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는 눈물과 연관이 깊습니다. 성경을 읽거나 묵상 및 기도를 하던 중, 눈물을 흘렸다는 기사를 보면 마음이 뭉클합니다. 그것은 자신의 연약함, 또는 죄를 성찰하는 자리에서 나타나는 정서적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고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자에게 나타나는 현상 가운데 하나는 눈물을 흘리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주의 진리의 빛이 비취게 될 때, 더러운 죄 성이 드러나게 되고, 그 죄 성이 드러나게 될 때, 참회의 눈물이 흐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12세기의 위대한 신학자이자 철학자인 안셈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27살이었습니다. 그는 높은 몽불랑의 산자락이 답답할 정도로 막아선 깊은 골짜기 마을인 이탈리아의 아오스타 (Aosta) 출신입니다. 그 깊은 골짜기, 사람들의 왕래가 드물기만 한 그 구석진 자리까지 주님께서 한 청년에게 찾아오셨습니다. 그는 주님의 부르심을 받게 되자 수도사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아들을 상속시키려는 귀족 가문인 아버지의 반대에 부딪쳤습니다. 그 후 어느 날 친구와 함께 알프스의 몽블랑 고개를 넘어 프랑스로 갔습니다. 그리고 노르망디에 있는 베네딕트 수도회의 백 수도원에 들어갔고, 당시 훌륭한 선생의 제자로 공부하던 중 원장이 세상을 떠나자 겨우 3년 만에 수도원 원장이 되었습니다. 그는 지나칠 정도로 금식을 수행하여 몸은 수척하였지만, 항상 기도에 힘을 썼습니다. 때때로 밤늦게까지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곤 하였는데, 이는 성령의 감동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고백했습니다. 나는 하나님과 화목해야 할 죄인으로 죽음에서 부활되어야 할 영적 죽은 자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더 나아가서 나의 더러운 양심으로 인한 괴로움 때문에 고통스럽다고 했습니다. 또한 구세주의 옆구리에서 피가 쏟아져 나오는 것을 보고 왜 두려움을 느끼지 않느냐고 질문합니다. 그는 죄의 비참함과 그로 인한 두려운 심판대 앞에 서게 된다는 사실을 직시하게 될 때, 하나님과 깊은 영적 관계로 들어갈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역사적으로 위대한 영성가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볼 때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사건 앞에 멈춰서서 자신을 질타하고 내재 된 죄성을 용납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내면에 깊이 침잠된 죄 성을 보고 슬퍼하고 탄식합니다. 보통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길 정도로 진리를 가볍게 여긴 부분들을 성찰하고 아파합니다. 성프란시스 같은 분도 생전의 눈가에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다고 합니다. 보통 사람은 성령의 은혜를 받을 때, 또는 그 은혜가 뜨겁게 역사하는 동안 눈물을 흘립니다. 그러나 어떤 분들은 그 기간이 평생토록 이어집니다.
우리 주님도 공생애를 사시면서 눈물을 흘리셨고, 패역한 세상에 슬퍼하셨고, 장차 복음을 수용하지 않는 자들이 영원토록 고통을 당하게 될 것을 내다보시면서 괴로워하셨습니다. 사랑하는 동족 이스라엘, 그들이 보물처럼 여기는 예루살렘 성이 장차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겨지지 않게 될 날이 온다는 사실을 내다보며 슬퍼하셨습니다. 성도의 눈물은 이처럼 자신을 정화하고, 죄의 유혹을 막아주는 힘이 됩니다.
안셈은 교황의 명에 의해 영국의 캔터베리 교회의 대주교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원하지 않았으나 순명해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허락하였습니다. 영성의 높은 단계에 오른 분들의 공통점은 세상의 직분이나 직책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캔터베리 교회는 바티칸이 591년에 파송한 아우구스티누스가 세운 교회입니다. 그는 켄트에 상륙하여 현지인들을 개종시켰고 결국은 왕에게도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지금은 영국 성공회의 총본산이 되었고, 웨스트민스터 성당에서 거행하는 대관식에서 왕의 머리에 기름을 붓는 예식을 집행하는 분이 바로 캔터베리 교회의 대주교입니다.
그러나 그의 삶은 고달프기만 했습니다. 윌리엄 왕은 형과의 전쟁에 필요한 거액의 돈을 요구하자 이를 성직 매매 행위로 여겨 거절하였습니다. 60세의 늙은이로 진리를 지키려는 이유로 몇 차례나 추방을 당해야 했습니다. 그는 오로지 주님을 사랑하고, 그와 연합하는 것 외에는 관심을 두지 않으려 했습니다. 더 나아가서 기도하기를, 보라, 너의 하나님이라는 음성이 들릴 때까지 나의 눈물을 들이마시게 하고 슬픔에서 나를 위로하소서, 그때 주께서 내게 오실 것입니다.
그는 동방정교회와 교황청이 신학적 문제로 다투게 되었을 때, 앞장서서 양보하지 않고 신학의 바른 자리를 지켜냈습니다. 즉, 동방정교회에서는 성자는 성부에서 나온다는 인정하였지만, 교황청이 주장하는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온다(요 20:22)는 사실을 수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안셈은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고 끝까지 관철시켰습니다. 당대 최고의 신학자이자 철학자이었던 그는 이런 영적 몸부림을 통해 진리를 파수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주를 향해 어떤 눈물을 흘려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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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2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