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o

은혜를 지키지 못하는 거역과 배신의 말세현상

-은혜에 무지한 가난한 광야인생 -

전남수 목사 (알칸사 제자들교회)

신앙과 믿음의 열매 신앙이라는 것이 평소에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것처럼 보여질 때가 있다. 당장 내 눈앞에 필요한 1불 한 장이 없다고 할 때, 누가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나? 하나님이신가, 아니면 바로 옆에 있는 친구일까? 참 신자에겐 어리석은 정답처럼 보이지만 철저하게 세상의 관점만을 가지고 해석한다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당장 손을 뻗칠 수 있는 사람이 도움이 될 것이다. 삶을 사는 데 그다지 신앙이 꼭 필요할 이유도 없어 보인다. 실제로 평소에는 믿음의 유무를 떠나 모두가 비슷비슷하다. 그러나 사람에게 위기가 닥쳤을 때, 결국에는 그 사람의 신앙이 그의 삶을 축복되게 함을 분명히 볼 수 있다. 위기 앞에 어떻게 반응하는가에 따라서, 과연 평소 나의 신앙의 정체는 무엇이었으며, 내가 또 어떤 모습으로 나의 하나님을 섬겼는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결국 신자의 인생은 그 신앙과 그에 따른 믿음의 열매를 먹고 사는 것이다.

한결같은 신앙, 한결같은 은혜 위기 앞에서 인생은 액면 그대로 살아가던 모습 그대로, 벌거벗은 듯이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고 표현할 수밖에 없다. 자녀들도 마찬가지이다. 부모를 온전히 섬기는 자녀들은 가정의 어려움 앞에서 부모에 대한 태도가 다르다. 집안에 어려움이 생기면 여러 가지 발생되는 불편함 때문에 원망과 불평을 털어 놓게 되는데, 그 반응은 복이 없는 모습들이다. 그러나 어렵지만, 그런 순간들 속에서도 부모를 이해하고 한결같이 순종할 수 있는 자녀라면 그는 참 복 있는 존재로서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계명의 복을 받으며 성장하게 될 것이다. 부모 앞에서 한결같이 성숙한 칭찬받는 자녀가 되어야 하듯이, 믿는 신자는 하나님 앞에서도 한결같은 모습으로 살아가야 한다. 신앙의 아름다움은 무엇보다 한결같음이다. 상황이나 환경에 따른 요동함이 없이 한결같은 모습으로 삶을 경영하는 것은 너무나 아름답고 복된 것이다. 특히, 위기와 어려움이 순간이 찾아왔을 때, 그런 순간에도 자신의 생각과 유익을 좇아 핑계하는 삶을 살지 않고 오직 주님만 바라보게 될 때, 그는 참으로 복된 성도의 삶을 산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결같음은 아무런 변화가 없는 무생물적인 존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변화가 필요하고 사람이 변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사람이 어떻게 늘 똑같을 수가 있겠는가? 예를 들어서 신혼부부 때는 모든 것이 조심스럽다. 옷 입는 것이나, 새댁들에게는 자연현상인 하품하는 것도 조심스러운 법이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어떤 부부는 서로의 생리현상을 상호교환하면서 노시는 분들도 있음을 본다. 처음에는 장을 보러 갈 때도 화장을 하더니, 나중에는 몸빼 옷도 마다않고 나타나는 것이다. 애 키우다 보니까, 가정형편 생각하니까, 가정을 먼저 생각하다 보니 처녀 때처럼 화장품도 못사고 아끼다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 그래서 만약에 그걸 가지고 내 아내가 변했다고 투정하거나 한눈파는 남편이 있다면 대단히 복 없는 남편의 반열에 서게 되는 것이다.

본질을 놓치는 변화-변질 한 마디로 사람은 변할 수 있고 변해야 하는 것이 정상이다. 이것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람이 변함의 시간을 가지다가 그 본질마저 놓치게 될 때에는 그런 본질을 놓친 변화의 상태를 칭하여 변질되었다고 말할 것이다. 본질을 놓친 변화 혹은 변화의 때를 놓쳐버리고 오래 동안 방치된 상태의 변질을 말하는 것이다. 그 증상은 무엇인가? 사람이 변질되면, 악취나는 인생을 드러낸다. 더불어 변화의 아름다운 향기보다 사막의 선인장과 엉겅퀴처럼, 주위사람들을 찌르는 인생이 되어지고, 그런 사람의 주변에는 사람들이 더불어서 외로움에 쉬 빠져들기도 한다. 한마디로 복 없는 삶의 길을 가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한결같은 믿음과 마음으로 본질을 놓치지 않는 복된 변화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 환난과 위기와 어려움이 찾아올수록 더욱 복 있는 삶의 길을 걸어가야 된다. 신앙은 변화이다. 변화는 말씀의 씨가 뿌려지고 성령의 생수가 부어지면서 말씀순종의 싹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히는 과정을 말할 것이다. 하나님이 원하심은 그런 복된 변화의 열매를 보기위한 것이다. 주변의 사람들 가운데 신, 불신을 막론하고 삶의 본질을 놓치지 않는 변화는 아름다운 것임을 보게 된다. 그러나 신자들 가운데에도 변화의 과정을 놓치거나 상실한 사람들이 많아서 악취를 드러내는 변질의 과정을 지나면서 한결같은 항변을 드러낸다. 은혜를 받으면, 은혜가 임하면 뭔가 대단한 변화의 길이 자신에게 있을 것인데, 이 은혜가 나에게 없다는 것이다.

은혜가 부족한가? 혹자는 은혜를 받으면 자신의 삶을 헌신할 것인데, 아직 그 은혜가 임하지 않았다고 스스로를 해명하는 것을 본다. 그러면서 그 은혜를 목회자의 신령한 능력에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을 본다. 그러나 가만히 들여다보면 은혜는 더 받지 못함이 아니라, 지키지 못함으로 누리지 못하는 것이 정답이다. 흔히 인생의 불평은 현재적인 필요를 채워주지 않는다는 이유가 그 대세이다. 그러나 사실 은혜는 현재적이라기보다는 지나간 과거의 일에 대한 현재적 인격의 감동이라고 할 수 있다.

서울대 총장을 지내신 분 가운데, 어느 날 대통령이 전화를 했다고 한다. 총장에서 총리로 와 달라는 것이다. 그 총장님은 썩 내켜하지를 않았다고 한다. 학자로서의 삶을 살기 원했는데 짧은 세상의 영화를 맛보기 위해, 평생의 학문의 길을 포기해야 만하는 그런 순간이 된 것이다. 그때 대통령이 한마디를 더 한다. ‘내가 자네 어려울 때 내가 도와주지 않았는가?’ 그 말 한마디에 그는 총장직을 내려놓고, 다시 학교로 돌아오지 못할 짧은 총리의 길을 선택한 것이다. 현상적인 좋음의 기준이 다르기에 외부적인 판단을 유보하더라도 과거의 은혜를 잊지 않고 보은한다는 것은 학자로서의 현명함을 넘어서서 그가 가지는 인격의 아름다움이라고 생각된다. 어떤 분은 자신의 병을 고쳐준 의사에게 고마워서 자신의 재산의 절반을 주었다고 한다. 화장실 갈 때와 올 때가 다르다고 하더니, 그는 아름다운 인격의 소유자인 것이다. 한국의 D대학의 학장 겸 경영학과 교수인 어떤 분은 자신이 어릴 때 공부와 진로를 조언해주고 도와준 분을, 몇십년 세월이 흘러도 잊지 않고 제가 그분 때문에 이렇게 잘 되었습니다, 늘 간증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세상 사람들도 고백할 수 있는 은혜에 대해 신자가 삶을 살면서 주님이 베푸신 은혜에 대한 간증이 없다면 그의 인생은 너무나 빈약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 아니겠는가?

은혜를 기억함이 감사의 삶 세상 사람들은 은혜를 모르면 버러지 벌레 같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 성도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는 어떠한가? 하나님 앞에서 예수님의 피로 구원받은 우리는 과연 내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가 부족하다는 말인가? 풍성하고 놀라운 은혜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은혜를 모른다면, 그는 벌레만도 못한 못난이 인생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은혜를 기억하고 회복하게 될 때 그 인생은 복된 여정을 지나가게 될 것이다. 6.25 전쟁으로 부모를 잃고 미군에게 입양된 어떤 사람에게 그가 태어난 조국 대한민국은 원망의 대상이었다고 한다. 자신의 생명과 삶을 돌보아 주지 못해 버림받게 된 자신의 인생의 회한만큼 한이 맺힌 나라였던 것이다. 그런 그가 어느 날 우연히 종군기자의 사진 속에서 동생으로 보이는 아이를 업고 자신의 손을 붙잡고 황급히 피난을 떠나는 한 여인의 모습 속에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의 어머니가 전쟁 통에도 자기를 버리지 않고 자신을 살리려 했다는 그 한 가지 사실 앞에, 평생의 모든 회환과 원망을 내려놓았다는 것이다. 버림받은 인생인 줄 알았는데, 그 사진 한 장의 감격이 원망을 감사로 역전시키는 은혜의 시간이 되었던 것이다. 사진 한 장으로도 은혜를 발견한 인생은 새로운 축복의 인생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광야인생길에 은혜를 지킴 세상은 광야와 같은 곳이다. 내 마음대로 살 수 없는 곳이다. 세상 사람들 중에도 스승과 멘토가 있는 사람은 크게 망하지 않는 것을 본다. 우리에게 영원한 스승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붙좇을 때, 영원한 승리가 있다. 그리스도를 온전히 붙좇는 것이 무엇인가? 광야 인생길에서 이미 내게 주신 은혜를 잘 기억하는 것이다. 유월절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름으로, 죽음의 권세가 패스오버(Passover)하였던 그 은혜를 기억만 하여도, 수많은 위기의 순간에도 원망하지 않고 믿음으로 승리하였을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그 어떤 영적세력보다 강력한 힘이 되기 때문이다.

광야인생길에 온갖 사건사고들이 있음을 보게 된다. 성경은 말세의 현상가운데 부모를 거역함과 은혜를 저버리는 배신의 일들에 대해 언급한다. 부모의 멱살을 잡기도 하고, 심지어 낳아준 부모를 살인하는 일들까지 보게 된다. 현상에 대한 이유와 설명은 다양할 것이지만, 결국 은혜를 기억하지 못함으로 그 인생이 스스로 멸망의 길에 휩쓸려 가는 것이다. 이민교회를 섬기다 보면 교역자나 성도들 가운데 자신의 마시던 우물에 침을 뱉는 경우를 듣고 보게 된다. 어리석기가 그지없음을 생각한다. 은혜는 기억하고 지킬 때에, 그 은혜는 본인이 더욱 풍성하게 누릴 수 있는 것인데, 원망과 탄식으로 점철된 자신의 그 과거는 전혀 하나님의 은혜가 개입하지 못했던 시간들–하나님의 섭리를 부정하는 어리석은 인생의 시간이 되고 마는 것이다.

은혜는 지킴으로 누리는 것 개인을 넘어서 교회와 민족도 마찬가지이다.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한국교회가 예전의 은혜를 회복하게 해달라고 기도하게 된다. 최근 방문길에 새벽기도 후에 아침밥을 하는 식당을 찾기 어려워 아파트 공사현장 인부들의 식당에서 조찬을 한 기억이 난다. 이유를 물어보니, 밤 문화가 발달해서 새벽 1-2시까지 장사를 하기에 도저히 새벽을 깨울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1천명이 모이는 교회에도 새벽기도회 숫자는 100명이 채 안되는 것을 본다. 밤 문화가 발달해서 흥한 나라가 역사에 있었던가? 하나님께서 주신 복은 아니지 않는가?

조국의 경제적 부흥을 가져온 새마을 운동도 그 첫 주제가의 시작이 교회 새벽기도 종소리였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새벽부터 울리는 교회의 종소리에 온 민족이 잠을 깨고 하나님 앞에 축복을 간구하며 가난으로 점철된 연쇄적인 어려움을 이겨내어 왔는데, 조국의 새벽을 깨우지 못하는 것은 그 은혜를 잊어버림이 아닌가? 은혜를 기억하지 못하고 잊어버리게 될 때, 가정이나 교회나 민족과 나라도 한순간에 무너지는 데 하는 아쉬운 마음을 가진다.

개인이나 교회나 민족이든 은혜를 기억하지 못하고 거역과 배신과 배반을 통해 스스로를 복되지 못한 길로 이끌어가게 될 때 그 미래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음을 기억해야 한다. 말세현상의 경고에 정확히 부합하기 때문이다. 지혜자는 누구인가? 하나님의 은혜, 작은 인연과 도움에도 그것을 은혜로 기억하고 감사하는 삶, 그런 이들에게 참으로 하나님께서는 복되게 인도하는 광야 승리자의 인생을 허락하실 것이다. davidnjeon@yahoo.com

Leave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