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으로,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루살렘의 신앙에 관해 잘 알고 있으며 (일부는 왜곡된 정보이지만), 그 신앙에 노골적인 반감을 갖고 있다.
성경은 예수님과 우물가 여인의 대화를 묘사하며 “유대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과 상종하지 않기 때문”(요4:9)이라고 설명한다. 유대인과 사마리아 사람들은 마치 의절한 형제처럼 원한에 사무친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이 둘은 부분적으로 세계관을 공유하고(서로 다른 판본이지만 둘 다 모세오경을 믿었다), 같은 조상에서 갈라져 나왔으며(우물가 사마리아 여인은 “우리 조상 야곱”이라고 말한다), 심지어 같은 주제를 두고 각자 잘 정립된 주장으로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예루살렘과 그리심산 중 어느 곳에서 예배를 드려야 하나?). 이처럼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은 서로를 잘 알았기에 더욱 상종하기 어려웠다. 복음서 저자인 누가는 예수님과 제자들을 환대하지 않은 사마리아 마을에 관해 구체적으로 언급한다. 왜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들을 거부했을까? 예수님과 제자들은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유월절 순례자들이었고, 사마리아 사람들은 유대 전통을 지키는 유대인들이 달갑지 않았다. 야고보와 요한은 이러한 푸대접을 종교적 모욕이라고 여기고, 할 수 있다면 사마리아 마을을 통째로 날려 버리고 싶을 만큼 화를 내며 펄펄 뛰었다(눅9:51-56). 상대를 너무 잘 안다는 것이 오히려 서로를 향한 의심과 원한을 더 심각하게 만든 형국이다.
팀 스태포드는 바로 우리가 사마리아에 살고 있다고 말한다. 한마디로, 기독교를 의심하고 부정하는 오늘의 문화가 사마리아로 비유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사마리아에 살면서 승리하는 지혜를 말해준다(This Samaritan Life: How to live in a culture that is vaguely suspicious of the church).
나는 이와 유사한 경우를 미국에서 종종 발견한다. 우리의 믿음이 낯설어서가 아니라, 너무 낯익은 것이기 때문에 일어나는 문제들인 것이다. 사마리아인과 유대인처럼, 미국의 크리스천과 비크리스천은 세계관을 공유하고(성경을 포함한 서구 전통), 같은 조상에서 나왔으며(메이플라워호에서 시작된 기독교 국가), 같은 주제를 두고 각자 잘 정립된 주장으로 논쟁을 벌일 수도 있다(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한 구원). 우리는 서로가 무엇을 믿고 따르는지를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서로를 더욱 의심하고 적개심을 더욱 키워 나갈 수도 있다.
통상적으로 타인을 존중하는 미국사회 특성상, 적대감은 쉽게 표현되는 감정은 아니다. 그럼에도 그러한 적대감이 공공연히 드러나는 경우가 종종 있어 나를 화들짝 놀라게 한다. 내가 사는 곳 근처에 교회건축이 계획되면서 토지용도 변경 공청회가 열린 적이 있다. 나는 이웃 주민들이 그 조그만 교회를 반쯤은 따뜻한 환대로, 반쯤은 무관심으로 받아들이리라 예상했다. 그러나 공청회를 통해 드러난 것은 잘 단합된 적개심이었다. 주민들은 교회건축을 반대하는 청원서를 만들어 돌리고, 함께 뭉쳐 토지계획위원회와 시의회에 몰려갔다. 교회건축에 반대 의견을 표명하는 회의는 모두들 앞다퉈 할 말이 많았던지라 몇 시간째 계속됐다. 많은 주민들이 교통(주일 아침에?)과 안전이나 소음 문제를 내세웠지만 그 밑바닥에 깔린 이유는 하나였다. 우리는 교회가 싫고, 우리 동네에 교회가 들어서는 것이 너무 싫다는 것이다. 토지계획위원회 회의에서 한 남자는 “우리 집에서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교회가 들어서는 것을 미리 알았다면 이 동네로 이사 오지 않았을 겁니다”라고 당당하게 밝혔다. 이것이 바로 사마리아에서 살아가는 삶이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이 우리를 향한 적개심을 자연스럽게 드러내기 시작했다.
사마리아 사람들의 적대감은 관용(tolerance)과 다양성이라는 명분을 내세우면서 이것들을 무기로 크리스천들을 공격하는 형식으로 자주 나타난다. 크리스천들은 보통 관용의 정신이 희박하다(특히 동성애자, 페미니스트, 무신론자, 진화론자, 타종교인, 낙태지지자들에게)는 말을 자주 듣는다. 크리스천들은 하나님께 가는 길은 오직 하나이며 절대 진리와 완전무결한 성경을 믿는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논리적으로 보자면 이러한 믿음에 동의하지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당신들은 틀렸다”고 말하는 것이라고 비판한다.
일부 세속주의자들은 크리스천들의 이러한 비관용을 관용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들은 다양성을 좋아하지만, 자신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다양성만을 지지한다. 그들의 시각에서 보면, 크리스천들이 다른 사람에게 자기 신앙에 대해 이야기하고, 엄격한 기독교적 도덕기준을 믿는다고 말하는 행위는 비관용을 사용해 다른 사람들을 공격하고 괴롭히는 것이다. 과거의 관용은 서로 다른 사람들이 평화롭게 지내는 것을 의미했지만, 지금은 그 이상의 뜻으로 넓어졌다. 모든 차이와 다름이 동등한 ‘가치’를 갖는다는 것이 현대가 정의하는 관용이며, 급진적인 도덕 상대주의가 만연한 사회가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이다. 그리고 크리스천들이 그러한 정의를 받아들이는 척이라도 하지 않는다면 곧바로 뿌리 깊은 적개심과 맞닥뜨리게 된다.
그러나 사마리아에서 살게 된 것을 환영해야한다. 이곳은 당신을 알지 못하지만 당신이 믿는 바에 관해서는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당신을 의심부터 하는 그런 곳이다. 당신이 예배를 드리는 공간이 동네에 들어서는 것조차 싫어하는 곳이며, 당신이 사회를 지배하려 든다고 미리부터 오해하는 곳이다. 이들이 말하는 관용사회란 당신 자신을, 그리고 당신의 생각을 꽉 붙들어 매고 억눌러야 하는 곳이다.
그러한 억눌림을 마주하게 되면 우리는 침묵을 지키거나 적당히 섞이거나 아니면 도전장을 던지는 것으로 반응한다. 그러나 이러한 세 가지 방법 모두 토론의 가능성을 닫아버리고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살아갈 기회를 제한한다.
티모시 켈러는 이 땅의 크리스천들에게 다른 방법을 찾을 수 있다고 격려한다. 2001년 9월 11일 이후, 맨해튼에 소재한 켈러의 리디머장로교회(Redeemer Presbyterian Church)는 수백 명의 비크리스천 구도자들을 받아들였다. “리더십”지와 가진 인터뷰에서 켈러는 이렇게 말했다.
“다원주의 문화에 속한 이들에게 설교하면서, 저는 기독교의 진리를 축소하지 않는 동시에 종교의 다원성을 믿으며 성장한 이들을 불필요하게 소외시키지도 않는 균형이 필요함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기독교야말로 가장 우월한 종교다’라는 식의 노골적인 주장을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다른 이들의 믿음을 비하하지도 않습니다. 대신 기독교만의 차별성을 강조합니다.”
켈러는 특정 표현방식이 사람들로 하여금 크리스천들의 권력과 우월성에 과민 반응케 하고 적대감을 부추긴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우리가 길과 진리, 그리고 생명에 관해 알지만, 그러한 이야기를 고개를 빳빳이 쳐든 채 잘난 척하는 말투로 이야기한다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모든 대화는 중단되고 적대감만 더욱 깊어질 뿐이다. (만일 예수님이 우물가의 사마리아 여인의 항의를 맞받아쳐, 그리심산은 하나님을 경배할 만한 곳이 아니라고 단도직입적으로 말씀하셨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대신, 켈러는 우리가 예수님의 겸손과 고난, 그리고 그분이 내려놓으셨던 힘을 강조하면서 그분의 독특함을 표현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우리 역시 겸손과 섬기는 자세를 취하며 가능한 충돌을 피할 수 있다. 예수님 당신이 직접 그러하셨고 우리에게 명하신 것처럼 다른 편 뺨을 돌릴 수 있어야 한다.
예컨대, 제자들은 그들을 모욕한 사마리아 마을 사람들과 싸우고 싶어 했지만 예수님은 오히려 제자들을 나무라셨다. 정당한 이유가 있었음에도 예수님은 사마리아 사람들과 싸우길 원치 않으셨다.
문득 나는 요즘 크리스천들이 대화가 거칠어진 텔레비전 토론을 잘 피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 아마도 우리는 예수님이 하셨던 것처럼 다른 마을로 가거나, 일대일 대화의 기회를 엿보아야 할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개인과 개인의 대화가 쉬운 것은 아니다. 우물가의 여인은 예수님께 유대인인 당신이 사마리아인에게 설교할 권리가 있냐고 따져 물었다. 사마리아인이야말로 야곱의 진정한 후손이라고 암시하면서 해묵은 예루살렘 대 그리심산 논란을 들먹이면서 말이다.
그녀의 어투가 도전적이었든 단순한 빈정거림이었든 그녀는 논쟁을 일으키는 방법을 확실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케케묵은 말싸움에서 한 발짝 비켜서, 호기심을 일으키는 독창적인 언어-“생수”(living water)-를 사용하셨다. 그분은 사마리아와 유대의 모든 차이와 논쟁이 새롭고 깊은 진리 속에 녹아들 것이라고 하셨다. 우리가 사마리아에 살고 있는 한, 우리 역시 그러한 대화의 기술이 필요하다. 그 기술이 우리의 급진적인 견해를 가리지 못하고, 진부한 논쟁을 피하게 하지 못하더라도 말이다.
결론으로, 사마리아에서 살면서 대화의 기술보다 더 필요한 것은 오랜 인내와 사랑이다. 분명한 것은 직접적인 반격으로는 어느 누구도 오랜 적대감을 바꿀 수 없다는 점이다. 우리는 그 적대감을 극복하고 새로이 관계를 시작할 수 있는 신선한 기회를 찾아야 한다. 우리는 적개심으로 무장한 다른 편에 서 있는 이들을 사랑해야 한다. 예수님이 그 모범을 보여 주셨다.
예수님은 사마리아를 항상 존중하셨고, 심지어 사마리아인을 이웃사랑의 예화로 들기도 하셨다. (우리가 미덕의 예화를 든다면, 주인공으로 누구를 등장시킬까?) 그리고 또한 당신의 부활을 알리고자 제자를 사마리아로 보내셨다(행1:8). 빌립은 이 명령에 충성했고 “그래서 그 성에는 큰 기쁨이 넘쳤다”(행8:8). 원한과 적대감은 결국 무너질 수 있음을 증명하는 순간이었다!
10/12/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