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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 그 낮은 곳이 은혜입니다!

2017년 고난주간 맞아 십자가 신학=고난의 영성 되새겨

[사순절의 절정에 이른 고난주간이 시작된다. 이 고난주간은 단순히 종교적 의미의 개인의 경건 차원을 넘어서서 인간의 죄와 고통의 현장에 찾아와 주시는 고난의 하나님을 증거하고 있다. 예수님이 짊어지신 십자가는 단순히 경건한 자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죄와 고통 가운데 있는 전 인류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 고난주간을 맞이하면서 이 세상의 죄와 고통, 가난과 질병, 이슬람무장단체(IS)의 살육 등 각 종 테러와 민족들의 분쟁, 사회적 갈등, 커져가고 있는 사회적 빈부 격차 등 신음하고 있는 이 세상... 그리고 오늘날 우리를 위해 받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의 의미를 성찰한다. 바로 종교개혁자들인 루터와 칼빈을 통해 십자가 신학과 고난의 영성을 다시 살펴본다.]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요, 부활의 승리는 역사의 모든 고통과 고난을 극복하는 하나님의 주권의 선포다. 그러나 이 그리스도의 부활은 십자가의 고난과 죽으심 없이는 이뤄질 수 없다. 부활의 승리에는 십자가의 고난과 죽으심이라는 희생이 있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십자가의 고난과 죽으심이라는 대속의 중요성을 알지 못하고 그냥 부활의 승리축제에 도취하는 기독교는 번영의 종교나 기복종교와 다를 바 없다. 과정의 진통보다는 결과의 열매만 따먹으려는 왜곡된 모양이다. 그러나 언제부터인지 교회에 고난을 따르려는 여정이 사라졌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가능하시면 이 고난의 잔을 지나가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기도를 들어주지 아니했으며 예수는 이 고난의 잔, 십자가를 져야했다. 이는 인류 역사에서 일어난 모든 인간들의 죄와 악의 문제를 대신 짊어지시는 정의로우신 하나님의 섭리였다. 오로지 인류 역사에 나타난 유일한 의인이신 하나님의 아들만이 십자가에서 인류가 저지른 여태까지의 죄와 앞으로 지을 죄 모두를 대속하기 위해 대속의 제물이 되신 것이다.

그래서 루터는 “인간의 하나님에 대한 지식의 유일한 참된 자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라고 강력하게 말했다. “오직 십자가만이 우리의 신학이다(CRUX sola est nostra theologia).” 따라서 ‘십자가의 신학자’는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와 그의 고난과 십자가 안에 나타난 그의 계시 안에 숨어 계신 하나님의 현존을 인식하는 사람이 된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은 특별히 고난을 통해 알려진다는 진리 안에 거하게 된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한 언급이지만 하나의 더 깊은 영적인 진리가 내포돼 있다.

십자가 신학의 근본적인 의도는 단지 하나님이 고난을 통해 알려진다는 사실(그것이 그리스도의 고난이건 아니면 각 개인의 고난이건)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고난을 통해 그 자신을 알리신다는 것이다. 칼빈 역시 하나님의 숨어계심을 자신의 십자가 신학 위에서 세우고 있다. 십자가에서 승리하신 그리스도는 그의 죽음의 옷을 입고 있었다. 칼빈이 이해하는 십자가의 신학은 이처럼 어떤 것의 반대적 모습으로 나타나는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은 때로는 당신이 의도하는 것의 정반대를 행하심으로써 당신의 행위의 목표를 감추신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의 고난을 도와주시기를 미루시는 것은 그의 백성을 눈물과 탄식으로 단련하시기 위함이다. 칼빈이 하나님의 숨어계심을 설명할 때 칼빈은 동시에 하나님의 모든 행위에 의도가 있음을 설명함으로써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해준다.

특별히 그가 살았던 16세기는 인간 역사상 가장 드라마틱한 시대였다. 그 격변의 시대 속에서 성경에 근거한 종교개혁적인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곧 일련의 고난과 핍박을 받는다는 것을 이미 각오하는 것을 의미했다. 칼빈은 현실적으로 당시에 존재하고 있는 고난을 신학적으로 묵상했다. 칼빈 자신도 박해의 위협 속에서 고국인 프랑스를 탈출했던 사람이었다. 고난에 대한 칼빈의 견해를 정리한다면 다음과 같다: 첫째, 경건한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위해서 당하는 고난은 자연스럽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칼빈의 고난에 대한 신학은 스토아적인 사상과는 다르다.

둘째, 칼빈은 성도들이 당하는 고난에 대해서 목회적인 마인드로 접근하면서, 고난당하는 성도들을 위로 및 격려하고 있다. 셋째, 경건한 자들의 고난은 구원의 서정의 맥락에서 성화의 과정에 위치한다. 이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을 찬송하는 신앙의 성숙을 이룩하게 돼 고난은 성화와 관련된다. 넷째, 칼빈에게 있어서 신자들의 고난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기독론적인 의미가 있다. 다섯째, 칼빈은 신자의 고난을 종말론적인 맥락에서 해석했다는 것도 주목할 만한 가치가 의미가 있을 것이다.

결국 칼빈에게 있어서 고난은 성도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하나의 과정으로서 종말론적인 의미를 갖는다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 4장 17절과 같이 먼저 성도가 고난을 당한 후에 최종적으로 경건하지 못한 자들의 최후의 심판이 있게 된다. 즉 칼빈은 고난은 하나님의 나라가 성취되는 필연적인 하나의 과정이라고 신학적으로 강조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역사적으로, 기독교는 로마의 국교가 되고 나서 십자가와 고난이라는 야성을 벗어버리게 된다. 수세기동안 박해를 피해 좁은 통로로 이루어진 지하묘지, 카타콤(Catacomb)에서 숨어 지냈던 기독교 설교자들은 로마제국 궁정의 설교가가 되면서, 역사적 기독교는 십자가의 종교에서 제도의 종교로 바뀌고 점차 교인들에게 복과 번영을 기구해주는 기복종교의 모습으로 변질하는 상황을 연출하게 된다.

그것은 중세 후기에 면죄부 판매로 나타났고 성직매매로 나타났다. 성례전에는 떡과 포도주가 신부의 축성과 더불어 예수의 몸과 피로 변한다는 화체설이라는 마술(魔術)로 나타났다. 이러한 로마 천주교의 제도화된 기독교는 루터와 칼빈 등 종교개혁자들을 통하여 개혁교회 안에서는 수정됐으나 오늘날 교회공동체는 이러한 종교개혁의 전통에서 다시 멀어져서 회개 없는 기독교, 십자가 없는 기독교로 변질하고 있다. 그래서 고난주간을 맞아 우리는 자기비하와 성육신으로 자기를 한참 낮추신 하나님, 그것도 다시 한번 십자가에서 자신을 낮추셔서, 인간을 구원하신 은혜에 깊이 잠겨야만 한다. 결국 나를 비우고 또 비워서 하나님의 은혜로 가득 채우는 기간이 되기를 소망한다.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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