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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500주년

- 무엇에 관심을 기울일까? (2)

조진모 목사 (필라델비아한인연합교회)

미래 - 개혁의 목적

“개혁”이란 단어가 지닌 의미를 생각해보자. 일단 개혁을 시행한다는 것은 과거에 잘못된 것을 새롭게 뜯어고치고 시정한다는 것이다. 오랜 시간 되풀이를 하면서 익숙해져있는 관행을 개선한다는 말은 누구에게나 점수를 얻을 수 있다. 아무런 생각 없이 대하던 대상을 잘 길러진 비판력을 가지고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개혁”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외치는 내용이 매우 유사하다. “썩었다!” “부패했다!” “타락했다!” 요즈음 정치, 사회, 직장, 기관은 물론 교회 안에서 많은 사람들 사이에 회자되고 있다. 결국 “개혁”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다는 것은 미래라는 시점에서 현재를 평가한다는 것이다. 지금 이 상태로 미래를 맞을 수 없다고 확신하는 것이다. 비록 현재의 상태는 미흡하나, 미래에는 반드시 개선될 것을 믿는 것이다. 미래에 대한 신념으로 채워진 마음을 가진 자들은 개혁을 단행한다. 그들을 움직이는 것은 노력의 열매가 반드시 이뤄질 것이란 사실을 의심하지 않는 것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불가능할 것이라는 패배의식이나, 결국 모든 것이 헛수고일 것이라는 부정적인 생각, 그리고 결과에 대해 기대감이 시도해보려는 요행주의는 결코 개혁을 불러올 수 없다. 개혁은 미래를 분명하게 바라보는 눈이다. 남의 눈에는 전혀 보이지 않지만 자신에게는 너무도 선명하게 보이는 바로 그것을 잡으려고 힘 있게 달려 나가는 것이다. 개혁의 원동력은 미래로부터 얻는 것이다. 개혁자는 쉽게 지치지 않는다. 지속적으로 미래라는 시간을 향해 달릴 뿐이다. 현재의 상태가 절망적일수록 더욱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 “개혁”의 키워드가 “변화”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등을 돌린 채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는 것이 아니다. 현재 있는 것을 변화시켜 새로운 미래를 맞이하는 것이다. 개혁은 새 땅을 개간하여 집을 짓는 것이 아니라, 쓸모없는 상태로 세워져 있는 집을 대대적으로 수리하고 보수해서 멋진 집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렇다면 교회의 개혁도 미래 주도형이 되어야 할까? 그렇다. 개혁 정신은 성경이 가르치는 믿음의 원리와 유사하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히브리서11:1). 뚜렷한 목적이 없는 개혁은 없다. 교회 개혁이 지닌 독특성은 믿음으로 모든 과정을 진행하는 것이다. 결국 개혁을 능히 이루게 하는 힘은 현실에 대한 강력한 반감이나 매서운 비판이 아니라는 것이다. 종교 개혁은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인도에 민감한 자들이 주관하는 영적 개혁이며 신앙 개혁이다.

과거 - 개혁의 내용

교회는 계속 변화되어야 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교회가 세상을 위해 그 안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교회가 교회다워지려면 반드시 변화되는 세상에 민감해야 한다. 지속적으로 변하는 삶의 현실과 상황에서 생기는 요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교회가 세상을 떠나 존재할 수 있다는 태도를 고집하는 것은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의지를 상실하였기 때문이다. 교회는 세상에 소망을 주어야 한다.

개혁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드높다는 것은 일단 매우 고무적인 일이다. 개혁되어야 할 부분이 산재해 있음에도 이에 대해 전혀 감각조차 없거나, 어느 정도 관심은 있지만 자신의 일이 아니라고 피해하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일단 개혁적인 마인드를 지니고, 그 일은 남이 아닌 바로 나의 일이라며 책임을 다하려 한다면 매우 다행스런 일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 어떻게 그 개혁을 이룰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론에 대한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느 길을 선택해도 산 정상에만 오를 수 있다는 식의 이론은 도리어 개혁 정신을 지닌 자들을 혼동에 빠지게 한다. “개혁의 내용”에 대한 고민을 과정을 거치지 않고 성급하게 개혁의 필요성에 대한 매우 거친 목소리를 내는 경우가 있다. 물론 예외도 있지만, 주로 “나의 방식”을 고집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만일 자신의 생각을 쉽게 굽히지 않는 독선적인 성격을 지닌 자에게 “나의 방식”을 주장하도록 내버려 둘 수 없다. 이는 개혁의 가능성을 포기하는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개혁은 변화를 동반한다. 삶의 경험과 가치관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이뤄야 하는 상황 속에서, “나의 방식”은 매우 심한 갈등을 유발시키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다. “나의 방식”은 또 다른 “나의 방식”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개혁에 대한 목적과 열정을 공유한다고 하여도, 방법론을 제대로 선택하지 못한다면 스스로 개혁을 포기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특히 교회의 개혁을 주장하면서 “나의 방식”을 고집하는 경우라면 아예 개혁을 포기하는 것이 좋다. 잘못된 개혁을 시도한 결과, 끊임없이 개혁의 대상으로 남아있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교회 개혁에 반드시 필요한 내용은 어떤 것일까? 성경이 지시하는 교회의 모습을 회복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하여 자신이 원하시는 교회의 모습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하시고 지시하셨다. 그가 교회의 청사진을 소유하고 계신다. 이 지상에 존재하는 교회는 하나님의 디자인 속에 지어져가고 만들어져가져 간다. 교회 개혁을 위한 내용은 규정되어 있다. 성경적 교회의 모습을 기준으로 정하게 되면, 현재 변형되고 망가진 것이 보일 것이다. 이것이 교회 개혁의 내용이다. 교회의 개혁은 미래적이다. 그러나 무조건 미래를 향해 달려가는 것이 아니다. 특히 “나의 방법”이란 도구를 함부로 사용하며 성취감을 누리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과거로 돌아가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과거란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진 시기와 말씀대로 세워진 초대교회가 역사적 흔적을 남긴 시간을 가리킨 것이다. 교회 개혁은 반드시 교회의 진정한 모습을 제시하고 있는 성경의 지시를 받아 행해져야 한다.

현재 - 개혁의 현장

개혁은 현실적이어야 한다.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라는 교회 개혁의 모토를 잊지 말아야 한다. 이미 개혁이 되었으니, 이제 개혁을 중단하여도 무관하다는 생각을 버리라는 것이다. 개혁의 열매가 있다면, 더욱 개혁을 이루기 위해 쉬지 말고 정진하라는 것이다. 개혁은 개인의 소신과 희생을 동반하지만, 무엇보다 하나님의 의지가 무엇인지 이해하는 것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을 만드신 후, 그 모습이 매우 아름답다고 감탄하셨다. 우리는 감탄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통해서, 타락한 이후의 상태로 인해 아파하시는 마음도 함께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의 형상으로 인간을 만드신 그가, 죄로 오염된 우리의 모습을 바라보시는 두 눈을 기억하여야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흘린 피 값으로 주신 교회가 본질로부터 멀어져있는 상태를 염두에 두고 염려하시는 그 분의 아픔에 동참하여야 한다.

교회의 개혁은 그 자체가 생동감으로 승화되어야 한다. 일을 맡은 자들은 개혁의 현장에서 일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개혁이 하나님의 일이기에, 개혁의 현장은 곧 하나님의 사역하시는 현장이기 때문이다. 개혁의 주체가 누구인가? 과연 하나님이 주도하시는가? 라는 고민과 이에 대한 분명한 답을 지녔다면 개혁의 현장에서 더욱 담대하여질 수 있다. 마르틴 루터가 1517년에 종교개혁의 횃불을 들었다. 그가 기독교 역사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던 개혁의 현장에서 지녔던 그의 태도는 어떠하였을까? 그는 결코 남다른 강심장을 가진 자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사람들의 절대적인 호응이 있었기 때문에도 아니었다. 그는 개혁 현장에서 일하시는 하나님께 모든 상황과 미래를 맡겼다.

그의 마음은 비교적 단순했다. 그의 바라보았던 교회의 현실이, 성경이 가르치는 교회의 모습과 달랐다. 16세기 교회의 개혁은 한 개혁자가 하나님께 드린 한순간의 헌신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었다. 그와 같은 생각을 가진 자들이 생겨났고, 결국 운동의 형태로 번져갔다. 개혁자들의 배경과 관심은 조금씩 달랐지만, 그들은 개혁의 현장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일꾼이란 정체성을 잃지 않았다.

개혁자들은 “개혁이 필요한 교회”라는 거부할 수 없는 현실 너머로 보이는 “개혁된 교회”를 실현하기 위하여 미래를 향해 쉬지 않고 달렸다. 그러나 그들은 과거라는 시제를 무시하지 않았다. 초대교회를 세우시고 이끄시며 현장에서 일하셨던 하나님께서 계속 교회를 개혁하신다는 확신 때문이었다. 개혁의 현장에 있는 모두는 자신의 역할이 “조연”이란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조연의 역할은 “주연”이신 하나님이 드러나도록 하는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covenantcho@yah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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