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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적인 욕심을 버리고 바른 교회와 신앙을 회복

- 내실하고 바른 열매를 맺는 신앙 -

전남수 목사 (알칸사 제자들교회)

인생의 다른 색깔

인생이 짧다는 것은 나이가 들수록 깊이 경험케 되는 진리이다. 시간의 소중함을 많이 알아가는 만큼, 절대적인 시간은 더욱 작아지기에 절실하게 깨닫게 된다. 커피 마시는 법 아십니까?라는 글에 나오는 내용이다. 커피는 그냥 숭늉처럼 먹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커피를 머금고 숨을 들이쉬고 코로 내 뱉으면 커피의 맛을 온몸으로 느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보통은 ‘그냥 마시면 되지 무슨 법이 있나?’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렇다. 그냥 마셔도 된다. 그런데 커피를 혀로만 느끼는 사람하고, 가르쳐준 대로 커피를 몸으로 느끼는 사람하고 결코 맛의 만족함이 똑같지는 않을 것이라는 내용이다. 세상도 마찬가지라 보여진다. 이래 살아도 한세상 저래 살아도 한세상이라며, 세월만 보내시구려 하는 사람들이 많다. 물론 그런 사람들에게도 동일한 시간계산이 적용된다. 그러나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은 아직도 뭔가를 모르는 인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커피 맛이야 이러나저러나 사소한 차이겠지만, 인생은 그 자체의 유한성을 생각할 때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온몸으로 주님의 은혜와 사랑 그리고 그 능력을 느끼며 사는 이들이 있는 반면에, 또 어떤 사람은 그냥 혀로 커피 맛을 조금 알듯이 알 듯 모를 듯 그렇게 신앙 생활하는 사람들도 엄청 많다는 것이다. 훗날 마침내 이들에게 찾아온 그 짧다는 인생의 종말에도, 과연 그 두 부류의 인생이 똑 같을 수 있겠느냐?하는 것이다.

상식적인 욕심과 바른 삶

목회에 있어서 목회의 번성과 번영에 중요한 방점을 두는 경우를 본다. 그러나 양적 다수의 번성함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교회가 잘못 가지 않고 바르게 간다는 것이다. 겉으로 화려해 보일지라도, 내실의 깊은 맛을 드러내는 열매가 없으면 그 나무는 찍어 불에 던진바 될 것이기 때문이다. 마침내 스스로 심판을 향해 나아가는 것을 목도한다. 흔한 예를 들어보면, 방언을 하고 기도를 몇 시간씩 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런 분들은 시간이 지나면 요지부동하고 태도에 교만이 되어서 뭐하나 정리할 수도 없고 마음을 걸어 잠그는 것을 보게 된다. 말하자면, 신앙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어린 아이가 되고, 자기를 나눠야 주님 닮은 사람이 되는데, 양석 번성을 지향하는 그 욕심이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반대로 가려다 보니 나눔과 베품의 은혜는 메말라가더라는 것이다.

성경을 알면 알수록 얼마나 더 자신의 것을 주님을 위하여 바칠 수 있느냐의 생각을 해야 한다. 세상적 욕심과 명예를 버릴 수 있는 훈련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아름다운 것이다. 목회자들도 박사학위, 큰 교회 세움, 유명한 목사, 무언가 얻은 것에 대해서 끊임없이 말한다. 주님이 진정으로 원하시는 삶의 본질과 현상을 추구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부수적이고 자기 유익을 구하는 내용에 너무 관심이 많다. 신앙의 열매는 소유가 아니라 주님을 위해 나를 버리는 것이며,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것이다. 여기에서 벗어날 때 인간의 성취라는 것이 오히려 타락의 통로가 되는 것을 보게 된다.

세계적인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는 사람을 보면, 학위를 땄기 때문에 이제부터 세계적인 인물이 되었다는 성취감을 가지게 된다. 그런데 사람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그 다음부터는 눈에 보이는 것이 없어지더라는 것이다.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으면, 스스로 자기를 광고하면서까지 인정받으려는 심리가 있음을 보게 된다. 그들은 자신들이 노력해서 얻은 박사학위가 세상의 모든 것을 얻은 것으로 생각을 한다. 그리고 앞으로 무엇을 더 얻을 것인가로 고민한다. 욕심이 들어오기 시작하는 것이다, 참된 성도의 축복은 얻을수록 주님을 위해 나의 것을 포기하고 버리게 되는 것이 되어야 함에도, 세상의 인정 앞에 굶주린 모습으로 초라한 자신을 드러낼 따름이다.

바름은 양심의 기준과 법으로 불가능

주님이 원하시는 현상과 본질에 있어서 아름다운 열매는 자연스런 마음의 양심으로는 부족함을 보게 된다. 가룟 유다를 보라. 사단이 먼저 마음속에 생각을 주었고, 그 생각이 계속 변화되고 성장하여, 그의 욕심을 점유하게 되었을 때, 그는 주저 없이 예수님을 팔게 된다. 그러다가 결국 그는 비참하게 자살하여 죽는다. 가룟 유다를 보면, 어떤 면에서는 자기 양심에 충실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자기 선생을 팔았다는 것에 대해서 양심에 깊은 찔림이 있었다. 그리고 책임감이 있었다. 그것이 그를 스스로 자살하게 된 동기가 되었다. 자기의 사랑했던 스승을 죽였다는 그 양심의 죄책감이 그의 의가 되어 죽음으로 자신을 내몰게 된 것이다.

유다는 자기가 분명히 죄를 지었음을 알고 있었던 사람이다. 성소에 가져가서 예수님을 판 그 돈을 던져 버렸다. 가롯 유다의 출신은 다른 제자들과 다르다. 유대지방의 가롯 동네이다. 자기가 부족함을 알고 도망가서 조용히 살겠다면 자기 출신 동네로 가면 되지 않았는가? 자기 고향으로 가면 누구도 모르게 살 수 있었다. 그런데 유다는 예루살렘에 있는 성소에 가서 돈을 내어 놓고 자살했다. 다른 제자들 중에서 그 십자가 사건에 있으면서 자기 죄를 깨닫고 누가 과연 성소까지 가서 자기 죄를 고백했을까? 없었다. 제자들은 양심도 저버린 모습들이었지만 유다는 인간의 양심만큼은 회복한 듯 보였다. 그리고 성소에 갔다는 것으로 종교성으로 인한 양심의 가책이 매우 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회개는 아니지만 종교적, 인간적 반성을 한 사람이다. 그는 인간적으로는 양심적이었고 자기가 죄인임을 뼈저리게 느낀 사람이다. 그러나 결국은 그 양심도 그 영혼을 바르게 구원하거나 인도할 수 없었음을 보여준다.

실제 그는 예수님의 외형적인 제자였지만 본래 그는 사단의 제자였다. 그는 사단에게 끝까지 충성했다. 가롯 유다는 본인 스스로 인식하지는 못했어도 사단을 끝까지 사랑했던 사람이요, 그 사단이 이루려고 했던 것을 끝까지 이루었던 사람이 유다였다. 반면에 베드로는 주님을 배반했어도 사단의 제자는 아니었다. 다른 제자들은 비겁하게 도망했어도 사단의 제자는 아니었다. 양심은 타락해도 주님께 돌아올 수 있었던 비겁한 믿음 없는 제자들이었다. 이런 생각을 해본다. 유다가 몇 시간만 자살을 미루었다면, 36시간만 자살을 미루었다면,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가룟 유다를 찾아가지 않았을까? 다른 제자들에게는 비굴하고 연약해도 주님이 찾아와 주셔서 부활하신 모습을 보여주셨다. 그도 역시 조금만 자살을 연기하고 기다렸다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지 않았을까? 결국 그에게 그런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사람들은 양심에 기초한 세상을 꿈꾸며 말한다. 그러나 가장 양심적이고 종교적인 인생이라 할지라도 저절로 바른 삶, 바른 신앙에 이르지는 못함을 기억해야 한다.

바름은 본질과 현상의 일치

신학공부를 하고자 찾아오는 청년들을 향해 포기하라고 강권한다. 올해만 벌써 서너 명이다. 욕심이 보이기 때문이다. 목회의 길은 자원해서 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거부하고 또 거부하라고 말한다. 자기 양심 혹은 마음의 내적인 자원하는 마음이 생겨도 거부하며 기도하도록 요청한다. 마치 인생의 막다른 길목에서 죽을 위기가운데 건져주신 그 확신이 없이는 그의 유한한 인생도 그가 섬기는 교회도 큰 상처가운데 고통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고후 11:23절을 보라.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군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 하였으니' 교회가 왜 고통을 당하는가? 정신없는 말을 하는 자들 때문이다. 정신없는 제자들 때문이다. 고린도 교회에 이런 사람들이 많았다. 바울이 잘 가르쳐서 심어놓았는데, 나중에 보니까 정신없는 말을 하더라는 것이다. 우리 주변에 이런 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입술에는 말씀이 있고, 교회에서의 연륜과 경험 그리고 직분들은 소유하면서 하나님의 본질적인 진리의 말씀을 변질시키는 악한 심령이 수 없이 많음을 본다. 더욱이 지도자들이라면 어떻게 될까?

교회가 왜 시끄러운가? 말씀이 들려지고 성령이 세미한 음성으로 다가오지만 자신의 양심의 소리를 소견삼아 살기 때문이다.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일꾼이 있는 교회는 바르게 설 수 없다. 많은 성경공부와 훈련과정이 자신 속에 돌멩이처럼 심겨져 있어서 주님의 은혜의 빛이 통과하지 못하고, 주의 말씀의 씨앗이 온전히 뿌려지지 못함으로 시끄러운 것이다. 바른 신앙과 교회를 파괴시키고 나뉘는 주범이 된다. 신앙과 교회와 목회의 본질은 하나님의 영광이다. 그 하나님의 영광은 참된 예배로 그 현상적인 열매를 드러내게 된다. 하나님은 죄 많은 인생을 예배가운데 만나주시고 그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신다. 주님 앞에 나아올 때 마다 우리는 본질로서의 하나님의 영광과 현상으로서의 참된 예배의 회복을 맛보며 나타나야 한다. 이것이 일치될 때, 교회공동체는 세상의 빛으로 소금으로 그 성도들을 세상가운데 온전히 보여주게 될 것이다. davidnjeon@yah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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