확을 기하자면 창세기 2:2 하반절은 이렇게 될 것이다: “그가 하시던 모든 일로부터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그럼 이제 하나님이 모든 일로부터 안식하셨다는 뜻에 대해 살펴보자. 즉, 창세기 문맥에서 안식의 주체가 하나님일 때 갖는 의미가 무엇일까 하는 것이다. 모세를 통해 창세기 말씀이 출애굽한 이스라엘에게 주어지던 시절 고대근동 민족들 간에는 신의 ‘쉼’에 대한 신화적 나름대로의 이해가 있었는데, 이스라엘은 창세기 1:1-2:3을 통해 하나님의 안식에 대한 바른 가르침을 받는 축복을 누리게 되었다. 

우선 이스라엘이 사백 년간 거류했던 애굽을 살펴보자. 다신주의에서 출발한 애굽은 출애굽의 배경이 되는 신왕국(주전 16-11세기)에 이르러 택일신론을 거쳐 유일신론에 이르는 종교형태를 실험적으로 섭렵해가는 중 ‘멤피스 창세신화’를 낳게 되었다(사진 참조). 

이 신화에 따르면 프타(Ptah) 신이 모든 것을 만든 후 ‘쉬었다’는 것이다. 다른 신들을 낳고 그들을 위한 지경을 정해 성읍을 만들고 사당을 지어 그 안에 프타 자신의 몸의 발현인 나무, 바위, 흙에서 얻은 재료로 만든 신상을 세워 신들로 하여금 각각의 형상에 깃들어 살게 하여 애굽이 신국이 되게 한 후 ‘쉬었다’는 것이다. 즉, 세상은 신의 몸이며, 나무, 바위, 흙 모든 것이 그 신의 몸의 발현이고 이런 세상을 다스리는 것은 그 형상을 따라 그 나무, 그 바위, 그 흙으로 만든 신상이라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프타 신이 누린 ‘쉼’의 의미는 무엇인가를 살핌에 있어서 버나드 F. 바토(Bernard F. Batto)는 프타의 ‘쉼’은 창조의 대업을 완성한 신이 누리는 ‘특권’이었다고 정의했다. 이러한 신이 누릴 특권으로서의 ‘쉼’의 모티프는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가야 할 가나안 땅 북쪽의 우가릿(Ugarit) 지역 신화와 그 이전 아브라함의 고향인 우르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수메르 문명을 뒤 따르는 메소포타미아 지역 신화들 속에도 발견된다.

이런 신화들, 특히 애굽의 신화에 젖어 있을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은 창세기 1:1-2:3 말씀을 통해 바른 가르침을 주신다. 세상은 신의 몸뚱이가 아닌 하나님이 만드신 자연이며 그것을 다스리는 것은 나무나 돌로 만든 신상이 아닌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셨다. 생령인 사람이 반영하는 것은 그를 만드신 하나님이 참 신이라는 사실이며, 반대로 생명이 없는 신상이 반영하는 것은 그것이 가리키는 신이 존재하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따라서 ‘쉼’이 창조의 대업을 이룬 신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이 맞다면 그 특권은 오직 한 분, 실로 만물의 창조주이시며 유일하신 하나님만이 가질 수 있는 것임을 창세기 1:1-2:3은 가르친다.


‘멤피스 창세신화’가 새겨진 샤바코 석(The Shabako Stone © The Trustees of the British Museum). 연대: 제 25왕조. 신화내용은 제 19왕조(주전 13세기)로 추정.

 

 

이제 바벨론의 아트라하시스(Atrahasis) 서사시를 통해 신의 ‘쉼’에 관한 또 다른 일면을 살펴보자. 비록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토판은 주전 17세기에 만들어지기는 했으나 내용 자체는 수메르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이 서사시는 흔히 메소포타미아 판 노아의 방주이야기로 일컬어진다. 

이 서사시에 따르면 인간이 신들을 위한 부역을 위하여 창조되었으나 그 수가 많아지자 그들의 부르짖음이 최고 신인 엔릴(Enlil)로 하여금 잠을 청할 수 없게 하여 마침내 대홍수로 인간을 쓸어버리고자 했다는 내용이다. 여기서 인간의 부르짖음은 신의 권위에 대한 저항 또는 반역으로 해석되고, 또 엔릴로 하여금 잠을 청할 수 없게 한다는 것은 그의 ‘쉼’을 방해한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그래서 바토(Bernard F. Batto)는 신의 ‘쉼’의 또 한 면은 신의 ‘권위’를 반영한다고 보았다. ‘쉼’은 신의 권위의 상징이며 신의 ‘쉼’에 다가서는 인간은 쓸어버려 그 ‘쉼’이 더 이상 방해받지 않게 하겠다는 것이 엔릴의 취지였던 것이다.

 

우리를 ‘쉼’으로 인도하신 하나님 자신은 일하심

하나님의 안식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열심

 

이 서사시의 내용 역시 출애굽하는 이스라엘에게는 친숙한 내용이었을 것이다. 그런 그들에게 창세기 1:1-2:3을 통해 하나님께서 알리신 하나님의 권위는 자신의 ‘쉼’을 일곱째 날에 두시어 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신 것이었다(창2:3). 그리고는 이 가르침을 받고 있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이 복된 날을 온 백성이 다 함께 누리게 하셨다: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출20:10). 

인간으로부터 신의 ‘쉼’을 지키고자 인간을 쓸어버리려 했다는 바벨론 서사시의 주장과는 정 반대로 창조주 하나님은 당신의 ‘쉼’으로 백성 모두와(당시 종과 객까지도) 그들이 보살피는 가축까지도 초청하신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출20:8)–이 말씀은 이스라엘을 향한 법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권위의 구체적 표현이었고 하나님은 이 권위로 ‘쉼’이라는 당신만의 ‘특권’을 그의 백성과 그에게 허락하신 모든 영역에 선물로 주셨다. 하나님의 ‘특권’은 복이었고 그 복이 우리에게 나눠지게 한 것이 그 분의 ‘권위’였다.

모세의 가르침을 받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이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다는 것은 무엇을 뜻했을까?

아담과 하와는 당연히 알았을 그 복의 기억이 잊혀지고 왜곡된 지 오래였지만 시내광야에서 창조주 하나님은 당신의 권위로 그 복을 다시 회복시키고 계셨다. 이스라엘의 조상들과 세우신 언약위에 그들을 제사장 나라로 세우시어(출19:6) 그들이 이 복을 누리게 하시고 또 그 복을 뭇 민족들에게 나누게 하시고자 당신의 ‘쉼’으로 그 백성을 부르셨다. 그렇게 우리를 ‘쉼’으로 인도하신 하나님 자신은 정작 쉬지도 않으시며(시121) 전혀 우리의 부르짖음으로 인해 방해를 받지도 않으신다: 

“주여 깨소서… 일어나 우리를 도우소서 주의 인자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하소서”(시44:24-26). 오히려 그 부르짖음을 들으시고자 우리를 당신의 ‘쉼’ 곁이 두신다: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아주 잔잔하게 되었거늘”(마8:26). 하나님의 안식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열심이다.

spark4@gordonconwell.edu

02.25.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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