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수 목사 (알칸사 제자들교회)
어린아이의 고집스러움
어린아이들은 병에 쉽게 노출되고 면역력이 약해 자주 아프거나 감기에 노출된다. 전염병이 오면 가장 먼저 희생되는 대상도 어린아이들이다. 영적인 어린아이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을 알아가는 일에 어린아이와 같은 이들은 사단이 가져다주는 유혹과 거짓된 술책에 말려들어 쉽게 요동친다. 태어나지 않음은 아니기에, 믿음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믿음의 흔적은 있지만 굳게 서지 못함으로 결국은 떠밀리고 요동치는 믿음의 상태가 되고 만다. 물론 어린아이에게도 자기 나름의 생각들이 있다. 그러나 이것을 소신이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매를 자청하는 고집스러움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온전하고 견고한 반석 되신 주님께 붙들려있지 못함으로 한순간에 시험에 빠져드는 안타까운 고집스러움이다. 강한 것 같지만 의외로 연약하기 짝이 없다. 속사람이 강건하게 세운바 되지 못한 결과이다. 교회 안에서도 다른 사람의 말 한마디에 상처를 받아 마치 감정상한 아이가 자기 방문을 쾅하고 닫고 들어가듯이 쉽게 쉽게 회피하고 숨어버린다. 변화의 기회, 성장의 기회를 얻는 데 노출되기를 싫어하는 것이다. 반면에, 비 진리적인 문제에는 쉽게 노출된다. 혼자 있는 외톨이 신앙을 유혹하는 마귀의 도움 때문이다. 현혹되는 것이다. 이처럼 어린아이의 신앙은 매를 자청하는 고집스러움만 있을 뿐, 결코 세상에 요동치는 자신을 지켜내지 못한다. 이처럼 성장하지 못한 어린아이와 같은 고집스러움은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불통은 영적인 어둠의 흔적들
교주들과 이단들의 특징은 머리에 관을 쓴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박태선, 문선명 등 이런 사람들을 보면 머리에 관을 썼다. 모자를 쓴다는 것인데, 특징은 나이가 먹으면 그걸 더 쓰고 자신을 가린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신학자가 찾아가서 그러지 말라, 아니다, 틀린 것이다, 그렇게 말하여도 들어보려고도 하지 않는다. 오직 자기가 생각하는 그 옳다는 것만 딱 붙들고 살아간다. 이들의 머리에 씌어진 관의 의미는 무엇일까? 자신에게 더 이상 말하지 마라, 근접하지 마라, 나는 누구의 말을 듣거나 할 그런 연약한 존재가 아니라는 불통의 상징인 것이다. 사람은 누구의 말을 들으면 흔들리는 게 있어야 정상이다. 그런데 그 영혼에 악한 것이 들어가면 누구 말도 듣지 않고 어떤 영향도 받지 않으려는 불통의 존재가 되고 만다. 혹여 그런 사람들을 만나면 더 이상 대화가 안 된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결국 내버려둘 수밖에 없다.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들에게 악한 것이 들어가도록 허락이 아니라 허용하셨음을 기억할 따름이다. 하나님께서 버려두시는 것이다.
성경의 사울을 보면 그 마음의 고집스러움이 얼마나 인생과 가문과 맡겨진 나라까지 망칠 수 있는가 하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러나 다윗을 보라. 다윗은 사울의 시기 질투의 죄에 비해서 그의 범죄는 실로 엄청나다 할 것이다. 차이가 무엇인가? 사울은 사무엘이라는 영적 지도자의 말을 귀로만 듣고 마음으로 듣지를 못했다. 사울은 자기 생각의 그 고집스러움이 말씀을 이기는 순간부터 실패의 늪으로 빠져들기 시작했다. 예배의 실패, 하나님과의 교통의 실패가 가장 분명한 증거가 되었다. 그러나 다윗은 엄청난 범죄에도 나단 선지자의 그 말이 그의 영혼에 터치되어 그 영혼의 문을 열고 말씀을 듣게 됨으로, 하나님과의 영혼의 소통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이 떠나지 않는 회복자의 삶을 살게 된 것이다. 삶의 고집스러움이 영혼의 문제와 연결될 때, 엄청난 파괴력을 가지고 영혼과 삶을 뒤흔들 수 있음을 생각해야 한다.
자기중심의 생각-감정의 지배
사울에게는 어린아이와 같은 고집스러움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통하지 않는 영적 어둠이 존재함을 보게 된다. 그 중심에 또한 요동치는 감정적인 요소가 지배적임을 보게 된다. 시기와 질투와 미움이 그의 영혼을 지배함을 본다. 악신이 영적 어둠속에 얼마나 강력하게 임했는지, 누가 얘기해도 흔들리지 않음을 본다.
간과 쓸개도 내어줄 것처럼 행하다 가도, 미움이 들어오고, 악한 영이 개입되니까 그렇게 좋아했던 사람을 그렇게 죽이고 싶고, 그렇게 꼴 뵈기도 싫고, 근처도 가기 싫고, 사람이 할 일이 아닌데 하는 것을 보게 된다. 흔히 누군가를 향해서 안 보면 그만이지, 목소리조차도 듣기 싫고, 걸음걸이조차도 싫고, 그렇게 된다고 할 때 영적 어둠의 세력 마귀가 역사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들이 아니겠는가? 고집스런 감정으로 불통의 삶을 해결하는 길은 자기중심의 생각을 내려놓고 잠잠히 들어야 한다. 영육간의 회복은 말씀을 듣는 데서 시작이 된다. 말씀을 들으면서 뭐든지 자기중심에서 생각하는 것을 피하는 것이 지혜임을 배워야 한다. 내 중심에서 생각할 때 영적으로 어두워진다. 회개의 기회를 상실하게 된다.
한국의 고집스러운 불통
영적인 어둠의 세력으로 인한 불통은 세상에서도 여전히 마귀의 권세아래 그 열매들을 드러낸다. 양자로 갈리어진 한국적 상황은 고집스러운 불통의 현상 앞에 드러난 민낯의 열매일 따름이다. 어느 정도로 심각한 상황인가 하는 것은 도무지 미래에 소망을 두지 않는 저들 각자의 생각을 통해 드러난다. 사람들은 ‘죽음이 끝이다’라는 막장 인생을 생각하지 않는 한, 어느 누구라도 그러하듯이 ‘다음(next) 순간, 다음 날, 다음 해 다음 인생’을 생각하며 살아간다. 아무리 지옥 같은 환경이어도, 지옥에서 보낼 다음 인생을 생각하는 사람은 자살하지 못한다. 이렇게 다음(next)을 생각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지극히 정상적이며 상식적이라 말할 수 있다. 반면, 다음을 기약하지 못할 만큼 무모한 인생을 가리켜 아둔하고 바보스럽다할 것이다. 작금의 한국적인 상황을 돌아보면, 다음(next)이라는 경우의 수는 안중에 없는 듯이 극렬하게 대치함을 보게 된다. 물론, 오랜 세월 체득하게 된 자연적 인식은 결국 정치라는 것은 ‘표리부동’이 전형일진대, 시간이 지나고 나면 일희일비하는 백성들만 아파하는 일이 될 것이라는 명백한 사실이다. 더불어 상호입장을 헤아려보면 인정할 수 있는 측면도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이다. 결국 다음을 생각하지 않는 그 극단의 첨예한 대립의 문제는 소통의 부재, 불통의 문제로 귀결이 된다. 불통의 존재는 누구인가? 자기가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것으로 자신을 절대화시켜 소통을 회피하는 이들이다. 진영의 논리를 이해 못함이 아니라, 결국은 지나갈 시대의 일들 앞에서 이를 슬기롭게 봉합할 ‘어른이 존재하지 못하는 공동체’의 불통에 대한 아픔을 말하는 것이다. 어른이 없기야 하겠는가? 다만 귀 막고 눈을 막고 있기에 들리지 않는 것이고, 듣지 못함이 아니라 듣고자 하지 않음이기에, 여전히 불통의 벽은 높아만 가는 것이리라. 최근에는 한 가족안에서도 대립의 격화가 나타남을 말한다. 정치가 가족·친구·연인 사이도 갈라놓을 뿐 아니라, 밥 먹다가 남매끼리 멱살잡이를 하거나, 탄핵집회참가 여부를 놓고 부녀·모자간 언쟁을 하면서, 탄핵을 반대하면 '수구 꼴통'으로 매도되기에 '꼰대' 취급 당할까봐, 찍힐까봐… 직장에서나 가정에서나 입조심들을 하며 산다고 한다. 그러면서 각자 민주주의를 또한 외친다. 더 나아가 교회에서도 정치얘기는 금지의 항목이다. 신앙은 지방과 연령별 선호마저도 넘어서지 못하는 것인지 무력한 마음이다.
소통가운데 다음 미래를 말함
어린아이와 같은 극단적인 고집스러움에는 좋은 열매가 없다. 고집스러움은 불통의 열매만 양산한다. 육신의 불통이 영적인 하나님의 말씀을 가로막아 들리지 않게 한다. 영적 어둠이 존재함을 본다. 그 어둠의 중심에는 요동치는 감정적인 요소가 지배적임을 보게 된다. 시기와 질투와 미움 갈등이 그의 영혼과 주변을 지배함을 본다. 이를 회복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고집스러움과 불통이 영적인 문제라고 할 때, 주님 안에서 영적인 회복이 절실함을 보게 된다. 주님은 하나님과 불통한 세상가운데, 친히 자신을 제물로 드려 소통의 구원이 이뤄지기를 소망하셨다. 더불어 우리에게 주님 닮은 소통의 삶을 살도록 말씀하신다. 미움과 시기 질투와 고집스러움을 가지면 미래를 볼 수가 없음을 기억해야 한다. 사울 같은 인생이 되면, 하나님의 말씀도 겸손히 듣지 못하고 은혜를 기억하지도 못하고 감사하지도 못하고 악신에 붙잡혀 나중에는 왕의 자리도 뺏기고 결국 자살하는 불행한 인생이 되는 것이다.
개인, 가정, 교회의 일뿐 아니라 한국의 어려움과 갈등의 문제도 영적어둠아래 놓여진 고집스런 불통에서 시작이 된 것임을 안다. 소통해야 한다. 개인과 공동체를 파괴시키는 모든 불통의 문제들을 주님 앞에 가져와야 한다. 하나님과 우리의 소통이 문제해결의 가장 중요한 첫발걸음이 될 것이다.
소통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고, 미래를 말할 수 있다. 한국의 상황들에 대해서도 결정이 어떤 방향으로 되던 우리가 주님과 소통하고 있으면 우리는 그 결과를 겸허히 받아들일 것이며, 설령 불순세력의 장난이 있다하여도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합력하여 당신의 일을 이루어 가실 것이다. 단, 우리 믿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주님에게 불통되지 않을 때 말이다. 탄핵결정을 며칠 앞 둔 어느 날 한국의 스승 목사님께 염려 근심을 토로하였는데, 한마디로 명료하게 정리하셨다. ‘새벽마다 나라위해 기도하는 성도들이 있잖은가?’ 아멘입니다. davidnjeon@yaho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