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에 들어가서 독립할 때까지 나는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목사 집에서 자랐지만 가족의 신앙과 나의 신앙을 구분할 수 없었고, 결국 기독교에서 멀어졌다. (어릴 때 내가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른 건, 기독교가 진리여서가 아니라 순전히 부모님 때문이었다.)
하지만 대학에 들어가서 캠퍼스 목사와 정기적으로 만나면서 내게는 급진적인 은혜의 역사가 일어났고, 비로소 부모님의 신앙이 아니라 진짜 내가 믿고 나의 신앙을 제대로 가지게 되었다. 지금은 목사가 되었지만, 사람들은 내 아버지가 팀 켈러라는 사실을 알면 잠깐 멍한 표정을 짓는다. 그들은 하나같이 이렇게 말한다. "와! 팀 켈러가 아버지였더라면, 나는 진짜 예전부터 신앙을 가졌을 텐데." 또는 “당신 아버지한테 배웠다면, 나도 내 자식을 믿게 만들 수 있을 텐데." 하지만 대학 때까지 내가 믿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하면, 그들은 놀란다. 내 아버지가 누구인가? "완벽한" 복음 설교로 유명한 팀 켈러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어렸을 때부터 정기적으로 팀 켈러의 설교를 들은 자식이라면 당연히 항상 그리스도인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들은 틀렸다
이런 전제에는 두 가지 측면에서 문제가 있다. 첫째, 신학적으로 보자. 성령은 잘 구성되고 잘 표현된 복음 설교를 통해서만 역사하지 않는다. 누군가 성령이 반응한다고 생각할 때,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믿는 게 있다. 구원이 은혜가 아니라 뛰어난 복음 설교자를 통해서 전해진다고 말이다. 둘째, 이 관점은 개개인의 경험과 문화적 맥락이 어떻게 신앙의 핵심 요소를 이해하기 어렵게 만드는지를 설명하지 못한다. 예를 들어, 아버지와의 관계가 끔찍한 한 아들과 대화를 나눈다고 상상해 보라. 그리고 그 사람은 부자가 되어 행복해지는 게 삶의 목적이라는 생각이 팽배한 문화권에서 산다고 가정하자. 복음 설교가 아무리 완벽해도 상관없다. 그 사람은 하나님이 사랑하는 아버지이시며, 삶의 요점은 물건이 아니라는 생각을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다. 개개인의 경험과 맥락은 복음 듣는 방식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나는 사랑이 많은 아버지를 만났지만, 내 삶의 다른 요소들이 나로 하여금 어렸을 때 복음을 제대로 듣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그 결과가 무엇인가? 정작 내가 살아 있는 복음을 만난 건 신학교를 갓 졸업한 젊은 목사를 통해서였다. 성령의 역사와 관계없이(요 3장), 답은 맥락에 달려있다는 사실이다. 나는 생판 모르는 사람이 전하는 복음에는 귀를 기울였지만, 내 아버지에게는 그럴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 젊은 목사는 전에 들어보지 못했던 방식으로 나로 하여금 복음을 공감하고 이해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를 가장 잘 설명하는 멋진 단어가 “상황화”이다. 나는 이 단어를 하나님의 진리를 타협하지 않으면서도 사람들이 가장 이해하기 쉽고 설득력 있는 방식으로 전달하는 과정이라고 정의한다. 이는 복음의 진리를 분명하게 전달할 뿐만 아니라 현실적으로 전달하고, 연결하고, 제시하고, 소통하는 일종의 번역 과정이다. 복음은 사람들에게 그들이 원하는 것을 주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묻는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을,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형태로 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대답은 사람들이 원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나는 오늘날 복음의 상황화라는 모델을 제안하려고 한다. 하지만 사람들의 삶, 배경, 이야기, 그리고 서사에 복음의 소망을 가지고 접근하려면, 먼저 오늘날 문화가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인식하는 게 중요하다.
해답으로서 문화의 작동 방식
문화는 단순한 사회 관습과 전통이 아니다. 모든 문화는 언제나 구성원이 가진 삶의 가장 큰 질문에 대한 하나의 대답이다. 나는 왜 여기 있는가? 이 세상은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그리고 어떻게 해야 세상을 바로잡을 수 있는가? 대부분 사람들은 이런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답을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답은 우리가 살고 숨 쉬는 이야기를 통해서 알게 모르게 모두에게 전달되고 있다.
이 세상의 잘못된 점이 있다면, 그건 사람들이 우리를 통제하려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상황을 바로잡는 길은 자유롭게 살고, 내 마음의 욕망을 따르고,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문화에 따라서 잘못과 해결책에 대한 근본적으로 다른 답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럼 기독교는 어떤가?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문화에 관계없이 누구나 어느 정도는 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반영한다는 게 기독교의 주장이다. 물론 그 지식이 억압되고 있기는 하지만도(롬 1:18). 동시에 기독교는 모든 문화가 어느 정도는 죄와 깨어짐으로 인해 왜곡되었다고 말한다. 그건 세상이 유한한 무언가를 악마화하여 문제로 바라볼 뿐 아니라 또한 유한한 것을 해결책으로 격상시키기 때문이다.
만약에 모든 문화가 다 선하지만 타락했다면, 우리는 단순히 더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문화를 더 "성경적"이라고 평가하고, 자유주의적이고 세속적인 문화를 더 부도덕하고 사악하다고 평가할 수 없다. 보수적인 문화는 종종 가족, 집단 또는 과거를 절대적 가치로 높인다. 그 결과 도덕주의와 외국인 혐오 우상 숭배로 이어진다. 반면에 자유주의 문화는 개인과 발전을 절대적 가치로 높인다. 그 결과 개인주의라는 우상으로 귀결된다. 그러나 가족의 공동체적 가치와 개인의 가치는 모두 성경에서 나온다. 즉, 두 문화 모두 어둠과 빛의 혼합물이다.
모든 문화가 다 선하지만 타락했고 그래서 거기에 중립이란 있을 수 없다면, 타협하지 않고 가장 이해하기 쉽게 하나님의 진리를 말하는 방식은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무슬림이 묻는 질문은 세속적 인본주의자의 질문과 다르며, 이는 기독교 가정에서 자란 사람의 질문과도 다르다. 우리는 이해가 가능하고 설득력이 있도록 접근 방식을 맞춤화해야만 한다. 가족이나 집단을 고양하는 보수 문화권에서 강조해야 하는 점은 그들이 가진 집과 가족에 대한 갈망이다. 그리고 불관용으로 이어지는 도덕적 전제에 도전해야 한다. 개인적 자율성과 자기 발견을 우상화함으로 전통적 기관에 대해 깊은 회의주의를 가진 자유주의 문화권에서 우리가 강조해야 할 점은 진정성과 자유에 대한 그들의 갈망이다. 그리고 필연적으로 외로움으로 이어질 개인주의의 전제에 도전해야 한다.
누구나 상황화한다
하지만 복음의 상황화가 행여나 타협의 코드에 불과한 건 아닐까? 우리는 복음을 보다 더 명확하게 표현해야 하지 않을까? 이런 질문이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점이 있다. 누구나 자라난 문화적 환경이 다르기에 한 문화에서는 "분명한" 것이 다른 문화에서는 모호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다양한 문화권을 거치는 선교사들은 이 사실을 항상 확인한다. 특정 지역에서 잘 통하던 방식이 다른 곳에서는 전혀 통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상황을 아예 초월해서 드러나는 보편적인 기독교 진리의 형태나 표현이라는 건 불가능하다. 모든 교회가 다 어느 정도는(복음으로 처리하지 않고) 무비판적으로 문화적 요소를 기독교에 유입시켰다.
개인주의 문화는 기독교의 공동체적 측면을 놓친다. 권위주의 문화는 양심의 자유와 은혜의 측면을 놓친다. 그리고 누구나 다 자신의 문화권에 유입된 기독교가 문화적 표현에서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를 지적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기독교의 모든 표현과 구현은 이미 상황화된 상태이다. "나는 상황화하고 싶지 않습니다"라고 말할지 몰라도, 당신은 이미 무의식적으로 상황화된 특정 기독교 관점을 강요하고 있다. 이 세상에 보편적이고 비역사적인 표현이란 있을 수 없다. 예수님이 일반화된 존재로 이 땅에 오신 게 아니다. 그는 인간이 되었다. 그리고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서 특정한 인간으로 살았다. 그는 남자였고 유대인이었으며 노동 계층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도 제대로 사역하려면, 예수님처럼 "성육신" 해야 한다.
더욱이, 기독교 관행은 반드시 성경적 형태 또는 모양 그리고 문화적 형태 또는 모양을 가져야만 한다. 예를 들어, 성경은 음악을 사용하여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명령한다. 문제는 특정 음악을 사용하는 순간 우리는 이미 특정 문화 속에 들어간다는 사실이다. 지금은 "고전"으로 여겨지는 아이작 왓츠의 찬송가도 그의 시대에는 "현대적"으로 분류되었을 것이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 특정 언어를 선택하거나 특정 수준의 감정 표현, 심지어 설교 예화를 선택하는 순간에 우리는 이미 누군가에게는 더 친밀한 사회적 맥락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반대가 될 것이다. 나는 영어로 설교한다. 내 설교는 이미 누군가에게는 잘 들리는 복음이지만 또 누군가에게는 전혀 들리지 않는 복음으로 상황화된 것이다. 마찬가지로 내가 예화로 심슨 가족과 패밀리 가이를 인용할 때, 누군가에게는 적절하겠지만 누군가에게는 암호같이 들릴 것이다.
오순절에 모든 사람이 자신의 언어와 방언으로 베드로의 설교를 들었다. 하지만 오순절 이후로 우리는 결코 동시에 "모든 사람에게 모든 것"이 될 수 없다. 이 진리를 받아들이는 게 상대주의가 아니다. 돈 카슨이 말했듯이, "인간이 표현할 수 있는 어떤 진리도 문화를 초월하는 방식으로는 가능하지 않다. 하지만 그렇게 표현된 진리라고 해서 반드시 문화를 초월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는 사실을 정직하게 인정하는 것이다.
상황화는 시대를 초월한 참된 복음을 다양한 언어, 문화, 이야기, 상상으로 번역하는 것이다. 알고 있든 아니든, 당신은 이미 그렇게 하고 있다. 메시지의 과도한 적응뿐 아니라 부족한 적응이 가져올 위험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과도한 적응의 위험은 특정 문화에 대한 이야기에 너무 함몰되어 복음의 도전적인 측면을 희석시킨다는 것이다. 부족한 적응은 전달하는 모든 이야기 아래에 내재된 질문과 제대로 연결되지 못할 때 발생한다.
오늘날 상황화의 방식
복음을 전하는 데에 "문화를 피할" 방법이 없다면, 올바른 상황화는 어떤 것일까? 우리는 먼저 우리 문화의 기본 스토리라인과 문화적 서사를 긍정하고, 도전하고, 달리 이야기(retelling)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럴 때 가장 신실하고, 이해하기 쉽고, 설득력 있게 이 과제를 수행할 수 있다.
우리의 목표는 친구, 이웃, 도시와 지역을 잘 알고 주변의 문화적 이야기를 아는 것이다. 복음을 독특하게 만드는 것은 당신의 스토리라인, 즉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이 다른 모든 문화의 스토리라인까지도 다 포괄하고 완성한다는 데에 있다. 다른 문화권에서는 인간이 창조한 무언가를 문제와 해결책으로 규정하는 반면에 기독교는 모든 문제의 근원을 죄에서 찾고 궁극적인 해결책으로 예수님을 제시한다.
성공함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야 한다는 우리 문화의 서사를 한번 생각해 보자. 여기서 주장하는 건 행복이 인생에서 성공하고 번영하고 인기를 얻는 경우에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 결과 근면과 성취라는 좋은 가치를 우상화하고 게으름을 악마화한다. 이 이야기의 문제점은 성공해도 생각만큼 만족스럽지 않다는 것이다.
기독교 이야기의 아름다움
창조, 타락, 구원에 대한 기독교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사물을 이해할 수 있는 자원뿐 아니라 모든 문화적 서사에 내재된 진리를 감상하게 하는 능력까지 제공한다. 먼저 창조를 살펴보자. 기독교는 모든 것이 좋다고 말한다. 하나님이 세상을 만들었고 세상은 좋았다. 태초에 악한 것은 없었다. 모든 것이 한때 선했다면, 우리는 모두에서 선함의 잔재를 찾으므로 항상 경이로움과 호기심을 가질 수 있다. 그게 지금 어떤 형태로 나타나든 기원은 선했다는 게 중요하다. 포르노는 섹스의 선함이 잘못된 형태로 나온 것이다. 살인은 대리자와 권위의 선함이 잘못된 형태로 드러난 것이다.
상황화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 외에 무언가를 중심으로 삼는 것이 초래하는 파괴성을 보여주어야 한다. 모든 것은 오로지 예수님 안에서만 발견되어야 참되고 더 나은 이야기가 쓰일 수 있음을 지적해야 한다.
by Michael Keller, TGC
03.29.2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