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평우 목사 (로마한인교회)
60년대는 심히 궁핍했던 시절이었습니다. 그 시절, 농촌마을, 가난한 성도 50여명이 모이던 교회에 출석했습니다. 그런데도 성도들 간에 얼마나 사랑이 많고 애틋했는지 모릅니다. 구역 예배 후 찐 고구마를 먹으면서도 서로 헤어지기 싫어 계속 신앙 얘기로 꽃을 피우곤 했습니다. 먹을 것이 조악해도 개의치 않았습니다. 그저 함께하는 것이 행복하고 즐거웠습니다. 우리는 그런 신앙생활을 해왔는데 어디서 잘못되었는지 지금은 사랑이 식어 버렸습니다. 교회는 풍성해지고, 성도의 수가 엄청나게 많아졌는데 정작 성도간의 애틋함은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복을 받으면 사랑이 더욱 증진되고 더욱 관계가 정겨워야 할 텐데 말입니다. 오히려 현대교회는 전에 없던 불신과 반목이 빈번해졌습니다. 가난할 때, 우리의 기도는 물질의 축복을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기도 응답으로 교회는 왕성하게 되었고 세계에서 그 유래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부흥하였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자본주의에 발생에 대해 심층 있게 연구한 독일의 막스 베버(Max Weber 1864-1920)는 그의 “책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개혁자들의 사상이 현대 자본주의를 형성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보았습니다. 종교개혁 이전에는 거룩한 삶을 도모하는 길은 종교인이 되는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거룩한 삶을 위해 너도나도 성직자의 길을 지원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깊이 연구한 개혁자들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칼뱅은 잠22;29절, “네가 자기의 일에 능숙한 사람을 보았느냐? 이러한 사람은 왕 앞에 설 것이요, 천한 자 앞에 서지 아니하리라.” 이 말씀을 중요하게 해석했습니다. 개혁자들은 정직하고 합법적인 방법을 통한 부의 창출을 선으로 보았습니다. 고로 돈은 악하다는 중세의 관념을 뒤엎어 버렸습니다. 이런 사상은 당시로서는 혁명적 발상이었습니다. 개혁자들은 부지런하고 검소한 삶을 권장했고, 대신 방탕과 게으름 등을 악한 것으로 경계했습니다. 이런 사상이 모든 기능인, 상업 종사자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됨으로 놀라운 자본주의가 형성되었다고 베버는 갈파했습니다. 그 결과 직업의 귀천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비록 그 직업이 하찮은 것이라도, 이것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은사다, 나는 이 직업을 하나님 앞에서 근면하고 성실하게, 그리고 정직하게 행하겠다는 결심을 가지고 실천하면 그것이 바로 ‘성직’이라고 칼뱅은 가르쳤습니다. 이런 가르침을 통해 자본은 상상할 수 없는 발전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특히 불란서의 위그노들은 칼뱅주의를 신봉하는 사람들로 대부분이 기술 노동자,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일에 자부심을 가지고 성실하게 일했습니다. 그리고 검소한 삶을 지향했습니다. 이들로 인한 사상의 전염은 구라파를 자본주의의 총아가 되게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자본의 축척과 신앙은 어떤 함수관계가 있을까요?
이 부분에 대해 막스 베버는 수도원운동을 그 예로 들고 있습니다. 서방 수도원운동의 효시가 된 베네딕트(Benedict480-547)는 6세기 초에 로마의 근처 수비아코(Subiaco)의 동굴에 들어가 3년 동안 기도를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과 12개의 수도원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주변의 성직자들의 시기로 529년에 몬테카지노(Montecasino)로 옮겨갔습니다. 그는 거기서 베네딕트 규범을 만들었습니다. 그것은 절대복종, 침묵, 정주(한 수도원에서 죽을 때까지 옮기지 않는 것), 겸손, 기도였습니다. 그리고 표어가 “기도하고 노동하고 독서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들은 일과가 노동하고 기도하는 것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저들은 수도원에서 노동을 통해 자급자족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의 수가 많아지니 노동량도 많아지고, 재산을 헌납하는 사람들이 증가하였음으로 재물은 날로 증가했습니다. 그것은 분명 축복이었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재물이 많아지니 수도사들이 자신도 모르게 게으르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열심히 일해야 할 목적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물론 수도원을 창설한 베네딕트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어느 정도 규범이 지켜졌으나 시간이 갈수록 그 정신은 해이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불란서의 클리니 수도원은 베네딕트의 수도원 정신을 회복하기 위해 11세기 개혁의 기치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클리니 수도원 개혁이 실패하였다고 보고 분연히 일어난 시토 수도회 원장 베르나르도(Bernardo Clairvaux1091-1153)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자신이 생존하는 동안 맹렬한 부흥을 이루었으나 그의 사후 2백년이 지나자 원 위치되고 말았습니다. 그 원인을 살펴보면 한 마디로 물질 때문이었습니다. 자체 노동과 경작의 원칙이 수도원의 거대한 부를 축척하였기 때문입니다. 수도원은 대 지주가 되었고, 수도사들은 더 이상 노동하고 경작하며 금욕적인 삶 내지는 청빈한 삶을 살 이유가 없어졌습니다. 즉 막대한 토지에서 나오는 수입으로도 풍요롭고 편안한 삶을 누릴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고로 저들은 그 많은 물질을 소모해야 할 고민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저들은 결국 교회당을 아름답게 꾸미는 일에 투자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수도원 내에 있는 교회당의 벽과 천장을 황금으로 채색하였습니다. 교회를 마치 왕의 화려한 궁전 같이 치장했습니다. 카시노의 베네딕트 수도원 내의 교회당을 방문하였다가 그 화려함에 크게 놀랐습니다. 벽과 천정, 그리고 모든 기물들은 온통 금으로 채색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신다면, 아니 수도원을 창시한 수도사가 본 다면 필경 크게 실망할 텐데 말입니다. 물질이 풍성하다보니 판단도 흐려지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만드는 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고 여겼습니다. 수도원을 만든 이의 뜻도 동일할 것이라고 치부했습니다. 참 아이러니 한 일입니다. 가난할 때는 타는 목마름으로 돈을 욕망하여 기도했는데 응답을 받고 물질이 풍성하게 되자 돈의 노예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는 사실입니다. 거기서 헤어 나오고 싶지만 돈의 달콤함을 한번 맛보았기 때문에 나올 수 없는 상황이 한국교회의 현재 실상이 아닌가 합니다. 돈 맛을 거절하지 못함으로 나타난 현상 가운데 하나가 형식적 신앙입니다. 겨우 주일 예배로 때우고 기도는 요식행위로 대체해버립니다. 간절했던 기도는 수십 년 전에나 찾아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기도 시간보다는 회의와 토론하는 시간이 눈에 띄게 많아졌습니다. 이런 일들은 교회를 조금씩, 조금씩 병들게 만드는 일이 아닐까 여겨집니다. 요한 웨슬레는 처음 받은 월급을 평생 유지했다고 합니다. 월급이 올라갈수록 그만큼 떼어 구제나 선교비로 지불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시대 그런 길을 가기에는 현대인은 누리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편리함을 포기함이란 어쩌면 목숨을 포기하는 것처럼 고통스런 일입니다.
그러면 이 시대 해결방안은 무엇일까요?
로마의 곳곳에 기원전부터 세워진 다이애나 신전이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그 신은 인간에게 풍요를 가져다주는 여신입니다. 구약의 바알이나 불레셋의 아스다롯도 동일한 신입니다. 그 신은 다산의 상징으로 가슴에 유방이 주렁주렁 달려있습니다. 우리는 그 신의 포로에서 헤어 나와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쉽지 않습니다. 이 세상의 신은 현대인을 무한 경쟁으로 오염시켜버렸기 때문입니다. 도태되는 자는 죽는다, 반드시 너는 성공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너는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반드시 성공 자가 되어야 한다고 소리칩니다. 그것은 주님의 음성이 아닌데도 신앙인들도 그 음성에 취해 비틀거리고 있습니다. 크고, 많고, 거대한 것에 절대적 가치관을 둡니다. 주님은 한 사람, 작은 것, 연약한 것을 중요하게 여기시는데 말입니다. 우리는 크고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외쳤던 라오디게아 교회를 깊이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성공한 교회였지만 주님으로부터 온갖 난도질을 당한 유일한 교회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시간부터 영적 회복을 위해 골똘해야합니다. 이런 부문에 고민하는 목회자들이 많아질 때 한국교회의 쇠락은 늦춰질 수 있을 것입니다. 다니엘 4장에, 느브갓네살 왕이 꿈을 꾸었다고 나옵니다. 그 꿈은 그를 번민케 만들었습니다. 다니엘은 그 꿈을 해석하기 위해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꿈은 교만한 느부갓네살 왕을 하나님께서 심판하시기 위한 싸인이었습니다. 다니엘은 그 꿈을 해석하면서 심판을 피할 수 있는 길을 권고했습니다. 그것은 이 시대 우리가 깊이 숙고해야 할 말씀입니다. “그런 즉 왕이시여, 내가 아뢰는 것을 받으시고 공의를 행함으로 죄를 사하고 가난한 자를 긍휼이 여김으로 죄악을 사하소서. 그리하시면 왕의 평안함이 혹시 장구하리이다”(단4;27).
이것이 우리가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여 실행해야 할 일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러나 한번 물질에 취한 상태에서 벗어나기란 너무 힘들다는 것을 역사는 증거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카타콤베 안에서도 물질은 위력을 떨치고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자는 이름도 없는 묘지이나 부자는 넓고 화려한 가족묘를 소유하고 있음을 볼 수 있게 됩니다.
누가 과연 물질의 탐욕을 절제할 수 있을 것인가?
성도는 철저하게 청지기 정신을 회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 것이 아니고 우리는 관리자일 뿐이라는 철학 말입니다. 이런 정신으로 성프랜시스나,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 또는 왈도는 물질을 포기하였습니다. 물질의 유혹이 얼마나 큰가를 알았기에 그것을 포기하고 알몸으로 주님을 따르기로 결심하였던 것입니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여 이런 고민에 동참하는 목회자들이 많이 일어날 수 있다면 진정 개혁의 불씨는 붙여지게 되리라고 믿습니다. 특히 목회에 큰 은사를 받은 분들이 풍요가 주는 달콤함을 분연히 거절할 때 한국교회의 복음의 여명은 찬란하게 비추게 될 것입니다. chiesadiroma@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