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년 전의 종교개혁운동은 미완성이었다. 왜냐하면 로마가톨릭교회는 여전히 건재하게 남아있고 당시에도 개혁자들의 주장에 동조하지 않고 반대하는 자들이 상당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때의 개혁의 기치를 높인 교회개혁운동은 부분적으로 성공을 거뒀다. 활발한 개신교 국가들과 성도들이 탄생됐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운동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이는 개혁가들이 남긴 구호가 증명한다: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돼야 한다’(Ecclesia Reformata semper est reformanda)! 교황권과 교회 전통의 권위가 절대 우위를 차지하고 있던 때에 기록된 성경의 최고 권위를 주창하고 그 말씀 선포에 심혈을 기울임으로써 어둠속에 눈부신 말씀의 빛을 쏟아냈다. 그 결과 부패와 타락으로 점철된 비성경적인 중세 교회개혁의 불길은 급속히 타올랐다. 유럽 많은 국가들이 개신교로 탈바꿈한 것이다. 당시 로마교회가 개혁사상을 다 수용했더라면 역사는 어떻게 진행됐을까? 역사상 참혹한 종교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며 아마도 세계 복음화에 더 많은 영향을 끼쳤을지도 모른다. 반면에 해를 거듭하면서 신학적 차이나 혹은 정치 권력적 야욕에 의한 분열의 분열을 낳아 사회와 국가에 미치는 종교적 영향력은 현대 사회에서 접하고 있는 것과 별반 다를 것이 없는 길을 갔을 것이다.
어째든 하나님의 섭리 하에서 개신교는 계속해서 개혁의 불길을 끄지 말아야 한다는 사명을 발견하게 됐다. 그러나 교회역시 종교다원주의 사상을 수용하며 동시에 교권정치와 세속주의에 휘둘려서 존경과 두려움의 대상에서 밀려나버린 지 오래 됐다. 이러한 상황에서 개혁교회를 지향하고 있는 목회자들은 개혁된 교회일지라도 여전히 개혁해가야 하는 절대적 명제 앞에서 지난 과거를 돌아보고 미래의 우리의 모습을 그려보는 작업은 매우 필요하다.
종교개혁은 1517년 10월 31일 마르틴 루터가 로마카톨릭교회의 부패상을 적은 95개조 반박문을 비텐베르그 대학교회 정문에 붙임으로 시작됐다. 이 장면을 그림으로 그린 것.
루터에 의해서 점화된 종교개혁운동은 제네바에서의 칼빈의 말씀 사역을 필두로 존 낙스의 성경에 충실한 개혁의 외침이 가세하면서 수많은 영혼들을 진리에 눈 뜨게 했고 교회를 진리의 기둥과 터로 온전히 세워 가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감당했다. 성경이 독일어로 번역된 것만이 아니라 낙스에 의해서 주도된 1558년 제네바 영어성경의 출판은 영국의 교회 개혁운동에 기름을 붓게 됐다. 진리의 능력을 굳게 붙든 많은 설교자들이 전역을 휘젓고 다니면서 진리에 목말라하는 영혼들을 구원했다. 환난과 핍박을 두려워하지 않고 진리 안에서 고난당하는 것을 마땅한 것으로 간주하며 천성을 향한 영혼들의 행진이 줄을 이었다.
교회개혁운동은 항상 말씀회복운동으로 특징 지워진다. 수많은 말씀 선포자들이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18세기 대각성운동 역시 교회개혁운동이요 말씀회복운동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강단이 성경으로 온통 뒤덮이지 아니하고서는 교회개혁은 뜬구름 잡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개혁의 기준은 어느 특정인의 사상이나 생각이 아니라 정확 무오한 성경뿐이기 때문이다. 말씀을 자주 들어야만 바위도 뚫리게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존 낙스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줄 모르는 자들을 강단에 세우는 것은 강단에 우상을 세우는 것과 같다고까지 말했다. 살아있는 하나님의 진리전파에 충실한 설교자들과 하나님을 말씀을 듣고자 사모하는 심령들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
한편 예전과 예식이 신앙생활의 주를 이뤘던 중세교회에서 종교개혁은 예배의 개혁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깊이 경험하는 것이 됐다. 신부들도 예전이나 알고 성경에는 전적으로 무지했다. 상당수의 신부들이 마치 복음서가 루터에 의해서 쓰여진 책으로 알고 있을 정도로 성경을 읽거나 연구하는 일은 없었다. 그러므로 자연스럽게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예전 지키기에 사력을 다할 수밖에 없었다.
16세기 스코틀랜드에서 로마교 신앙을 위한 변증자 니니안 윈게이트조차도 자신의 교구 성직자를 호되게 규탄했다.
낙스 자신에 의해서 가해진 것 이상으로 강력하게 질타한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부패한 삶을 비난한 것만이 아니라 예전행위들만 드높이는 무언의 교리들도 날카롭게 지적했다...그리고 모든 사람들의 구원에 필요한 하나님의 참된 말씀에 침묵하고 있는 것을 비난했다.’ 무지와 무관심과 의식행위만이 존재하던 중세시대의 교회였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은 예배의 단순화를 기하면서 신부들의 전횡을 막고 만인제사장직을 가르쳤다. 예전은 중요하지만 그것이 구원의 조건이 아니며 예배의식은 인간이 고안해낸 무엇으로 할 것이 아니라 오직 성경에서 명하고 있는 것대로 해야 할 것으로 가르쳤다. 그것이 수동적인 의전 행사를 능동적인 예배 참여로 이어지게 하면서 신앙생활의 맛을 새롭게 경험하는 변혁을 가져온 것이다.
예배는 거듭난 백성들만이 가지는 특별한 특권이요 영광이다. 예배는 회심의 역사를 일으키지만 전도의 수단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다. 예배는 제사가 아니다. 구원받기 위한 조건이 아니라 구원받았음에 대한 영적 생명의 본능이다. 구원해주신 하나님을 경배하는 일은 의무가 아니라 삶 자체다.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존돼있다는 신앙고백이요 충성맹세다.
이러한 예배가 지금은 종교의식으로 전락됐다. 하늘의 복을 받아내기 위한 흥정의 대상이 됐다. 예배자들의 입맛에 맞는 예배 골라가기가 만연돼버렸다. 인본주의 예배에서는 당연한 결과다. 예배시간은 적어도 하나님의 백성들이 정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 나아가는 방식은 하나님이 규정하신 법도에 따라야 하는 것이다.
성경에 명시돼있지도 않은 족보 불분명한 것들은 예배의 대상자이신 하나님의 의중은 안중에도 없다. 교회마다 섬기는 대상인 하나님이 다양한 변신을 시도하는 것처럼 만들고 있다. 그리하여 교회에서 만나는 하나님이 성경에서 계시되신 하나님과 같지 아니한 경우들이 속출하고 있다. 철저하게 예배의 규정직 원리에 따른 참된 예배여야 한다.
올바른 찬송이 드려져야 한다. 특히 하나님께서 부르라고 주신 시편을 노래하는 것을 속히 도입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찬송을 부르도록 지음 받은 자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성경적이지 않은 가사들과 사람들 들으라고 쓰여진 내용들로 가득한 노래들을 하나님께 예배하는 공예배 찬송으로 부르는 일은 반드시 피해야 한다.
결론으로, 종교 개혁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우리의 믿는 바가 무엇인지를 신경 써야 한다. 그래서 우리가 믿고 있는 것 가운데서 성경의 가르침에 비추어 틀린 것들, 우리의 예배 가운데서 성경에 비추어 잘못된 것들, 우리의 교회제도 가운데서 성경에 비춰 틀린 것들을 고치는 일을 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종교개혁주일을 제대로 지키는 방식이 된다.
<편집부>
10/26/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