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o

먼 나라는 어디일까?

예수님의 유명한 탕자의 비유에서 둘째 아들이 재산을 다 모아서 가지고 가서 허랑방탕한 ‘먼 나라’는 과연 어디일까? 지리적인 의미의 먼 나라일까? 그러면 지구의 끝, 아니면 바다의 끝에 있는 어떤 섬일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어떤 장소를 말하는 다른 공간이 아니리라는 생각이 든다. 누구든지 하나님 없이 살려고 하는 곳이면 그곳은 어디나 ‘먼 나라’가 아닐까? 그 ‘먼 나라’는 하나님 아버지의 통치 영역에서 한 발짝 벗어난 곳이며, 아버지의 뜻에서 빗나간 행동을 하는 곳이 바로 ‘먼 나라’가 될 것이다. 

이 ‘먼 나라’는 나의 아주 가까운 곳에 있을 수 있다. 예배 시간마다 교회에 빠지지 않고 출석하고 교회의 모든 행사에 참여하고도 그 자신은 ‘먼 나라’에 살고 있을 수 있다. 교회당에서 목사의 설교를 듣고 있는 시간에도 그 자신의 마음은 이미 세상의 ‘먼 나라’에 가 있을 수 있다. 하나님 앞에 기도드리는 시간에도 그 자신의 어떤 공상에 사로잡혀 있으면 그의 영혼은 ‘먼 나라’에 가 있을 수 있다. 찬송을 부르는 시간에도 뜻 없이 의미 없이 형식적으로 노래를 부르면 그 사람의 마음은 ‘먼 나라’에 가 있을 수 있다. 가난한 이웃이 옆에 있음에도 외면하고, 고통당하는 사람을 모른 척하고 있을 때 ‘먼 나라’에 가 있을 수 있다.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눅 15:13)

‘먼 나라’는 내가 하나님 아버지의 선한 뜻에 어긋나는 짓을 하겠다고 잘못된 자유를 요구할 때 시작된다. ‘먼 나라’는 자신의 인생만을 행복해지려고 기회를 엿볼 때 시작된다. ‘먼 나라’는 육신의 안일과 육체의 정욕을 마음속에 품을 때 시작된다. ‘먼 나라’는 이생의 자랑과 허영심으로 마음이 기울어질 때 시작된다. ‘먼 나라’는 끊임없는 분노, 과격한 혈기, 터무니없는 미움, 끝없는 원망, 어처구니없는 불평이 생길 때 시작된다. 

 

자주 자신의 현 위치를 살펴보아야 한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내가 처한 삶의 현주소는 어디인가? 혹여 나는 탕자처럼 ‘먼 나라’에 가 있지 아니한가? 

 

사마리아 수가성의 음란한 여자가 야곱의 우물가에서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먼 나라’에서 방황하고 있었다. 세관에서 세금을 받던 마태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기 전에는 ‘먼 나라’에서 돈만 세고 있었다. 사울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죽이겠다고 살기가 등등하여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먼 나라’에서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지금 ‘먼 나라’에서 방황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거든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가자.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로 가자”라고 말한 탕자의 외침이 나의 외침이 되게 하자. 그리고 아버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행동을 머뭇거리지 말자. 지금 바로 일어서자. 그리고 사랑하시고 용서하시는 아버지 하나님께로 가자.

 

03.22.2025

Leave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