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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초대 교회 - 어거스틴 (5) - 오직 하나님의 은혜

조진모 목사 (필라델비아한인연합교회)

하나님은 구원 계획을 세우시고 성취하시는 분이시다. 창조 이후 아담의 죄로 인해 타락했던 인류를 위해 독생자를 이 세상에 보내주셨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구원을 이루셨다. 이 세상의 역사는 종말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다. 마지막 날 이후 모든 인류는 두 갈래의 길 중 한 쪽에 설 것이다. 천국과 지옥이다.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 구속 역사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분명한 두 가지 사실이 있다. 타락한 상태에 있는 인류 스스로는 결코 구원을 이룰 수 없다는 것과, 죄인이 구원을 받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하다는 것이다. 질문: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이 가능하다고 한다면,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의지와 이로 인한 책임은 어떻게 이해하여야 할까?

■ 두 인물, 두 길 어거스틴(354-430)은 사도의 신앙으로 뿌리를 내린 초대교회의 신학을 총 정리한 인물이다. 그의 신학 사상은 중세교회와 종교개혁시대는 물론, 심지어 오늘날까지도 절대적이다. 그의 막대한 업적들 가운데 후대교회에게 가장 커다란 영향력을 미치는 사상은 어떤 것일까? 아마도 그것은 인간의 원죄와 자유의지의 역할에 대하여 분명한 정의를 내림으로, 죄인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확고한 신학 전통을 세운 것이라고 본다. 이 문제는 비단 초대교회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현대교회에서 발견할 수 있는 다양한 신학적 전통과 교파의 분열의 원인을 살펴보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상이한 이해가 차지하고 있는 몫이 제법 크다. 어거스틴은 경건한 어머니로부터 선한 영향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어려서부터 어둠의 세계에 빠져 쾌락을 탐닉하기를 즐겨했다. 하나님의 은혜는 그가 자신의 자서전인 “참회록”을 써내려가면서 놓치지 않으려는 주제였다. 그를 대단한 신앙인이자 교회의 지도자로 추앙하고 있는 성도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는 내용을 주저하지 않고 써 내려갔다. 외부로 드러난 자신의 악한 행동은 물론, 그의 마음에 담아져 있었던 천박한 생각들까지도 공개하였다. 독자들에게 자신이야말로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을 수 있었다는 것을 체험한 장본인이라는 확신을 주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그가 지녔던 성경지식과 신학에 대한 이해는 당대에 버금갈만한 사람이 없을 정도로 뛰어났으나, 자신이 경험한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이 그의 신학의 바탕이 된 것이다. 어거스틴과 한 해에 태어난 것으로 알려진 다른 인물을 소개한다. 은혜에 관한 어거스틴의 신학 사상을 소개를 할 때마다 반드시 거론되는 그의 이름은 펠라기우스(Pelagius, 354-420)이다. 영국에서 태어난 후 로마에 와서 활동하면서 제법 많은 추종자들을 불러 모았던 수도사이다. 그의 삶을 높이 평가하는 사람들은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그가 하나님 앞에서 항상 최선을 다하는 금욕생활의 본을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덕적인 삶을 위해 몸부림치는 그의 삶의 모습과 신학에서 쉽게 탐지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선택한 경건한 삶에 도달하는 방편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인간의 자유의지였다는 것이다.

동 시대에 살았던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는 결국 심한 갈등의 관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나아가서 교회는 두 사람이 각각 제시하는 ‘구원에 이르는 두 가지 길’ 중에 하나만을 선택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하나는 ‘오직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라는 길이었고, 다른 하나는 ‘자유의지에 의한 인간의 선택’이라는 길이었다. 초대교회는 어거스틴의 성경해석에 손을 들어주었다. 추후 에베소회의(431년)와 오렌지대회(529년)에서 어거스틴의 은혜 중심 사상을 정통 신학으로 확인한 동시에, 펠라기우스의 신학은 이단으로 정죄하였다. 이러한 신학적 대결구도는 후대교회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중세교회가 지속적으로 고민하던 신학논쟁의 핵심이었을 뿐 아니라, 종교개혁 이후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 사이의 갈등으로 심화되었다. 결국 교회는 어거스틴과 펠라기아누스가 제시한 ‘두 가지 길’ 중에 하나를 선택하는 형태로 자리 잡은 것이다.

■ 펠라기우스 펠라기우스의 사상을 이해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가 아담의 원죄를 어떻게 해석하였는가 하는 것이다. 그는 원죄를 전적으로 부인하였다. 아담은 분명 죄를 범한 죄인이었다. 왜냐하면 그도 하나님의 뜻을 의도적으로 거부하는 행위로 죄로 단정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진정한 문제는 아담의 죄가 후대에게 전달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것이었다. 갓 태어난 어린 아이는 마치 죄를 짓기 전의 아담의 상태와 같다는 것이다. 갓 태어난 사람들에게 원죄가 없다는 것은 곧 개인이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 또는 그러한 임무가 주어졌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에게는 모두 선과 악 중에 하나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가 주어졌다는 것이다. 원죄가 없는 상태에서 태어난 후에 죄를 짓게 되니, 그 죄에 대한 책임은 본인에게 있다. 누군가 또는 무엇인가에 의해서가 아닌 자신의 자유의지로 죄를 지었기 때문이다. 펠라기우스는 인간이 선을 행할 수 있는 가능성도 이와 유사한 논리로 설명한다. 자유의지를 가지고 태어난 인간은 선을 행할 수 있다. 인간은 악한 것을 선택할 수 있는 것처럼 선한 것을 결정할 수 있는 가능성을 부여받았다. 물론 결정은 순수하게 인간 개인의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그가 이해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개념은 매우 독특하다. 펠라기우스는 인간에게 주어진 능력 자체가 곧 하나님의 은혜라고 주장하였다. 결국 그 은혜란 인간이 자신의 능력으로 죄를 피하고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살 수 있도록 받는 모든 도움을 가리킨다.

■ 어거스틴 어거스틴은 426년부터 427년 사이에 “은혜와 자유의지에 대하여”라는 논문을 작성하였다. 매우 논리적이며 풍부한 성경적 뒷받침을 담고 있으므로, 신학자로서의 면모를 엿볼 수 있는 본서는 전체 46장으로 구성되었다. 어거스틴은 인간의 원죄는 성경이 가르치는 진리임을 주장하였다. 아담이 지은 죄는 개인뿐 아니라, 온 인류에게 죄로 인한 영향을 가져다 준 것이었다. 인간은 전적으로 부패하였다. 도저히 절대로 스스로 자신의 죄를 해결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갓 태어난 어린 아이가 아무리 맑고 순진해 보여도 죄의 오염이 된 상태로 생명이 시작되는 것이다. 개인이 죄를 지을 때 죄인이 된다는 펠라기우스의 주장과 정반대로, 어거스틴은 인간은 원죄로 인하여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고 가르쳤다. 그렇다면 어거스틴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어떻게 이해하였을까? 그도 인간이 자유의지를 지녔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다. 결국 죄를 짓는 것은 자신의 의지에 근거한 행동이란 것이다. 이 부분에 있어서 많은 오해가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싶다. 성경은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부여되었다는 사실을 결코 부정하지 않는다. 원죄를 안고 태어나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사실이다. 단지 자유의지에 관계하여 어거스틴이 펠라기우스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면, 죄로 말미암아 인간의 자유의지가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인간은 자유의지를 통하여 결코 선을 선택할 수 없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아담의 죄로 인하여 자신이 인간에게 부여하신 자유의지를 도로 빼앗지 않으셨다. 어거스틴이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부여되었으며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강조한 분명한 이유가 있다. 인간은 결코 자신의 죄에 대한 책임을 피할 수 없음을 분명하게 하려한 것이다. 어거스틴은 죄로 인해 완전히 부패한 인간이 용서와 회복을 경험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설명하면서 ‘선행적 은총’ 개념을 소개하였다. 혹시 죄인이 선을 행할 수 있다면, 그것은 이미 우리의 영혼 속에서 선행적으로 일하신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란 것이다. 죄인이 선을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은 그가 이미 하나님의 은혜로 변화를 받았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이는 인간의 자유의지가 곧 선행의 ‘가능성’이라고 표현한 펠라기우스의 주장과 대조를 이룬다.

■ 상반된 구원의 길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는 신학적 논쟁에도 불구하고 결국 각자의 길을 걸어갔다. 아마도 그들은 자신들이 걸어간 길에 후대교회에 얼마나 커다란 영향을 줄 것이란 사실을 몰랐을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 교회의 역사는 선명한 두 개의 길로 나뉘어졌다. 인간의 원죄, 자유의지,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개념이 서로 다른 두 사람은 결국 인간이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느냐에 대한 상반된 주장을 낳게 하였다.

펠라기우스는 하나님의 요구에 대하여 자유의지를 지닌 인간의 선한 행위가 구원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죄와 선을 선택하는 것은 극히 개인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죄인은 선행으로 구원을 선택한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져야하기 때문이다. 이에 반하여 어거스틴은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하다고 선언한다.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지 않는 죄인의 의지와 모든 행위는 거짓될 뿐이다. 타락한 인류가 회복될 수 있는 것은, 창조 전에 선택하신 자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구원을 완성하신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다. 은혜는 죄인을 향해 무조건으로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선물이다. 죄인이 변화 받아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2) 성경이 보인다 - 로마서 3장 23-25, 11:6; 갈라디아서, 3:13-14; 에베소서 2:4-8; 고린도전서 15:10, 디도서 3:4-7

영적으로 성숙한 성도는 항상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한다. 하나님은 창조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을 자를 선택하셨다. 하나님의 시간과 방법에 따라 죄인의 삶을 청산하고 십자가 복음을 받아드리도록 삶의 정황을 주관하신다. 성도가 된 이후에도, 하나님의 자녀는 곧 천국 백성임을 알게 하시고, 나그네의 신분으로 믿음을 지키며 이 땅에서의 삶을 마치게 하신다. 최종 목적지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 자들에게 허락하시는 천국에서의 삶이다. 이 모든 것은 구원의 계획을 세우시고 주도해 나가시는 하나님의 일이다.

우리가 죄인의 신분에서 영생을 소유한 자로서 당당하게 살 수 있는 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이다. 바울의 고백과 같이 우리가 우리 된 것이 모두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올바로 깨닫는다면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하나님 앞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 것인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하게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아 그 안에 거하여 살면서 평생토록 세상과 구별된 경건한 삶을 살 수 있는 것도 오직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다. covenantcho@yah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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