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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성에 젖은 사순절 이젠 그만!

3월 1일-4월 13일...종교개혁자들의 시각으로 바로 잡기 시도
타성에 젖은 사순절 이젠 그만!

[사순절은 부활절까지 주일을 제외한 40일 동안(3월 1일-4월 13일)의 기간을 말하며, 성도들은 이 기간 동안 그리스도의 삶, 십자가의 고난, 부활 등을 생각하며 근신하고 회개하는 전통을 갖고 있다. 사순절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고난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며 그를 따르는 제자의 도를 훈련하는 기간이다. 그러나 교회공동체는 그동안 부활절, 추수감사절, 성탄절처럼 화려한 기념행사에는 열과 성을 바쳐왔지만, 사순절과 같이 주님의 고난에 동참함으로써 묵상과 침묵을 통해 깊은 영성으로 나아가는 데는 노력이 부족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교회가 겸손함보다는 화려함을 선호하고 침묵과 명상보다는 찬양과 행사에 열정을 쏟음으로 영적인 깊이가 많이 얇아지지 않았느냐는 비판의 소리가 나오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비판은 단지 오늘날만의 문제가 아니다. 종교개혁자들 역시 “경건의 능력이 아닌 모양”만을 흉내 내는 중세 카톨릭교회의 사순절 관행을 엄격하게 비판했다.]

먼저 “종교개혁 500주년”의 주인공 마르틴 루터의 비판을 들어보자. 그는 ‘이신칭의(Justification by faith)’라는 표어로 교리적 차원의 종교개혁을 단행했다. 그렇기 때문에 예전(sacrament)과 종교적 전통과 같은 교리 외적인 부분에 관해서는 유연하고 우호적이고 관대한 입장을 견지했다고 여겨지고 있다.

특히 루터는 ‘목욕물을 버리면서 아기까지 버리는 오류’를 범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사순절의 존폐여부에 관해 루터는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주의 날(主日)’ 이외의 어떠한 교회력 절기도 무의미하다는 입장을 견지했기 때문에 그것을 부정했다. 스위스 취리히(Zurich)의 가톨릭 사제였던 울리히 츠빙글리는 사순절은 교회전통의 산물이므로 절대화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사순절 규정의 준수 여부는 자연인의 자유에 속하는 것이며, 준수여부에 따라 차별하는 것은 잘못됐다고 피력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말미암아 여타의 관행은 그림자와 상징물에 불과하므로, 예전을 거행하는데 있어서 신자 나름의 환경과 조건에 따라 융통성 있고 자유롭게 실시함이 적절하다고 했다. 그는 타성에 젖은 금식 관행을 비판했다. 따라서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로 시작하는 사순절에만 참회를 하고 금식을 준수하고, 성찬을 하기만 하면 일 년 내내 범사가 낙관적일 것이라는 카톨릭교회의 고정관념을 비판했다.

종교개혁을 마무리 지은 프랑스 출신의 스위스 제네바의 신학자인 존 칼빈은 사순절의 금욕과 절제생활이 인간의 업적으로 치부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연례적인 사순절 금욕 관행을 비판하고 부정했다. 유의할 것은 칼뱅은 금욕자체를 금기시한 것이 아니라, 중세교회 당시의 미신적 차원의 사순절 40일 금욕 관행을 비판했다는 사실이다. 그도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주의 날(主日)’ 이외의 어떠한 교회력 절기도 부정했다. 결국 유럽에서 사순절의 왜곡된 관행 때문에 생겨난 사생아가 바로 사육제(carnival)라는 사실은, 왜 종교개혁자들이 사순절을 전면 비판했던가를 알 수 있는 단초가 된다. 다시 말해서, 사순절이 종교개혁자의 비판과 비난의 과녁과 표적이 된 원인은 내용 없고 실속 없는 껍데기뿐인 절기 준수 타성 때문이었다. 마음과 정성이 동반되지 않은 타성에 젖은 종교 관행을 비판한 것이다. 부활절을 앞둔 사순절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묵상하며 실제 삶에서 적용을 고뇌하는 시간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 여정 가운데 마지막 40일을 함께 보내는 심정으로 크리스천들은 사순절을 지낸다. 그리고 부활절을 맞으면서 진정한 생명을 얻은 축복의 의미를 새삼 절감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사순절이 시작되는 날을 회개를 시작하는 날로 정해 회개의 상징이 되는 "재(ash)"를 머리에 쓰고, 자루 옷을 입고 다녔으며, 이러한 전통은 9세기까지 계속됐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을 깊이 묵상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고, 고난의 의미를 되새기는 기간이 됐던 것이 초대교회부터 지켜온 사순절이라는 교회력의 근본적인 의미였다. 그런데 이러한 전통이 하나의 습관으로 자리 잡게 되면서, 사순절 기간에만 잠정적으로 절제와 경건을 추구하는 자세를 종교개혁자들은 신랄하게 비판한 것이다. 사순절은 한마디로, 십자가 중심의 기독교 즉 예수의 십자가를 통한 우리의 결단을 기대하고 있다. 바로 “내가 너를 위해 몸 버려 죽어 주었는데, 너는 날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음성을 지금 우리가 들을 수 있어야한다. 동일한 맥락에서, 막스 루케이도 목사는 핏빛 선연한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한다고 말한다(“예수가 선택한 십자가”).

“갈보리언덕에 서 보라. 십자가의 나뭇결을 손가락으로 매만져 보고 못 끝으로 당신의 손목을 지그시 눌러 보라. 그분의 아픔에 귀 기울여 보라. 군병들이 뱉은 침이 주님의 옷에 튄다. 가시의 뾰족한 끝이 그분의 머리를 찌른다. 대못이 손목을 뚫고 들어간다. ‘쾅, 쾅, 쾅’ 병사의 창이 주님의 옆구리를 찌르고 들어간다. 물과 피가 쏟아진다. ‘아, 주님! 이 모든 일이 나를 위해 하신 일입니까?’ 그때 그분의 속삭임이 들려올 것이다. ‘그래, 너를 위해, 너의 마음을 얻으려 한 일이란다.’” 결론으로, 2017년 사순절에는 좀 더 천천히, 깊이 그리고 함께 걸어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동반자의 훈련이 필요하다. 겟세마네동산에서 예수가 혼자 기도하실 때 함께 기도할 제자가 필요했다. 그러나 제자들은 함께하지 못했다. 피곤해서 육신이 말을 듣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십자가에 동행하지 않으려는 내적인 시험이 그들을 지배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 예수는 제자들에게 “일어나라 함께 가자”고 말씀하셨다. 사순절에는 어떤 모양으로든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를 함께 지는 연습을 하여야 한다. 십자가는 홀로가 아니라 함께 가는 길에서 능력이 일어나고 기적이 발생한다. 사순절 즉 40일 동안 바로 그리스도의 고난을 묵상하고 그 고난의 의미를 인생에 적용해야만 한다. 경건과 절제, 희생과 나눔, 성찰과 회복이 사순절의 진정한 의미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로서, 동반자로서… 나로부터 시작되는 사순절의 의미 회복은 공동체의 변화에 영향을 준다.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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