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진모 목사 (필라델비아한인연합교회)
같은 길
마르틴 루터가 주도한 16세기 종교개혁은 갑자기 생긴 일이 아니다. 오랜 시간을 두고 준비된 과정이 있었기에 그가 개혁의 문을 활짝 열 수 있었다. 나아가서 그와 함께 개혁의 길을 걸었던 자들의 공헌도 결코 빼놓을 수 없다. 그 중에 1483년도에 태어난, 루터보다 앞 시대의 인물인 에라스무스(Desiderius Erasmus, 1466-1536)를 소개한다. 그는 네덜란드에서 태어났지만 유럽 전역에 영향력을 끼진 16세기 인문주의자들 중에 가장 널리 알려진 학자이며 개혁가이다. 구교의 사제였던 그의 아버지는 당대의 인문주로부터 영향을 크게 받았던 지성인이었지만, 매우 복잡한 가족 관계로 인하여 사생아로 에라스무스를 얻었다. 이로 인한 아픔과 열등감이 평생 그를 따라다녔다. 그럼에도 그는 당시 데벤터(Deventer)에서 ‘공동생활 형제단’이 운영하는 학교에서 1475년부터 1484년까지 수업을 받았다. 이로서 에라스무스는 중세 말기에 출현한 ‘새로운 경건(Devotio Moderna)’과 친숙하게 되었다.
‘새로운 경건’은 이성과 사변적 사고에 치우치던 중세 스콜라 신학에 대항하여 새롭게 시작된 운동이다. 그들은 중세 신비주의로부터 영향을 받았으나 범신론적 사상과 같은 오류를 배격하고, 성경 읽기와 묵상의 훈련을 통해 내적 신앙에 대한 성찰과 그리스도를 본받는 일을 강조하였다. 루터는 이들로부터 간접적인 영향을 받았으나, 에라스무스는 직접적인 영향을 받으며 성장하게 되었다.
네덜란드를 휩쓸었던 열병에 의해 부모를 읽은 에라스무스는 할 수없이 어거스틴 수도원에 들어갔다. 다행스럽게도 그곳에서 그는 인문주의에 지적 도전을 받고 깊은 매력에 빠져 연구에 열중하게 되었다. 1492년, 에라스무스는 신품 성사를 받고 신부가 되었다. 그 후 역시 ‘공동생활 형제단’의 영향을 받은 프랑스의 몽테그(Montaigu) 대학에서 공부를 하게 되었으며, 프랑스 인문주의자들과 넓은 교류를 갖게 되었다. 나아가서 그는 1499년에 영국에 체류하면서 토마스 모어(Thomas More)와 존 콜렛(John Colet)과 같은 영국 인문주의자들과도 교류하기도 하였다.
에라스무스는 성경을 문법적 역사적으로 해석하는 콜렛을 만난 뒤, 자신도 인문주의 문학을 도구로 하여 교회를 섬길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30살이 훨씬 넘은 나이에 3년간 헬라어 공부에 집중하였다. 그의 최고 걸작이 된 헬라어 성경을 출판할 계획을 지녔기 때문이다. 그 당시 교회는 초대교회교부 제롬이 4세기에 헬라어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한 벌가타(Vulgata)역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는 노력 끝에 1516년에 “헬라어 신약성경”을, 1519년에는 원문과 자신이 번역한 라틴어 역문 대역본이 출판하였다. 루터가 Worms(보름즈) 제국회의에 출석한 후 프레드리히 백작의 도움으로 몰래 피신한 바르쿠부르크(Wartburg) 성에 거하는 동안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할 때 에라스무스의 헬라어 성경을 사용하였다.
에라스무스는 영적인 면과 성경을 강조하는 개혁적인 마인드를 지녔었다. 에라스무스는 1501년에 집필한 “기독교 군사의 검”에 유럽 교회의 고위 성직자들과 사제들의 도덕적 타락을 적나라하게 지적하였다. 그는 성도들이 자칫 방심하면 영적 전쟁에서 마귀에게 정복될 수 있으니, 항상 그리스도의 군사의 신분을 한시도 잊지 말 것을 호소하였다. 영적 전쟁에서 싸워 이기려면, 성도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읽는 일과 쉬지 말고 기도하는 일에 게으르지 않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의 개혁사상을 엿볼 수 있는 그가 지은 책은 1511년 출판된 “우신예찬”이다. 그는 로마의 오류를 풍자적으로 표현하였다. 특히 외형과 교리를 지나치게 강조한다며 스콜라 철학자들의 결점을 폭로하였다. 이뿐 아니라 교회 지도자들과 수도사들의 부패를 해학적인 방법을 사용하나 매우 날카롭게 공격하였다. 그는 루터보타 앞서 나타난 16세기 종교개혁의 나팔수라 부르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중간 길
에라스무스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문제에 침묵하지 않고 종교개혁에 동참하였다. 그와 루터는 스콜라 신학과 로마 가톨릭교회가 지닌 많은 문제점에 동의하였다. 특히 루터가 교황청으로부터 파문을 받았을 때에 에라스무스는 루터 편에 서서 해결하려 하였다. 그러나 그는 루터와 똑같은 개혁자로 간주되는 것을 꺼려했다. 루터가 구교를 향해 급진적인 태도를 보이게 되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인해 갈등이 격렬해지자, 에라스무스는 자신의 입장을 분명하게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자신은 교회가 개혁되어야 한다는 입장에는 변함이 없으나, 갈등이 심화되고 격렬해지는 것에 대해서는 찬성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종교개혁의 원년인 1519년에 “신학에 대한 추론”이란 제목의 글을 통하여, 자신이 속한 것은 루터 진영이 아니며 로마 가톨릭교회임을 선언하였다. 그는 이 글에서 교황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기도 하였다. 그가 선택한 것은 ‘중간 길’이었다. 루터의 개혁사상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동의하지만, 교회를 떠나지 않겠다는 것은 한쪽 편을 들지 않고 중립을 지키겠다는 선언이었기 때문이다. 루터는 자신이 걸어야 했던 멀고 험한 개혁의 길을 함께 하였던 에라스무스의 모습에 크게 실망하였다.
에라스무스는 분명 16세기 종교개혁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루터가 주도한 종교개혁과 같은 방향의 길을 걸을 수 없었다. 교회의 분열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에라스무스의 마음은 루터를 응원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새로운 교회의 출범에 대해서 매우 회의적이었다. 망가진 교회를 고치고 개혁하자는 것이 그의 의도였다. 그는 실로 인문주의자였다. 비록 그가 출판한 “헬라어 신약성경”은 당대와 후대의 교회 개혁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지만, 그는 성경의 진리를 붙잡는 것보다 인문주의적 사고와 방식에 더욱 많은 관심을 드러냈다. 그는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에 대해 말하기보다 인간에 대해 더욱 큰 관심을 가졌다. 그러므로 그는 인간에게 주어진 절대적인 진리를 지키는 일보다 인간관계에서 지켜야 할 관용과 평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한 것이다.
중간 길은 항상 매우 유혹적이다. 너와 내가 가려하는 길을 모두 포기하고 함께 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길은 타협이 없이 갈 수 없다. 누구에게나 진리를 버리면 사람을 얻고, 사람을 버리면 진리를 얻는 결정적인 순간을 경험하게 된다. 이 시대는 포스트모던 사고에 젖어있다. 나만의 진리를 고집하지 않는 것을 미덕으로 삼고 있다. 넓은 마음을 가지고 아량을 베풀며 다른 것을 품는 사람을 진정한 승자라고 부추긴다. 이런 정신이 교회 안에 깊이 침투하여 있다. ‘중간 길’을 제시하며 이것이야말로 가장 현명한 선택이라고 한다. 물론 여기에는 신학과 교리, 그리고 성경관 등 모두를 포함하고 있다.
다른 길
에라스무스가 제시한 ‘중간 길’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종교개혁이 무르익으면서 유럽에는 로마 가톨릭교회와 개신교 교회가 자신들만의 분명한 길을 선택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모두 ‘중간 길’을 선택하지 않았다. 자신들만의 길을 고집하였다. 에라스무스의 ‘중간 길’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점점 사라져갔다. 그가 죽은 후 그 길은 그와 함께 자취도 없이 사라져갔다. 이제 남은 것은 오직 ‘다른 길’ 뿐이었다.
루터는 ‘중간 길’이 사라질 것이라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 에라스무스는 개혁주의적 마인드를 가지고 중세 스콜라 신학을 비판하였지만, 그의 성경관에 커다란 문제가 있던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에라스무스는 성경관도 ‘중간 길’을 선택하였기 때문이다.
1524년, 에라스무스가 “자유의지론”을 출판하였다. 이전부터 에라스무스와 루터 사이에 오가던 논쟁을 이 책을 통하여 노골화 한 것이다. 그는 성경에 자유의지에 대한 언급이 분명하지 않으며, 은혜를 유지하기 위하여 반드시 자유의지가 필요하다고 역설하였다. 이에 맞서 루터는 1525년에 “노예의지론”을 출판하였다. 성경은 분명히 인간의 부패로 인하여 스스로 구원받을 수 없으며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로만 가능하다고 천명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두 사람은 초대교회부터 내려왔던 신학적인 문제, 즉 어거스틴과 펠라기아누스의 신학 논쟁의 연장선에서 대립한 것이다. 루터가 어거스틴의 신학적 관점에 영향을 받았다면, 에라스무스는 전통적인 중세 가톨릭교회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던 것이다. 루터는 이 논쟁을 통하여 에라스무스의 성경관에 대한 오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에라스무스는 성경의 명료성을 부정하였다. 성경이 우리가 이해하기에 매우 애매한 부분이 많기 때문에 인간의 의지 또는 예정론과 같은 교리를 세우지 말아야 하며 오직 그리스도만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하여 루터는 성경의 명료성을 주장하였다. 특히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인 구원의 주제에 대해서 성경이 정확한 답을 제공하고 있다고 역설하였다. 만일 성경이 말을 하고 있지 않은 부분이 있다면, 반드시 성경이 성경을 해석하는 방법을 선택함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분명하게 헤아려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루터가 선택하고 걸었던 개혁의 길은 중세교회가 오랜 세월 걸어온 길과 전혀 달랐다. 루터는 성경을 최고의 권위로 삼고, 성경의 진리가 이끄는 길을 따라갔다. 이와 반대로 로마 가톨릭교회는 성경과 교회의 전통, 나아가서 교황의 권위를 함께 최고의 권위로 두었다. 16세기에 갈라진 두 길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왜 우리에게 다시 종교개혁이 필요한가? 끊임없이 ‘중간 길’이 가장 좋다고 반드시 선택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목소리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루터가 후대 교회에게 남겨준 ‘오직 성경’ 사상은 우리에게 ‘다른 길’은 물론 ‘중간 길’의 유혹에 넘어가지 말라는 엄중한 경교성의 교훈이다. covenantcho@yaho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