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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현장 같이 부르는 찬양의 힘이 있었다!

Luther2017 복음 담긴 루터 찬송들 교회음악 대중화 통해 종교개혁 가속시켰다고 해석
종교개혁현장 같이 부르는 찬양의 힘이 있었다!

[루터가 성경 번역에서 영감을 받아 시편 46편을 기초로 작사 작곡한 '내 주는 강한 성이요'는 대부분 단조 가락이 많던 시절에 강한 장조로 승리를 주시는 주님께 대한 믿음을 확신 속에 노래하고 있다. 이 찬송은 루터파 교회에서는 물론 전 세계적으로 모든 교단에서 애창된다. 그리고 독일 국민들은 국가(國歌)보다 더 애창하고 있다. 이 찬송은 1529년 비텐베르크에서 출판된 독일찬송가에 "시편 46편"이라는 제목으로 나온 것이 최초다. 1529년 로마공교회에 대한 이단자라는 심판을 받기 위해 "보름스 의회"에 올라갈 때, 많은 지인들이 올라가면 순교당할 것이라고 만류했지만 루터는 목숨을 걸고 올라갔다. 루터는 "웜스에 모여드는 악마의 수가 그곳의 기왓장만큼 많을지라도 나는 갈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보름스 의회에서 루터가 말하고 저술한 모든 것을 포기하지 않으면 공민권을 박탈해 보호를 받을 수 없을 것이라 위협했을 때, 루터는 성경과 자기 양심으로 주장한 것을 포기할 수 없다고 단호히 말하고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나님이여 나를 도우소서"(Here I stand. God help me!)라는 기도를 올렸다. 따라서 독일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위원회(Luther2017)는 루터의 성경 번역과 마찬가지로, 회중들이 쉽게 같이 따라서 부를 수 있는 새 노래 즉 찬송가의 보급 또한 종교개혁을 앞당기는 결정적인 요인이 됐다고 말한다(MARTIN LUTHER: VATER DER LIEDER(Father of Songs): With the poet Luther, the song movement of the Reformation began).]

마틴 루터는 노래 부르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 뉘렌버그의 대가수(Hans Sachs)는 루터를 “비텐베르그의 나이팅게일”이라고 부를 정도로, 루터의 노래 실력은 출중했다. 루터가 그의 친구 요한 발터(Johann Walter)에게 “내가 신학자가 아니라면 음악가가 되고 싶다!” 라는 편지를 보낸 것만 보더라도 음악에 대한 그의 사랑과 관심이 그의 신학 못지않게 지대했음을 알 수 있다.

그가 이해한 교회음악의 기능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둘째는 기독교인들의 경건성 회복과 복음의 전파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교회음악의 대중화’가 필요했다. 그래서 그는 이미 일반 평신도들에게 잘 알려진 익숙한 곡조와 친근한 음악형태를 응용해 ‘교회음악의 대중화’를 시도했다. 루터가 이해하고 있는 ‘교회음악의 대중화’란 16세기 당시 타락한 교황권력의 전유물이었던 찬양을 일반 대중들과 평신도들에게 되돌려준다는 뜻이 담겨 있다. 그의 이러한 시도는 16세기 카톨릭교회의 음악전통을 완전히 뒤집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예배음악이란 일부 성직자들이나 소수 종교 특권자들에게만 허락되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특별히 사제만이 아닌 모든 회중이 주님의 은총을 직접 맛보는 예배가 중요한 주제로 대두됐는데, 이것은 당연히 당시 교회 음악에 대해서도 개혁하려는 노력을 가져왔다. 지금 우리가 교회에서 부르고 있는, 찬송가(Hymn)로 알고 있는 찬송(chorale)은 루터와 츠빙글리, 그리고 칼빈 등 종교개혁의 결과로 성립된 개신교(Protestant Church)의 탄생과 함께 시작됐다. ‘교회음악의 대중화’를 위해 마틴 루터는 찬양함에 있어 가사는 카톨릭교회에서 사용해오던 기존의 어려운 라틴어 가사를 쓰지 않고 모국어인 독일어를 사용했고, 음악형태에 있어서는 모든 평신도들이 쉽게 이해하고 따라 부를 수 있는 대중음악과 민요형식을 택했으며, 찬양방법에 있어서는 예배시간에 회중들이 다함께 찬양하는 ‘회중찬송’의 방법을 채택했다.

그 시작을 먼저 자기가 사역하는 교구 회중들에게 성경적 통찰과 아울러 영혼에 울림을 주는 복음적인 찬양(chorale)을 작사, 작곡함으로 시작했던 것이다. 특별히 교구 안에 있는 어린 아이들 신앙 교육에 찬양을 도입했다. “어린 아이들은 반드시 수학과 함께 노래해야 하고 음악을 배워야 한다”라고 강조한 루터는 노래 즉 찬양은 말로 전해지는 것보다 더욱 강력한 영향을 주며, 복음적인 가사들은 영혼에 흔적을 남긴다고 믿었다. 따라서 아이들이 읽기 전에, 찬양을 통해 복음의 메시지가 전달되기에, 찬양 부르는 것을 좋아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파악한 것이다. 우리가 노래를 부를 때, 가수는 자신과 자신의 감정들과 확신들을 가지고 부르고, 그 노래를 듣는 사람에게 이입이 된다. 그래서 루터는 회중 찬양을 찬송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불렀다. 루터는 결국 찬양을 교구 회중들이 사용하는 모국어나 속어를 통해 부르게 했다. 왜냐하면 중세 카톨릭교회는 공의회 결정을 통해 미사 도중 속어나 자국어로 찬미를 드리거나 따라하는 것을 금지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회중들은 자신이 무엇을 부르는 것인지도 모르고, 찬양을 했던 것이다.

루터는 회중들이 ‘할렐루야’를 부를 때, 그 감격과 기쁨을 회복하게 만들고 싶어 했다. 한마디로, 루터에게서 음악은 '생존'을 위한 위로를 넘어 확신하는 믿음 가운데 그를 충만하게 이끌었기에 회중들 역시 그러한 체험의 현장을 맛봐야 된다고 믿었다. 따라서 종교개혁 이전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던 독일 중세 찬양들이 다시 예배에 도입됐다. 그리고 루터와 그를 따르는 동료들이 작곡한 찬양들이 교회 예배를 개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드디어 그 찬양들은 담겨져 있던 영향력을 본격적으로 발휘하기 시작했다. 마치 축구 경기장에서 관중들이 외치는 뜨거운 구호처럼 도시들에서 종교개혁을 일으키기 시작할 때마다 찬양들이 같이 울려 퍼져나갔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다 같이 하나님과 인생을 노래할 때, 그들은 하나였고 강력했다. 한마디로, 찬양을 부르는 것은 계속해서 동맹들을 만들어냈는데, 이러한 연합은 루터 당대에만 국한된 현상이 아니었다. 루터는 복음적인 가사들이 담긴 찬양의 파워는 시간과 장소를 초월해 계속해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을 하나 되게 할 수 있다고 믿었다. 실례로, 토마스 카라일(Thomas Carlyle)은 "내 주는 강한 성이요"를 감격 중에서 영어로 번역하면서 "이 찬송은 알프스 산의 눈사태 치는 소리나 가까워 오는 지진 소리와 같다"고 격찬했다. 바하(J.S.Bach)도 평생 이 찬송을 좋아해 애창했고, 이 곡조로 "칸타타"를 만들었다. 콜리지(Coleridge) 역시 "루터가 그의 성서번역으로 종교개혁을 추진시킨 것과 마찬가지로 그의 찬송으로 그것을 추진시켰다"라고 말했다. 루터 자신은 물론 그와 함께 극심한 핍박 중에서 종교개혁을 일으킨 개혁가들이 이 찬송을 부르면서 위로와 용기를 얻었던 것이다. 결론으로, 마르틴 루터는 신학자이자 음악가였다. 루터는 찬송을 철저히 복음과 연관 지었다. 그래서 후대 사람들은 그를 '복음 찬송의 시조'라고 일컫는다. 오늘날 복음주의 찬송은 종교개혁을 주도했던 루터에게서 시작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써 구원을 얻는다는 성경의 진리'에서 비롯된 찬송이라 말할 수 있다. 그리고 회중들이 알 수 있는 언어와 친근한 곡조와 형식으로, 복음의 살아 움직이는 힘을 다 같이 부르게 했다. 루터는 사람을 움직이는 찬송의 능력을 믿었다. 찬송은 성경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부지런히 가르치고 배워야 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루터는 외롭지 않았다. 바로 같은 노래를 부르는 복음 안에 있는 동맹군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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