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수 목사 (알칸사 제자들교회)
5. 입맛에 맞는 위로-동냥젖 현상
사막 광야 같은 이민생활, 풍랑 많은 인생의 밤에 그 풍랑을 밟고 찾아오실 주님을 만났는가? 그 주님 안에서 인생의 분명한 답을 가지고 있는가? 이렇게 질문해보면 대개 다음과 같은 상황설명형의 단답을 말한다. ‘나에게 영적인 것을 말하지 마세요, 살아 있음의 순간순간이 고통입니다’라고 말한다. 잔뜩 고통과 절망에 짓눌린 채로 ‘아프다’고 말하며 그 아픔에 대한 위로만을 찾아 피하기에 급급함을 본다. 삶속에 고통의 풍랑이 있을 지라도, 이를 섭리가운데 허용하시며 찾아와 주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뜻에 대해서는 지극히 무디어 있음을 보게 되는 것이다. 이를 더욱 재촉하는 일들이 있는데, 오늘날 인터넷 문명 속에서 동냥젖에 의지하는 신앙생활이다.
강단의 말씀이 하나님의 음성
인터넷 사이트에서 모유를 사고파는 ‘동냥젖’이 세간에 알려졌다. 단백질과 무기질이 풍부하며 면역력을 높이고 소화 흡수에 좋은 모유를 인터넷에서 구입해 먹이는 일들이 엄마들에게서 성행한다는 것이다. 위험한 행동이다. 바이러스 감염 등에 대해 검증되지 않은 것이 대부분이어서 면역력이 취약한 신생아들에게는 한층 더 위험하다. 마찬가지로 신앙의 세계에도, 말씀의 진지한 배움 없이 인터넷 사이트 등에서 마구잡이로 설교를 선택하거나 다운 받아 듣는 설교동냥 행위가 성행하고 있는 것이다. 영적건강에 유익하지 못함은 불을 보듯 뻔한 것이다. 예배 중에 들려지는 말씀이 하나님이 나에게 말씀하시는 음성으로 들려져야 회복이 일어난다.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한 말씀이 나를 지도해야 한다. 그러나 동냥젖과 같은 말씀에 익숙해진 이들에게 강단의 설교는 여러 가지 이론 중에 하나 정도 취할 수 있는 취사선택지의 한 부분일 뿐이다. 강단에서 들려지는 말씀에 무엇보다 간절한 반응이 일어나며 이 말씀이 회복되어야 한다.
6. 죄의 회개와 책망이 있는 예배
회개를 통하여 진정한 회복의 역사를 기대할 수 있다. 교회 안에 들어오는 자마다, 주 예수의 십자가의 보혈이 그 위로 쏟아지는 예배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예배를 드리면, 철저한 회개의 역사와 회복의 역사가 있어 생명을 얻어 기뻐하는 잔치와 같은 예배를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 회개가 없는 예배는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예배는 하나님께 나아오는 것이고, 회개는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것이다. 하나님께로 방향을 바꾸어 돌이키는 것이 회복이다. 하나님께서 더러운 것을 씻어 주시고, 가락지를 끼워주시고, 새 옷을 입혀 주시고 아버지 집에 돌아왔다고 잔치를 베풀어 주시는 것이 예배이다.
회개가 회복과 축복
오늘날 예배가 무너졌다고 말할 때, 구약의 역사 가운데서 발견하듯이 회개 없는 예배, 감정의 기쁨을 유도하는 예배가 많음을 보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죄의 심각한 고민과 회개 없이도 하나님께로 올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몰라도 너무도 모르는 것이다. 마음이 상한 자를 하나님이 찾고 계심을 기억해야 한다. 회개의 상한 심령이 주님을 온전히 만나게 된다, 진정한 변화는 회개에서 시작한다. 회개를 통해 회복을 경험한다. 회개가 없는 예배, 하나님께로 진실되게 돌이킴이 없는 예배, 아무런 열매도 기대하기 어려운 형편에 직면하게 된다.
7. 신앙의 편리주의 현상-세속화
일주일에 한번만 교회가면 되지 않느냐, 꼭 교회에 가야만 예배가 되느냐,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시지 않는가? 라는 편리주의가 일반화되어 가는 것을 본다. ‘예배는 하나님을 사랑하니까 드려지는 것인데, 사랑은 시간 떼우기가 아닌데,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드려지는 예배가운데 은혜가 있는 법인데, 주일은 주님을 온전히 예배하도록 정하신 날과 시간인데...’ 하나님 사랑이라는 기본을 빼놓고 드리는 예배가 범람한다. 사모하지 않으니 은혜가 없다. 결국, 은혜 받지 못하는 자신을 타당화 시키기 위해 교회의 다른 제 문제들을 핑계하거나, 과거에 나도 은혜를 입을 때가 있었다며 추억의 신앙으로 속히 전향하는 것을 보게 된다.
아마 조금 더 편리주의가 진행되면 후에는 예배하는 처소도 필요없다는 예배당무용론에 도달할 것이다. 극단의 예일지 모르지만, 너무나 사람이 모이지 않으니 예배당에서 유행가 가수의 쇼가 펼쳐지든지, 술과 재떨이를 두고 예배하는 교회도 생기지 않겠는가? 아니면, 아예 술집에서 예배드리는 일을 시작할지도 모르겠다. 정말 그렇게까지 되기 전에 주님이 오셔야 할 것 같은데, 들려지는 말로는 서울의 어느 대형교회는 이미 초신자를 편안하게 해주기 위해서 교회당 한쪽에 재떨이를 두었다고 하니, 구별됨의 장소로서의 교회는 이미 무너져가고 있 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꼭 교회 가서 예배드릴 필요가 있는가? 편하게 편리하게 신앙생활 하라’는 것은 결코 성령의 음성이 아니다.
거룩한 부담감을 가지는 예배 성도들은 부담되는 것은 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러나 분명히 기억해야 한다. 신앙생활, 예배는 편한 것이 아니다. 예배는 시작부터 마치기까지, 그리스도의 보혈과 그 십자가를 붙잡고 회개하며 마음이 축축해서 드려지는 시간이다. 예배는 편하게 하는 게 아니다. 죄성을 거스르며 성령과 말씀이 내 영혼을 조명하며 철저히 말씀에 초점 맞추어 겔36:22-25의 말씀처럼, 영혼의 불순물이 씻겨나고, 굳은 마음이 부드러운 마음으로 변화되는 영혼이 수술 받는 구별된 시간이다. 불편할지라도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예배의 구별이 온전히 있어야 한다. 그래서 자연히 구별된 복장도 필요하다. 댄스홀에 왔는지 예배당에 왔는지 구별되지 않거나, 극장에서 영화보는 것인지 어떤 지 모를 자세로는 도저히 구별된 예배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오늘날 인터넷을 보면, 십일조나 주일성수를 강조하는 목사님을 향해 율법적이라고 공격하는 일들이 많음을 본다. 예배하는 날로 정하신 주일도 마음대로 바꾸고, 교회예배당 무용론을 주장하는 분들은 선각자처럼 대우받는 것을 보게 된다. 이것저것 편리하게 다 바꾸게 되면, 나중에는 편안하게 팬티바람으로 집에 앉아서 다 할 것이다. 망하는 세대, 타락하는 세대의 모습이다. 이 악한 세대는 참으로 믿음을 가지고 살려는 우리에게 요구한다. ‘편하게 믿어라. 뭘 그렇게 별나게 신앙생활 하느냐고 말한다. 적당히 섞여 살아라’라고 말한다. ‘다양성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말씀대로 지키자고 하면, 율법적이라고 말한다. 그 내면속 깊숙한 곳에 하나님의 원하시는 신앙과 멀어지게 하는 사단의 소리가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신앙은 편리주의로 하는 것이 아니다. 신앙은 하나님의 뜻을 구별하여 악한 세대를 거슬러 올라가 나의 기쁨이 아닌 하나님의 기쁨과 영광을 구하는 것이다. 편리하고 편한 것만이 발전과 성숙은 아닌 것이다.
맺음말
종교개혁은 교회의 개혁을 의미한다. 교회의 존재목적은 예배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교회개혁의 최종적인 목적도 온전한 예배의 회복에 있다 하겠다. 이러한 참된 예배의 회복을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목회적인 경험을 토대로 몇 가지를 정리해 보았다. 무엇보다 교회의 존재 목적인 예배를 온전히 회복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야 한다. 이를 위해 눈에 보이는 교회, 내가 섬기는 교회가 분명해야 하며, 정한 시간 정한 장소에서 주님을 찾고 예배해야 한다. 그 섬기는 교회가운데 담임목회자로부터 들려지는 말씀이 하나님의 음성으로 영혼에 증거 되도록 사모하며 기도해야 한다. 이것이 광야 같은 인생길에 나의 벧엘이 분명한 복된 신앙생활의 첩경이요, 예배가 회복되는 가장 기본적인 내용들이다.
형식적인 예배를 탈피하여 전적으로 하나님 중심의 예배를 드려야 한다. 감정주의 신앙을 벗어나 오직 말씀으로 드리는 예배여야 한다. 많은 기계문명 속에서 입맛에 맞는 위로를 던져주는 동냥젖 현상에 매몰되지 않아야 한다. 진실로 회개와 책망이 드러나는 예배, 신앙의 편리주의를 극복하고 거룩한 부담감을 가지고, 하나님만을 예배하는 그런 예배자가 되어야 한다. 예배는 축복이다. 예배 잘 드리는 교회가 좋은 교회이다. 예배가 무너지면 교회도 삶도 무너지는 것이다. 참으로 예배가 온전히 회복되어야 한다. 이것이 교회가 사는 길이다. 이것이 종교개혁자들이 꿈꾸고 소망했던 주님이 기뻐하시고 영광 받으시는 가장 복된 일이 아니겠는가? davidnjeon@yaho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