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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임성택(1872-1968)

-8.15 해방 전 한인 선교사

임성택은 1872년 10월 12일에 경기도 부평에서 태어났다. 그는 1900년 11월 15일에 경기도 제물포에서 10살 연하의 임성실과 결혼하였고, 1903년 4월에 그는 그의 부인과 함께 니본 마루에 의지하여 하와이 호놀룰루로 이주했다. 이후 로스앤젤레스(나성)로를 거쳐 1908년 1월에 그는 중가주 핸포드에서 여관을 열었다. 프레스노에 있던 위영민이 핸포드의 전기 철로 신설에 3년간 300명에서 500명까지 고용하는 계약을 하였는데 그의 여관은 동포의 기숙을 위한 대책이었다. 그해 4월에는 그가 핸포드 지방 공립협회 경찰로 활동하였다. 그런데 이곳 제일감리교회 무어 목사가 한인을 친절하게 교제하였고, 병원에 갈 수 없는 처지에 있던 장인명, 조정열 등 한인들을 도와주었는데 이런 과정에서 임성택이 수고했을 것으로 보인다. 


스탁톤 한인감리교회

1909년에 임성택은 중가주 디뉴바로 이주하였고 이듬해 디뉴바 인근 바이실리아에 거주하였다가 다시 디뉴바로 이주했고 1913년에는 디뉴바에서 복숭아와 포도 따는 일을 주선했다. 1917년 디뉴바 한인장로교회는 예배당을 건축했다. 당시에는 신문에 헌금명단과 헌금액수를 공개하였음으로 임성택이 건축헌금으로 44달러를 헌금했고 교인 중 제일 많이 헌금하였음을 알 수 있다. 김성권, 이치완, 오창곤 및 임성택이 주동이었는데 재목, 의상, 전기 등이 외상이었고 심지어 못 한 개라도 외상이었는데 주위에 있던 사람이 그에게 너무 경솔하지 않으냐고 물었을 때 거침없이 ‘포도원 주인에게 헌금을 청하면 되지요’라고 간단하게 답변을 했다고 한다. 


임성택의 싸인

수천 달러의 적지 않은 돈이 동포들의 주머니에서 나온 것을 볼 때 그도 놀랐다. 당시 교인이 드린 헌금액이 508달러 70센트, 구 예배당 매매비가 250달러 그리고 재목 매매비가 11달러 50센트여서 총수입이 770달러 20전이었다. 건축경비 지출에는 재목 구매비가 456달러 13센트, 목수 공전이 157달러 80센트, 철물 구매비가 17달러 10센트, 굴통 임대비가 14달러, 도배 공전이 30달러, 마차비가 1달러, 전기동가설비가 50달러, 페인트 비가 32달러 50센트 그리고 은행이자가 28달러여서 총 786달러 8센트였다. 부족액이 15달러 80센트였으니 자조 정신을 보게 된다. 

디뉴바 한인장로교회를 건축한 1년 후인 1918년 12월에 맨티카 한인감리교회 건축에 임성택이 10달러를 헌금했고, 그의 부인 임성실이 5달러 50센트를 헌금하여 임성택 부부가 총 15달러 50센트를 헌금하였는데 제일 많이 헌금했다.

 

스탁톤 한인감리교회 전도사

 

1923년에 임성택은 나성으로 이주했다. 그의 부인이 병이 나서 치료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1926년이나 그 이전에 스탁톤으로 이주한다. 그해 8월 19일에 상항의 백인교회인 부쉬 스트리트 교회에서 미국 남감리교 연환회가 열렸을 때 임성택이 전도사의 신분으로 김 탁 목사와 참석했다. 그렇다면 1925년에 임성택이 전도사로 파송을 받았던 것임이 틀림없다. 

1926년에 임성택은 스탁톤 국어학교의 학부모회 회장이었다. 그해 6월 26일 오후 8시에 스탁톤 한인감리교회에서 있었던 스탁톤 국어학교 방학식에 임성택이 보인다. 교장 문양목의 사회로 애국가 1절과 2절을 부르면서 개회하여 교장이 식사를 담당하였고, 여학생 정비다의 피아노 소리에 맟추어 남학생 일동이 ‘부모님의 은덕’을 찬양한 후 학부모회 회장 임성택이 권설을 하였다. 그 후 여학생 일동의 ‘선생의 은혜’를 합창하였고, 남녀학생 일동이 배운 바 배달 5000년 역사를 차례로 나와서 강술하였으며, 김 탁 선생이 훈사를 하였고, 상품 수여에 이어 ‘방학노래’ 합창으로 마치고 다과회가 있었다.

1928년 9월 3일에 상항에서 모인 미국 남감리교 동양인교회 구역대회 때 임성택이 전도사로 파송 받았다. 이듬해 부활절 예배에 그가 사회를 맡는다. 그런데 신한민보는 그를 본 교회의 원로이자 장로라고 소개했다. 입추의 여지없이 대만원을 이루었는데 이날 설교는 나성 인근에 거주하면서 한인과 한인교회를 돕던 스트워트 부인이 맡았다. 부인의 특별한 방문에 모든 교인이 만강의 환희를 표했을 뿐 아니라 노약하신 몸으로 아주 열심히 함에 감사함을 드리지 않을 수 없었다.

스탁톤 한인감리교회 목사 김 탁이 한국으로 방문을 하는 1929년 3, 4월에 임성택은 김필권과 함께 교회를 목회한다. 주일 예배는 물론 주일학교와 국어학교를 담당하였다. 그해 4월 태평양 대학에서 공부하는 허 근을 음악 교사로 초청하여 어린이에게 찬송가를 가르쳤다. 그 결과 어린이들이 누구나 다 우리말로 찬송가를 부르며 주일학교 선생의 무슨 질문에도 곧잘 대답하였다. 그달에 본 교회에 우연히 참석한 신한민보 기자에 따르면 버클리의 태평양 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는 임정구 목사가 주일 예배를 주장하였는데 정비다의 유창하게 치는 피아노에 맞추어 일반 교우들이 찬송가를 부른 후에 ‘눈이 있으면 바로 보자 귀가 있으면 바로 듣자’라는 제목으로 설교하였다. 그는 예수교를 바로 보며 바로 들어서 조선 사회에 소화 시켜야 한다는 대지를 중심으로 여러 가지 과학적 실례를 들어 역설하였다. 

1929년 9월 17일 오전 9시에 북가주 버클리의 웹윗 남감리교회 응접실에서 S.R. 헤이 감독의 사회로 미국 남감리교 가주 동양인 선교연회가 있었다. 이날 임성택은 김필권과 함께 스탁톤 한인감리교회 전도사로 다시 파송되었다. 이날 오후 1시 30분에 초등부 교실에서 있었던 한인부 회의에서 주일학교 공과는 만국 주일학교 통일 공과를 쓰기로 결의하고 국어학교 교과서는 조선어 독본을 쓰기로 가결했다. 그리고 미국 남감리회 부흥목사 콜 박사가 12월 중순에 상항과 리들리에 이어 스탁톤에서도 부흥회를 인도하기로 결의하였다.

1930년 4월 18일 오전 10시 상항 한인감리교회에서 미국 남감리교 지방교회 연환대회에서 임성택은 품행을 통과하고 김필권과 함께 전도사로 파송을 받았다. 김 탁 목사의 보고에 따르면 1930년의 등록 교인 수는 80명이었고 출석은 30명이었으며 지난 한 해 동안 성인 세례교인이 1명, 유아 세례 교인이 3명이었고, 헌금 총액은 600달러였다. 그런데 이 해에 임성택이 상항을 거쳐 남가주 나성으로 이주한다. 임성택은 1930년까지 5년간 스탁톤 한인감리교회를 섬겼다. 

 

나성 한인감리교회 전도사

 

1924년 10월 나성한인장로교회에 출석하던 교인 일부가 독립해 나와 버드롱 길에 있는 건물을 빌려 자유교회를 세운다. 6년 후인 1930년에 이 자유교회의 한승권 목사, 김관우, 김성권, 황성택, 박재형, 이영수, 임정수 등이 미국 남감리교 선교부와 접촉하여 그해 7월 10일 나성한인감리교회를 설립하였다. 이듬해인 1931년 1월 4일 오후 12시 50분에 나성한인감리교회에서 나성 지방감리사인 데이비스 목사가 김성권의 기도로 계삭회를 열었다. 이날 임성택은 강영승과 김 강과 함께 지방 전도사로 파송된다. 

이날 목사에 황사용, 평신도 대표에 최능익, 주일학교 교장에 김해반, 유사(재정부원)에 황성택, 임정수, 곽림대, 박재형, 윤으로사 그리고 박경신을 임명했다. 그해 4월에 일본 동경 한인기독교 청년회 구제부의 주선으로 이곳에서 공부하는 한인 유학생과 거주하는 한인들과 청년회를 위하여 헌 옷과 기부금을 모았을 때 나성한인감리교회도 동참했다. 특별히 주일학교 어린이들이 아이스크림 값을 저축하여 헌금한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1931년 7월 4일에 나성에서 데이비스 감독이 미국 남감리교 북미 한인 남감리교회 지방회를 열었다. 이날 지방 전도사의 품격에 따라 강영승과 함께 임성택을 다시 파송했다. 이후에는 교회 장정에 의하여 지방 전도사는 품격뿐만 아니라 과목 시험도 치르기로 하였다. 이날 나성한인감리교회의 예배당 건축을 결의하고 우선 3년 안에 1만 달러를 예산하고 본 선교부에 청원서를 제출토록 의결했다. 그런데 교우들이 먼저 헌금하여 한인들의 성의를 표시하도록 하였다. 임성택이 황사용 목사, 박경신, 이성례와 함께 청원위원으로 선임되었다. 

이튿날인 7월 5일 주일에는 남녀 교우 150명이 모인 가운데 위의 지방회에 참석했던 황사선 목사와 임정구 목사와 감독 무어 목사와 데이비스 목사가 참석한 가운데 성대하게 예배를 드렸다. 이날 무어 감독이 한인 교인으로 하여금 부흥의 정신을 가지도록 의미 있는 설교를 하였다.

1932년 9월 2일에 상항에서 미국 남감리교 연환 대회가 열렸다. 이날 임성택은 지방 전도사로 다시 파송되었다. 경건회에서 감독인 데이비스 목사는 그리스도가 교역자의 심령에 있음을 역설하면서 교역자의 정신을 새롭게 하였다. 그달 4일 주일에는 감독 무어 목사의 병환으로 총회의 클락 박사가 대신 설교를 하였다. 이 세상 사람은 육체의 욕심과 명예와 권세 등 셋을 도둑질하려고 단축길을 지원하지만, 예수는 그러한 시험을 이기고 정의와 박애주의와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 만천하 천만인의 구세주가 되었으므로 그는 한인사회도 예수의 길을 걸어가길 주장했다. 

그해 10월 10일에 개학한 나성 삼일 한국학교의 위원으로 임성택이 선출되었다. 위원장에 안석중이, 다른 위원으로는 한영대, 김용성, 손승조, 이영기, 정지영, 안상학, 송헌영이 있었다. 교장에 황사용 목사였고, 교사에 송헌영이었다.  

임성택은 1968년 12월 14일에 남가주 나성에서 향년 96세로 하나님의 부름에 응했다. 부인 임성실이 소천한 지 21년 후가 된다. 슬하에 제시, 존, 폴, 데이빗 그리고 피터 등 4남 1녀가 있었다. 

 damien.sohn@gmail.com

 

03.30.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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