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진모 목사 (필라델비아한인연합교회)
근래에 한국의 개척교회가 3년 안에 문을 닫는 확률이 90%라는 보고서를 접하였다. 어떤 이유에서든지 교회가 지속적으로 세워지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일이라 생각한다. 그렇다면 많은 교단과 이에 속한 교회의 수가 많아지는 것 자체가 곧 복음의 확장의 증거라고 볼 수 있을까? 반드시 그렇지 않다. 교인들의 절대적인 수가 감소되는 상황가운데서, 수평이동이나 교회의 분열은 도리어 교회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를 더하게 할 뿐이다. 안타까운 것은 요즘은 “교회는 이래야 한다!”라는 진지한 성경적 고민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교회론은 21세기 교회의 가장 큰 약점 중 하나이다. 질문: 교회란 어떤 곳인지 바로 이해하기 위하여 성도들이 반드시 알아야 할 내용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 교회의 분리 사도의 신앙을 바탕으로 시작된 초대교회는 성경 해석과 신앙생활에 대한 다양한 견해들과 함께 성장하였다. 복음이 전달된 이후 교회가 세워지는 과정 속에서, 각 개인 또는 지역이 지닌 종교성이나 사상을 버리는 과정이 그리 쉽지 않았다. 그렇기에 교회는 더욱 성경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끼게 되었다. 성경이 가르치는 진리의 잣대에 나름의 생각과 이론을 제한 받음으로, 더욱 보편적이며 객관적인 신앙의 모습을 갖추어갔다. 물론 교회의 전통도 이런 과정을 걸치면서 세워졌다.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초대교회가 지녔던 다양한 갈등을 통하여, 자신들이 생각하는 교회의 모습이 옳다고 주장하는 목소리가 제법 컸었다는 사실을 접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갈등은 진리를 규정하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한 지붕 아래 살아가던 성도들의 다른 주장들이 결국 한 목소리를 내는 일을 반복한 것이다. 초대교회는 이런 과정을 통해서 더욱 성숙해질 수 있었다. 그러나 초대교회가 로마 황제들의 박해를 잘 이겨내고 종교의 자유를 얻은 후, 교회가 분열되는 아픔을 경험하게 되었다. 상이한 점들을 보완해 나가며 하나의 교회로 성장하던 중에 분파주의자들에 의하여 두 교회로 분명하게 갈라진 것이다. 나름대로 세운 신앙의 기준을 가지고 “교회는 이래야 한다!”라고 주장하는 강경파들이 힘을 합쳤던 것이다. 이 운동을 지도한 인물은 도나투스(Donatus) 감독이었으며, 4세기부터 5세기까지 지속되게 그의 사상을 따르던 자들을 도나투스파(Donatist)라고 부른다. 도나티스트들은 박해 때에 신앙을 지키지 못한 자들을 변절자라고 부르며 노골적으로 비판하였을 뿐 아니라, 이들이 교회로 돌아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나아가서 북아프리카 지역에서는 그들을 색출하는데 힘을 썼는데, 심지어 폭력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그들이 지녔던 독특한 교회관 때문이었다. 그들에게 교회의 생명은 거룩함에 있다. 교회는 오직 가시적인 교회, 즉 눈에 보이는 거룩한 사람들만 모이는 교회밖에 없다. 자신들만 유일하게 참된 교회라는 도나티스트들의 주장은 무엇을 암시하였는가? 기존 교회는 거짓 교회라는 것이다.
■ 교회의 일치 자신들의 주장을 굽히지 않고 당당하게 분열의 길을 걸어갔던 도나티스트들의 영향은 어거스틴의 사역지였던 북아프리카의 히포에도 미쳤다. 391년, 그가 본격적으로 사역을 시작하기 훨씬 전부터 히포는 두 교회 사이의 갈등이 심화되어 있었다. 불행하게도 그의 사역이 시작하는 시기에는 같은 도시에 자리 잡은 두 교회 사이의 대립이 더욱 노골화되기 시작하였다. 그는 교회를 책임지고 있는 감독이었다. 교회의 분열로 인한 여러 가지 파장에 대하여 결코 침묵할 수 없었다. 지속되는 어려운 상황이 그로 하여금 도나티스트에 대항하는 다양한 글을 작성하도록 만들었다. 나아가서 강압적인 방법으로 그들을 회심시키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의 고민의 핵심은, 성경적인 교회의 모습을 변증하고 가르치는 것이었다. 도나티스트들은 교회는 오직 거룩한 사람들만 모이는 교회라고 주장한 것에 반하여, 어거스틴은 자상 교회는 결코 완벽한 사람들이 모인 곳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교회는 알곡과 가라지가 함께 섞여있는 곳이다. 죄인이 전혀 없이 무흠한 교회, 즉 오직 거룩한 자들만이 모여 있는 교회가 존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교회는 의인과 죄인이 혼합되어 하나의 교회로 존재한다. 교회는 죄를 용서받은 자들이 모인 믿음 공동체이며, 하나 되게 하시는 사역의 주체는 성령이시다.
이런 의미에서, 어거스틴은 성령 안에서 하나인 교회를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로 구분하였다. 가시적 교회란, 문자 그대로 눈에 보이는 지역 교회이다. 이 안에는 구원을 받아 그리스도에게 속한 성도와 그렇지 못한 자연인 모두 포함되어 있다. 비가시적 교회란 누가 참된 신자인지 하나님만 아시는 선택을 받은 자들을 통칭하는 것이다. 세상의 종말이 되면 ‘참된 교회’가 분명하게 구분될 것이다. 도나티스트들은 자신들의 신앙적 우월을 드러내면서 교회의 일치보다 순결을 더욱 강조하였다. 이에 반하여 어거스틴이 가장 중요하게 다루었던 사상은 아직 연약하고 부족한 자들의 일치된 모임으로서의 교회의 모습이다. 교회가 하나가 될 수 있는 근거는, 죄인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어거스틴이 히포에서 활동하던 초기에 도나티스트 사제였던 막시미누스가 교회에 속한 성도들에게 세례를 베푼다는 말을 들었다. 어거스틴은 그의 행동을 비난하면서 직접 편지를 썼다. 그는 “그들의 전혀 다른 성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찢어놓는 행위”라고 지적한 것이다.(“어거스틴의 편지”, 23.5) 그 당시 어거스틴이 매우 흥분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의 관심이 신학적 논쟁 이상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실제적으로 도나티스트들의 잘못된 교회관은 교회는 물론, 성도 사이의 관계 나아가서 가족 사이의 관계를 망가뜨리는 요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십자가로 선물하신 성도간의 평화와 사랑이 소명되고 있는 상태를 무척 아파했던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의 사역의 열매가 보이기 시작했다. 많은 성도들이 스스로 ‘참된 교회’라고 주장하는 거짓된 교회를 떠나, 그리스도의 피로 값 주고 사신 진정 ‘참된 교회’를 찾아온 것이다.
■ 참된 교회의 세례 도나티스트들이 박해 기간 동안 배교하였던 자들을 정죄하면서, 가장 강조하였던 것은 그들의 거룩함의 상실과 이에 따르는 영향이다. 그들의 주장은 매우 실천적이었다. 거룩함을 상실한 성직자가 베푼 세례는 모두 무효라는 것이다. 아울러 성도가 교회로 되돌아오려면 반드시 세례를 다시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어거스틴의 주장은 단호하였다. 성례의 유효성은 이를 베푸는 성직자의 거룩함의 유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께서 베푸신 것이기 때문이란 것이다. 이러한 성경의 해석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참된 교회의 표증으로서의 거룩함의 근원은, 결코 인간의 어떤 신앙의 상태가 될 수 없다. 그것은 오직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이시다. 이는 도나티스트가 문제를 삼았던 세례에 대한 문제를 푸는 열쇠가 되기도 하였다. 세례의 타당성 여부는 오직 교회의 원천이신 그리스도 한분에게서만 찾을 수 있다. 어거스틴이 400년경에 작성한 “세례에 관하여: 도나트스트들에 반대하여”라는 소책자에 그의 사상이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 당시 어거스틴이 도나티스트들의 글을 엄청나게 많이 읽었으며, 그들에 대하여 해박한 지식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저들은 분명히 교회의 연합에 속한 자들에게 다시 세례를 베풀기 위해 애쓰며 불경건한 죄를 짓고 있으며, 우리는 하나님께서 베푸신 성례를 거부하는 죄를 범하지 않는 바른 행동을 하고 있다”(“세례에 관하여”, 1.1.). 그렇다면 ‘참된 교회’가 아닌 도나트스트 교회가 베푸는 세례는 유효한가? 어거스틴의 답은 분명하다. 그들은 교회 밖에 있는 자들이다. 따라서 그들이 베푸는 세례에서 유효성을 발견할 수 없다. 이런 배경을 두고, 구원은 교회 안에 있다는 어거스틴의 주장을 이해하여야 한다. 어거스틴은 초대교회를 마감하고 중세교회를 여는 시기에 활동했던 교회 지도자였다. 그는 자신이 교회의 지도자로서 사역하면서 힘겹게 씨름했던 신학적, 목회적 문제를 경험하면서 성경적 교회론의 틀을 잡았다. 그 결과는, 그의 사상은 향후 오고가는 세대의 교회론의 기초가 되었다.
2) 성경이 보인다 - 마태복음 14:23-30: 로마서 12:4-5; 고린도전서 12:12-13, 27; 에베소서 1:7-13, 22-23; 골로새서 1:15-20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지상에 남기신 가장 소중한 선물이다. 교회는 결코 인간에 의하여 만들어진 단체가 아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성령이 임하면서 교회가 탄생하였다. 그리스도가 머리이시고, 성도들이 그 몸을 이루며 유기적 관계를 맺고 있는 영적 기관이다.
현재 교회가 사회로부터 많은 지탄을 받고 있다. 그 교회는 ‘가시적인 교회’이다. 죄인과 의인이 함께 모여 있는 곳, 또는 구원받을 자와 받은 자가 함께 어울리는 곳이다. 결코 완전하지 않다. 만일 스스로 완전히 거룩한 모습을 취하려하거나, 타인에게 그러한 모습을 보이려하는 것은 전혀 불가능하다. 물론 겉모습으로 흉내는 낼 수 있을 수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께서 보시고 인정하실 만한 완전한 교회는 지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교회가 교회의 모습을 갖추려면, 무엇보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죄인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권속으로 변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한다. 십자가의 복음이 이해되고 받아들일 수 있던 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선택하시는 은혜를 베풀어주셨기 때문이다.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와 연합된 삶을 살아도, 아직 부패한 모습을 지닌 성도는 항상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며 살아가야 한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 교회에 등록하고 예배에 참석하며 직분을 맡아 봉사할 수 있는 특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그러나 항상 자신을 점검해 보아야 한다.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에게 속한 성도의 삶은 분명히 다르다. 자신이 ‘가시적인 교회,’ 즉 하나님이 보시기에 구원을 받은 자에 속하여 있는지, 성품과 삶의 열매를 점검해야 한다. 21세기에 들어와 주님의 교회가 많은 어려움을 경험하고 있다. 우리의 신앙의 모습을 돌아볼 수 있는 각성의 기회가 되기를 원한다. 교회는 역사의 주권자 되시는 주님께서 통치하시기에, 모든 소망이 오직 하나님께 있음을 겸손한 마음과 떨리는 입술로 고백 드린다. covenantcho@yahoo.com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