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수 목사 (알칸사 제자들교회)
광야에는 지도가 없다. 있어도 사용할 수가 없다. 동서남북을 모르니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다만, 그 광야길을 잘 지나는 지혜는 오직 한 가지 목자의 음성을 들으며 가는 것이다. 조국 대한민국을 바라볼 때, 광야를 지나가는데, 온갖 소리들로 혼돈된 아주 혼란스럽기 그지없는 광야를 지나가는 것만 같다. 아무리 갈 바를 알 수 없는 거친 광야라 하여도, 믿고 따라 갈 수 있는 목자의 음성만 듣고 가면 된다는데, 그 음성을 듣기에 장애를 불러일으킬 만큼 혼란스럽다. 광야에서 살아나는 길은 내가 듣고 싶은 소리만 듣는 것이 아니라, 꼭 들어야 될 목자의 음성을 잘 듣고 가면 된다. 잘 듣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을 내려놓는 성숙함이 있어야 한다. 생각, 경험, 소견을 내려놓는 만큼 잘 들을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광야는 결코 은혜의 길이 되지 못하고, 짐승처럼 원망과 불평을 내어지르는 절망의 장소가 되고 만다. 그곳에는 목자가 인도하는 은혜는 찾을 길이 없고, 오직 책망과 심판의 두려움만이 존재할 따름이다.
소란스런 광야를 지나는 사람들 의지했고 신뢰했던 지도자의 민낯이 드러나면서 온갖 소리들이 무성하게 메아리치는 것을 본다. 소란스런 광야이다. 질서 있는 촛불시위를 폄하하는 말이 아니다. 어느 집단이든 지도자의 절망과 타락은 갈 바를 잃어버린 채 방황하는 광야의 무리들과 같은 상황이 전개되기 마련이다 소란스러운 광야가 위험한 것은 각자가 소견에 옳은 목소리를 제한 없이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기승전-순실과 근혜’로 끝나는 나라상황이 모든 일들이 퍼즐로 맞추기도 모자라 꿰어 매어진 듯 이야기들을 난무케 하는 것을 본다. 어떤 목사님은 마치 80년대 학번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이 당시에 고민했을 법한 내용들을 다시금 꺼내는 것 같다고 말한다. 또 어떤 목사님은 너무 황망한 나머지 오래 동안 기도를 할 수 없었다고도 말한다. 그러나 그럴 필요까지는 없지 않을까? 목사가 자신의 기도를 방해받을 정도이면 성경보다 신문이나 인터넷을 더 많이 본다면 제발 멈추어야 하지 않겠나? 하나님의 말씀보다 기도보다 더 많이 세상을 염려하고 걱정한다면, 불쑥 내어 뱉지는 못했지만 그만 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드는 것이다.
공평하지 못한 세상에 대한 분노 세상에 분노하고 외칠 일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을 텐데, 왜 이렇게 분노의 불길이 그칠 기미도 없이 연일계속해서 드러나는가? 민주노총에서는 정치의 날로 하루를 택해서 학생은 학교를 가지 않고 자영업자는 스스로 문을 닫고, 직원들은 출근을 하지 않고 대한민국을 정치적으로 뒤집는 날을 계획한다고 하니, 조국의 미래가 너무나 참람할 것 같아 더욱 마음의 근심과 기도는 신음처럼 깊어진다. 공평하지 못한 세상에 대한 분노가 크다. 세상이 공평하지 못한 줄은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 공평하리라 기대했던 지도자의 무능과 실패가 너무 선명하고 분명해서, 기대한 만큼 갑절의 배신감이 이들을 흔드는 것이다. 학교를 출석하지 않아도 졸업을 할 수 있고, 밤을 새워 공부를 하여도 쉽지 않은 제한된 입학사정을 무사통과했다는 현실의 사건들은, 오히려 거대한 정치적 담론의 문제가 아니었기에 많은 다수대중의 손과 발을 움직이는 거대한 분노의 물결을 만들어내었던 것이다.
공의롭지 못한 광야와 회복의 결론 소란스러운 광야, 공의롭지 못한 광야, 신뢰하기 어려운 지도자의 실패 등을 생각하며 기도한다. 기도하고 부르짖고, 기도할 수 없을 만큼 마음이 무거우면 사이버금식을 선언하기도 한다. 기도할 수 있는 만큼만 보고 들으라고 권면도 한다. 그러나 결국 회복의 결론을 구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신 인도를 보게 된다. 결론은 파국이 아니라 회복이 아닌가? 회복을 전제로 하지 않는 모든 정의는 결국 파괴적인 분노의 감정에 매일 따름인 것이다. 문제가 복잡할수록 의외로 답은 쉽게 드러난다. 왜냐하면, 해석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선 현상은 더욱 배후에 있는 본질에 집중케 하기 때문이다. 모든 혼돈의 상황은 두 가지 전제를 답으로 제시한다. 기본으로 돌아가라는 것, 그리고 잘 돌아가기 위해서는 내려놓음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본질회복이다. 불공평한 세상에서 성도로서의 어떻게 살아가며, 어떤 백성됨의 자격으로 삶을 지탱해갈 것인가? 성도는 성도답게, 교회는 교회답게, 백성은 백성답게, 지도자는 지도자답게 그 자리로 빨리 돌아가는 것이다. 돌아가기 위해서 빨리 내려놓아야 한다. 쉬 내려놓기 위해서는 통절하게 돌이키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광야의 백성과 신앙의 분별력 신앙은 현실이고, 현실은 다시 광야이다. 성도로서 광야 백성들은 인간 지도자의 실패와 흥망을 넘어서야 한다. 영원한 지도자를 바라보며 이 땅의 지도자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이는 그 어떤 화급을 다투는 문제보다도 가장 우선순위에 속하는 일이다. 광야는 광야이다. 현상에 매달려 가면, 나중에 현상을 분별할 수 있는 힘조차 상실하게 된다. 신앙이 좋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무한히 착함과 무골호인이 됨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착한 것은 좋은 것이지만, 착하기만 한 것은 신앙의 목표는 아니다. 신앙의 분별력을 가지는 것이다. 참과 거짓을 구별하며, 참된 진리 앞에 삶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순복할 수 있는 은혜가 있다면 그가 바로 신앙의 분별력을 가진 성숙한 성도인 것이다. 그 분별력의 기준이 무엇인가? 목자 되신 그리스도의 음성을 광야가운데 잘 듣는 것이다. 그 음성을 분별할 수 있는 이들만이 세상의 혼란한 현상 앞에서도 기도하며 지혜롭게 광야를 지나게 된다.
분별력은 우리의 위치와 소속을 분명하게 한다. 왜 사는가? 어떻게 살 것인가? 나를 왜 광야로 보내셨는가? 광야의 복잡다변한 현상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얻게 된다. 광야 인생의 본질은 마치 외지에 파견 나온 군인과 같다. 원래 소속한 부대에 대한 명예 때문에 열심히 일을 하지만, 결국 그 사람에 대한 가장 중요한 결정은 원 소속부대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진짜 훌륭한 군인은 이 원리를 잘 안다. 그래서 파견지에서 영원할 것처럼 살지 않고, 자신을 파송한 부대장의 뜻을 헤아리며, 그의 인정을 위해 사는 존재가 된다. 소속과 위치에 대한 분별력은 복잡분주한 현상에 쉬 매이지 않게 한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나를 보내신 주님의 뜻을 헤아리고 그 뜻에 단순 간결 분명하게 복종하는 성숙한 인생의 길을 걸어가도록 한다.
사실과 진실 예수님 당시에 무리와 제자가 있었다. 그 구분은 신앙의 분별력에 기인한다. 무리는 자신의 원하는 것을 얻고 듣고 보고 누리기 위해 따르는 자들이었다. 제자는 주님과 함께 거하며 그의 말씀을 통해 주님이 정말 좋아하는 것 나도 좋아하고 주님이 정말 싫어하는 것 나도 싫어하는 존재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주님을 기준으로 분별력을 가지고 세상을 보기 시작한 사람들이다. 광야를 지나는 삶은 철저히 이 제자의식이 있어야 한다.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는 것이 중요하다. 사실이라는 것은 자신이 보고 듣고 배운 대로 그대로 말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성도의 분별력은 사실을 첨삭 없이 그대로 옮기는 것에 앞서서, 과연 이 사실을 말함으로서 다른 사람의 유익 더 나아가 주님의 기쁨이 되는 덕을 세우는 말인가?를 생각해야 된다. 거기까지 가게 될 때, 그 사실은 사람의 마음과 삶을 복되게 하는 진정한 사실로서의 진실이 되는 것이다.
합리적 의심과 해석 교회공동체가 소란스러워지는 배경가운데 아주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가 성도들이 오감으로 경험한 사실을 열심히 진리처럼 가십거리화 하는데 있더라는 것이다. 광야교회 뿐이겠는가? 광야 세상은 더할 것이다.
지금 한국의 많은 언론들이 자신이 생각하는 사실을 가지고 책임지지 못할 각색된 해석들을 제 2, 제 3의 자생된 자료들을 근거로 얼마나 많이 쏟아 붓고 있는가? 성도들도 이러한 합리적 의심이 배제된 사실과 진실 속에서 호도된 언어를 전언하게 될 때,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많은 거짓증거의 책임을 져야할 지를 생각해야 한다. 한국의 많은 언론들이 비정상적인 행태로 혼란에 몰입하는 것을 본다. 99가지를 제대로 보도한다 하여서, 1가지를 거짓 혹은 의도를 가지고 보도한 것이 절로 면죄부의 대상이 되는가? 그렇지 않다. 하물며 말과 행위로서 정치를 할 지도자들의 입에서조차도 확인되거나 합리적 의심이 결여된 이야기들을 쏟아내는 것을 보면 조국의 미래에 대해 마음을 졸이게 한다. 진실에서 너무나 먼 이야기들, 아무도 책임질 수 없는 이야기들과 소견에 옳은 해석들, 그런 것이 혼란을 더욱 격하게 만들어가는 보게 된다.
조국사랑, 사랑만큼, 언어절제 참된 신앙은 서 말의 가루에 서 말의 누룩이 필요 없는, 작은 누룩으로도 충분한 변화의 능력을 가지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광야세상에서 변화의 능력은 무엇인가? 진실한 분별력을 가지고 인간 지도자의 흥망성쇠를 넘어서는 영원한 목자의 음성을 들으며 이 땅의 일들을 위해 기도하며 본질을 회복하는 것이다. 기본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회개와 내려놓음이다. 한마디로 본질회복이다.
불공평한 세상에서 어떤 성도의 삶을 살며, 어떤 백성됨의 자격으로 삶을 지탱해갈 것인가? 성도는 성도답게, 교회는 교회답게, 백성은 백성답게, 지도자는 지도자답게 그 자리로 빨리 돌아가는 것이다. 돌아가기 위해서는 내려놓아야 한다. 쉬 내려놓기 위해서는 돌이키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지난 칼럼의 결론을 다시 재론하며 마무리하기 원한다. 힘들고 혼란스러워보여도 조국 사랑의 마음은 변치말자. 비판하고 아파하는 만큼, 갑절로 기도하자. 진실과 덕을 세우는 언어의 절제를 따르자. davidnjeon@yaho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