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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초대 교회 - 어거스틴 (5) - 삼위일체 하나님

조진모 목사 (필라델비아한인연합교회)

“하나님은 누구인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기독교 신앙에 대한 관심을 모든 자들이 지닌 질문이다. 불신자들이 신앙의 문을 열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한다. 지성적 무신론자들이 주장하는 논의의 토대가 되기도 한다. 나아가서 이미 기독교 신앙 안에 거하는 성도들에게도 매우 중요한 질문이다. 하나님은 신앙의 대상이다. 그가 어떤 분인지를 알고자하는 열망을 지녀야 한다. 무조건 믿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그의 마음과 뜻을 따르고 순종하려면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지녀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신앙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다. 질문: 기독교가 제시하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며, 그를 유일하게 참된 신이라고 주장하는 근거가 어디에 있는가?

■ 어거스틴의 “삼위일체론” 초대 교회는 출발과 함께 경험한 다양한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대부분 교회가 확장되고 성장하면서 동반된 예상된 일들이었다. 각 문제가 생길 때마다 교회는 침묵하지 않았다. 성경적인 답을 찾아 신앙과 행동의 규범으로 삼았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전통적 교리가 형성되었다. 가장 커다란 혼동을 야기한 신학적 문제는 “하나님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이었다. 다시 말해, 초대 교회를 마감하는 시기가 되었을 때에는 성경이 가르치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잘 정리가 될 수 있었다. 어거스틴은 “삼위일체론”이란 방대한 논문을 저술하여 이 문제를 잘 정리하였다. 이 책은 “참회록”과 “신국론: 하나님의 도성”과 함께 그의 대표적 저작으로 손꼽히고 있다.

“삼위일체론”은 모두 15권으로 구성되었다. “하나님은 누구인가?”에 대한 성경의 진리를 정리한 내용을 담고 있다. 약 20년에 걸쳐 심혈을 기울여 저술한 본서는 서방교회의 전통적 삼위일체 신앙을 체계화 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물론 어거스틴의 근본적으로 니케야 신조와 일치한다. 이 책에 드러난 그의 문체와 구성이 아주 세련되어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같은 내용이 자주 반복된다는 느낌 때문이다. 그러나 자세히 읽다보면 어거스틴이 자신의 신학적 색깔을 강조하거나 드러내고 싶은 부분을 독자들에게 전달하기 위하여 크게 노력한 흔적의 일부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어거스틴은 헬라 철학에 능통한 학자였다. 그의 신학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반드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에 대한 기본적 인식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삼위일체론”의 바탕은 철학적 사고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성경에 담겨져 있는 진리이다. 그는 서두에 자신이 이 책을 쓰는 목적을 설명하면서, 이성을 잘못 사용하여 삼위일체 사상을 공격하는 자들의 이론을 반박하는 것이라고 분명히 하고 있다. 그들은 피조의 세계에 속한 자들로서, 초월의 세계에 실재하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가질 수 없으나, 마치 제대로 모든 것을 알 고 있는 듯 이론을 펼칠 뿐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지식과 상관없이 스스로 계신 분이시다. 우리가 그를 안다는 것은 자신을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한도 내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성경이 피조물에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은 어린이를 꾀는 것과 같다. 성경의 목적은 감정을 자극해서 그들이 그것을 발판으로 삼아 더 높은 것에 올라서며, 낮은 것을 버리게 만들려는 것이다”(삼위일체론, 1.1). 다시 말해 어거스틴는 성경에 근거하여 삼위일체론을 발전시켰다.

한 분 하나님

어거스틴의 삼위일체론이 지닌 특징 중에 하나는, 삼위 하나님의 본질이 하나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다. “삼위일체론”을 읽는 독자들에게 무엇을 기대하며 읽어야 할 것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삼위일체는 유일 진정한 한 분 하나님이시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동일한 본질이시라고 말하며 믿으며 깨닫는 것이 바르다는 것을 설명하겠다”(삼위일체론, 1.4). 하나님은 삼위(Triune), 즉 성부, 성자, 그리고 성령으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이시지만 모두 함께 동일한 신성을 소유하였기에 결코 ‘삼중적’(Triplex)이 아니다. 삼위 하나님은 동일한 위대성, 선, 영원성, 전능성 등을 지닌 한 분 하나님이시다.

삼위 하나님께서 한 분 되심과 동등하심을 설명함에 있어서 각 위의 구별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그들의 본질이 아닌 관계의 문제에 대한 분명한 이해이다. 간단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성자는 근원은 성부이다. 성부가 성자를 낳았다는 뜻이다. 또한 어거스틴은 성령의 ‘이중 발출’을 주장하여 성부와 성자가 성령의 근원이라고 하였다. 이로서 성부와 성자는 한 분이시고, 결국 성령도 하나의 근원을 지닌 성부와 성자와 동등하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거스틴은 한 위가 다른 위에게 ‘종속적’으로 관계하고 있음을 단호하게 부정한다. 삼위 하나님은 동일한 본질을 지니셨기에, 우리가 누리는 하나님은 세 분이 아니라 한 분이시다. “그 형상으로 우리가 지음을 받은 삼위일체 이신 하나님을 즐기는 것 이상의 기쁨이 우리에게 없으며, 그것은 충만한 기쁨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에 대하여,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 성령만으로 충족하다는 듯이 말하는 때가 있으며, 성령은 성부와 성자와 분리할 수 없기 때문에 참으로 그만으로 충족한 것이다. 그것은 성부가 성자와 성령과 분리될 수 없으므로 성자만으로 충족한 것과 꼭 같다”(삼위일체론, 1. 18). 세 가지 위격을 지닌 한 분의 하나님 안에 분리나 구분됨이 없이 상호간에 충만할 수 있는 것은 어떤 차이도 없는 그 실체가 영원히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삼위일체론”의 1권만 제대로 읽어도 어거스틴의 삼위일체론의 기본 구조를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2권부터 8권까지 전반부 역시 상세하게 읽고 이해하여야 하는 이유는, 1권에서 설명한 내용을 더욱 구체적으로 설명함으로서 그 의미를 분명히 하기 때문이다. 특히 이 부분에서 그는 삼위일체에 대한 여러 오류를 구체적으로 반박함으로서 독자들의 그릇된 생각을 교정하고 있다. 또한 어거스틴은 성경의 진리를 근거로 삼지 않는 것이 그들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임을 지적하면서 구약과 신약에 나타난 삼위일체와 관계된 성경구절을 매우 섬세하게 분석한 내용을 담고 있다. 매우 사색적이며 철학적인 내용을 기대한 독자들은 성경에 담긴 하나님에 대한 진리를 남다른 통찰력으로 풀어가는 어거스틴의 글을 통해 큰 감동을 받게 될 것이다. 성부, 성자, 성령에게 동일한 신적 속성과 행동이 있으며, 우리에게 구원을 베푸시며, 우리가 드리는 예배와 경배의 대상이시다.

삼위일체의 흔적

어거스틴의 “삼위일체론”의 또 다른 특징은 삼위일체의 흔적이 인간 안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몇 가지로 설명하는 것이다. 사실 삼위일체라는 개념 자체를 이해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수용하는 믿음이 요구된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인간의 영혼이 지닌 구조를 설명함으로서, 삼위일체의 흔적이 피조물 안에 있다는 것을 드러내기를 원했다. 즉, 한 분의 하나님이 삼위로 존재함이 가능하다는 것을, 다양한 유비를 사용하여 설명하려 한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다. 그 안에 일종의 삼위일체가 있다. 어거스틴은 무려 9권부터 14권에 이르는 많은 부분을 할애하였다.

예를 들어보자. 인간의 마음, 그 마음 자체를 아는 지식, 그리고 그 마음을 사랑하고 그 지식을 사랑하는 사랑에 대한 관계가 좋은 예가 될 수 있다. 이 셋은 모두 고유한 특성을 가지고 있는 중요한 것들이지만, 동시에 나눠질 수 없는 동일한 것이다. “이 셋이 그 자체로서 완전할 때에는, 마음은 자체를 전체적으로 사랑하며, 자체를 전체적으로 알며, 자체의 사랑을 전적으로 알며, 자체의 지식을 전적으로 사랑하기 때문이다. 이 셋은 놀라울 만큼 서로 분리할 수 없으며, 그러면서도 각각 단독으로 실재이며, 모두 합해서 한 실재 또는 본질적 존재이며, 그러나 서로의 관계를 말할 수 있다”(삼위일체론, 9.8).

다른 예를 들어보자. 인간에게 있는 기억, 이해, 그리고 의지도 삼위일체의 흔적을 보인다. 이 세 가지는 분명 독특한 개체임에 틀림이 없지만, 한 마음으로 작용하면서 일체를 이루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그 이유는 마음이 무엇을 안다고 할 때에는 부분적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알기 때문이다. “기억과 이해력과 의지라는 이 셋은 세 생명이 아니라 한 생명이며 세 마음이 아니라 한 마음이다. 따라서 이것들은 세 실체가 아니라 한 실체이다”(삼위일체론, 10.18). 이 외에도 몇 가지의 유비를 통해 독자들에게 삼위일체에 대한 개념을 설명하려하였다. 물론 이러한 예들이 삼위일체를 증명하는 도구로 사용될 수는 없다. 피조물 안에서 발견되는 유비와 초월의 세계에서 스스로 영원히 존재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은 분명히 구분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나아가서 이러한 유비의 사용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설명하는 만큼 성경적 뒷받침이 분명하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위일체론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는 그의 수고를 발견할 수 있다. 마지막 15권에는 앞의 내용을 요약한 후 현재에는 거울을 보는 듯 하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나중에는 분명히 얼굴을 대하는 듯 볼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성령에 이끌리어 천국에 까지 이를 것을 권면한다. 그리고 맨 마지막에는 간절한 기도로 이 책의 저술을 마친다.

2) 성경이 보인다 - 마태복음 3장 16-17, 마태복음 28:19; 사도행전 5:3-4 고전15: 24~28; 고후 13:14-16

성도들은 성경의 가르침을 통하여 신앙이 세워지고 성장하게 된다. 성경의 진리를 믿고 따르는 것은 성도의 본분이다. 그러나 간혹 성경에 드러난 사실을 이성적으로 도저히 믿을 수 없기에 혼동과 회의에 빠지는 경우도 있다.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가르침이 가장 대표적이라고 볼 수 있다. 하나님은 삼위일체, 즉 세 개의 위격을 지니셨으나 하나의 본질을 지닌 분이시다. 피조 세계에 살고 있는 인간의 이성과 철학은, 초월적 영역에 계시는 하나님의 그 깊고 비밀스러운 것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그 하나님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죄악으로 우리의 영혼이 어두워졌기 때문이다. 오직 성령의 도우심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비를 깨닫고 믿을 수 있다. 그러나 분명히 하자. 삼위일체 하나님은 우리의 이성을 통한 이해의 대상이 아니시다. 우리가 믿고 경배할 대상이시다. covenantcho@yah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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