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진모 목사 (필라델비아한인연합교회)
결단의 출발점-성경의 진리
500년 전, 종교개혁을 결단하고 주도했던 마르틴 루터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그는 중세 교회에 대항하려는 목적으로 대중을 선동하고 결집하는데 능숙한 혁명가 스타일의 사람이 아니었다. 자신의 의를 드러내며 한 치도 양보도 허용하지 않으려하며 상대를 배려하지 않고 끝까지 정당성을 고집하는 강한 성격의 소유자도 아니었다. 나아가서 교회 개혁의 필요성을 지적하는 말과 글을 통하여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명성을 얻고자하는 의도도 없었다.
마르틴 루터가 중대한 "결단"을 내릴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눈에 비쳐진 교회의 모습 때문이었다. 그가 주도한 개혁은 이상적인 교회를 세우기 위한 고민의 결과가 아니었다. 사람들의 마음에 맞추거나 대중으로부터 호응을 얻을 수 있는 교회의 모습을 구상한 것도 아니었다. 그로 하여금 교회 개혁에 대하여 눈을 뜨게 하여준 것은 다른 아닌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그는 하나님께 삶을 바치기로 작정하고 가톨릭교 교회의 사제가 되었다. 절대적인 권위를 지녔던 교회의 전통과 교황의 가르침에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강한 훈련을 걸쳐야 했다. 당시에 그와 함께 생활하고 접촉하던 대부분의 사람들도 교회에 충성과 헌신을 다짐하고 실천하였다. 이미 형성된 기존의 굴레 안에서 살아가던 그였지만 결단을 가능하게 하였던 결정적인 원인이 있었다. 그의 눈에 비쳐진 교회의 현실이 성경이 제시하는 교회의 모습으로부터 심각하게 동떨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성경적 교회를 회복하기 위한 개혁이었다. 어떤 의미에서 루터는 성경의 사람이었을까? 18살이 되던 해에 에르푸르트 대학에 입학한 후 성경을 직접 읽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태어난 후 처음 있던 일이었다. 그가 의도적으로 성경을 멀리하였거나 나태하였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 당시 성경은 사제들의 손에 있었다. 성도들은 교회에서 사제들이 읽어주면 듣는 정도로 성경을 대하였던 것이다. 물론 더욱 커다란 문제는 읽어주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라틴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성경의 내용 자체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고민할 수 있는 가능성이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이런 환경에서 사제들이나 성도들의 신앙은 수동적이며 형식적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다. 루터도 예외가 아니었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그가 처음 스스로 성경을 읽기 시작하면서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다. 향후 그는 성경을 배우는 학생 시절을 지나고 더욱 전문적으로 연구하여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의 사역을 하면서 성경은 자신의 모습을 분명하고도 확실하게 비추어주는 거울이 되었다. 그 결과 그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정결하고 정직한 모습으로 서기 위하여 최선을 다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경외심으로 대하던 그의 태도가 루터로 하여금 성경에 입각한 개혁을 단행하게 하였다. 성경에 비쳐진 교회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개혁의 일이 바로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임을 확인하고 결단하게 된 것이다.
결단의 내용-현실에 대한 고민
루터가 종교개혁을 결단하게 된 결정적인 동기는 분명히 성경이지만, 한편 그가 동시대 교회의 상황을 분명하게 바라볼 수 있는 예리한 눈을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다시 말해 개혁 정신을 가지고 현재의 상황을 고치고 변화시키려면 성경이 말하는 교회의 진정한 모습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함께, 현재 개혁되어야 할 교회의 모습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개혁에 대한 외침이 드높다. 그렇다면 우리는 반드시 현대 교회를 직시하는 눈을 가져야 한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개혁의 내용에 대한 객관적이며 분명한 내용을 공유하는 것이다. 2천년동안 흘러온 교회의 역사이지만 “성경이 가르치는 교회의 모습을 수용하느냐 거부하느냐?”라는 관점에서 요약될 수 있다. 종교개혁이 발생한 이후 5백년의 교회 역사도 마찬가지다. 교회가 과연 “성경의 진리 안에 거하였느냐 아니면 이탈하였느냐?” 라는 기준을 가지고 바라보아야 한다. 루터는 자신을 낳고 길러준 중세 교회의 오류를 발견하면서 나름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성경의 가르침으로부터 멀리 떠나있던 교회를 다시 제 자리로 되돌아가도록 해야 한다는 강한 사명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 결과, 교황이 성 베드로 대성당의 신축 비용 등을 확보하기 위하여 면죄부 발행을 남발하던 것을 지적하며, 1517년에 ‘95개조 반박문’을 제시한 것이다.
그러나 교회의 반응은 전혀 그의 기대와 달랐다. 성경에 근거하여 지목된 구체적인 오류의 개혁에 대한 공감이 전혀 없었다. 도리어 개혁을 부르짖는 루터에 대한 격심한 공격이 시작되었다.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이 전개되었다. 몇 번에 걸친 청문회와 논쟁을 통해 루터의 생각을 바꾸어놓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루터는 이 기회를 통하여, 성경의 원리에 비추어 중세 교회의 신학적 오류를 맹렬하게 지적하였다. 만일 중세 교회가 루터의 개혁사상을 무시하고 침묵하였다면 상황은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초기 루터는 무명의 신학자였다. 교회의 반발과 적극적인 대처가 도리어 그를 중요한 인물로 부상시킨 것이다. 그의 개혁 사상에 독일과 유럽에 퍼져나가기 시작하면서, 이에 동조하고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사람들의 수가 눈덩이와 같이 불어났다. 교회가 짊어져야 할 부담이 훨씬 커진 것이다. 루터의 글과 말은 개혁을 요구하는 대중의 목소리를 대변하게 된 것이다. 루터는 1521년 보름스 제국회의에서 이단으로 파문당했다. 그가 제시한 개혁의 구체적인 내용을 거절한 것은 물론, 아예 그를 교회로부터 잘라낸 것이다. 중세 교회가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교회의 모습으로 개혁하자는 그와 그를 따르는 자들의 외침을 외면하고 전적으로 배격한 결과, 개혁적인 마인드를 지닌 개신교회가 출발될 수 있었다.
현대 교회-결단의 출발점과 내용
루터가 주도하였던 종교개혁의 분명한 대상이었던 중세 교회와 달리, 성경적인 모습을 갖추기 위해 독립적으로 출발한 개신교회의 역사가 500년이나 흘렀다. 그동안 개신교회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교회 역사 교과서에 담겨져 있는 수많은 객관적인 사건들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주고 있을까?
종교개혁 500년 주년을 맞는 현대 교회가 결국 개혁의 대상으로 전락되었다. 이대로 지나갈 수 없다는 공감대가 형성되면서, 구체적인 개혁의 방법을 찾고 있다. 매우 고무적인 일이지만, 무엇보다 개혁의 필요를 인정하고 있는 현대 교회는 5세기 전의 상황과 매우 다른 형편에 처하여 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교회 밖에서 우리를 향해 던지는 비평의 목소리가 매우 크다. 사실 그들의 소리를 완전히 무시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지만 먼저 그들의 관점에 대한 현명한 분석을 필요로 한다. 그들의 주장의 기독교에 대한 진리와 동떨어진 “나의 생각” 또는 “나의 종교관”에 입각한 것이라면, 분명 그들은 윤리적이며 도적적인 접근방법이란 한계선을 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의 개혁은 성경의 진리이다. 성경은 영적인 관점에서 성도와 교회의 윤리와 도덕적 원리를 가르친다.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와 개념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임에 틀림이 없다. 교회는 세상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세상 사람들의 자율적인 주장을 따르거나 그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개혁을 위하여 어떤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할까? 저명한 교회 지도자들일까, 아니면 교회를 사랑하는 평신도들일까? 신학을 깊이 연구한 학자들일까, 아니면 목회 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목회자일까? 500주년을 맞아 교회는 두 가지를 결단해야 한다. 하나는 ‘성경적 교회론’이 분명하게 세워지는 것이다. 교회는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하며 서로 자신의 생각과 경험을 드러내려는 유혹을 겸손하게 접어야 한다. 모두가 성경의 가르침 앞에 머리를 숙여야 한다.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기 위해서 성경을 함부로 인용하는 오류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구속의 역사를 이끌어 가시는 과정 속에서 교회를 세우신 하나님의 뜻이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성령께서 이끄시는 교회의 모습과 역할에 대한 가르침을 힘써 배우고 공유해야 한다.
우리가 결단해야 하는 다른 하나는 ‘현대 교회의 현주소’를 분명하게 파악하는 일이다. 개혁이란 큰 소리를 내며 데모하거나 겉치레로 덮어진다고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개혁은 함께 문제를 파악하고, 함께 문제의 심각성을 인정하고, 나아가서 교회가 세상의 소망이 되는 자리를 흔들림 없이 지킬 수 있는 방법을 함께 겸손하게 배우고 실천해야 한다. 21세기를 맞은 개신교회의 현재 상황이 어떠한가? 성경을 인간이 기록한 문학작품이라고 주장하는 자유주의 신학이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기독교를 상대적인 종교로 여기며 타종교와의 적극적인 대화와 화합을 주장하는 다원주의가 판을 치고 있다. 십자가의 고난이 기초된 복음을 배격하고, 물량주의와 성공주의, 그리고 기복신앙을 신앙의 중심에 두어야 한다는 가르침이 환영을 받고 있다.
500년 전과 비교해 보면 성경적인 기준에서 심히 동떨어진 모습이다. ‘현대 교회의 현주소’를 파악하는 일은 ‘성경적 교회론’을 재확인하는 것보다 더욱 힘든 숙제이다. 만일 현대 교회가 처한 문제점에 대한 인식을 함께 못한다면, 우리에게 주어진 개혁의 기회는 물거품으로 사라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먼저 작은 것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분명한 문제의식으로부터 기인된 개혁정신을 지닌 개인이 먼저 변하는 것이다. 나아가서 개교회가 성경적 원리를 회복하고 변화하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루터와 같이 그 결과를 하나님께 맡기고,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covenantcho@yaho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