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진모 목사 (필라델비아한인연합교회)
현재 기독교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시각이 매우 부정적이다. 날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 나름 교회 안에서 개혁을 외치는 소리가 들리기도 하지만, 무엇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난감한 현실이다. 이 시대의 교회가 지닌 문제의 핵심은 '경건의 상실'이다. 가장 시급한 과제가 있다. 목회자와 평신도가 함께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변화 받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의 입을 막으려는 노력을 하기보다, 하나님의 깊은 마음을 이해하고 실천하는 일에 매진해야 한다. 이때 교회가 지닌 고질적인 문제들이 자연스럽게 해결될 수 있다. 질문: 경건한 삶을 위하여 모든 기독교인이 지녀야 할 기본적인 신앙 정신이 무엇일까?
1) 교회 역사를 보면...
■ 누르시아의 베네딕트 누르시아의 베네딕트(Benedictus of Nursia, 480-543)는 개신교 성도들에게 생소하여도, 가톨릭교회 내에서는 대단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인물이다. 그를 "서방교회 수도생활의 아버지"라고 부른다. 수도생활의 전통은 동방교회에서 시작되었고 크게 발전하였다. 수도사가 되기로 작정한 자들은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풍요로움과 쾌락을 포기하고 고행을 선택하였다. 뜻을 같이 하는 수도사들이 함께 모여 공동체가 형성되면서, 자연스럽게 수도원이 시작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비록 수도생활의 전통이 동방교회에서 시작되었지만 향후 중세교회의 신학을 주도하며 활발하게 활동하던 수도원 운동의 전통을 세운 것은 서방교회였다. 그 중심에 베네딕트가 있었다. 베네딕트는 누리시아라는 이탈리아의 작은 도시에서 태어났다. 그 당시 부유한 가정에서 자라난 자녀들은 어린 나이에 로마에 가서 공부를 하는 기회를 지녔었는데, 베네딕트도 그 중에 하나였다. 이들은 공부를 잘 마치면 상류사회에 진출하는 길을 보장되었다. 그러나 어느 날 베네딕트의 큰 갈등과 함께 마음에 커다란 변화가 찾아왔다. 아예 공부를 포기하고 로마를 떠나기로 작심한 것이다.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났기 때문일까? 베네딕트의 삶과 사역을 기록한 그레고리 1세의 “대화록”에서 두 가지의 답을 찾아볼 수 있다. 하나는 부정적인 동기로서, 그가 로마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이 도덕적으로 타락해가는 모습과 로마교회의 분열을 직접 목격한 후 커다란 회의를 갖게 된 것이다. 로마에 남아서 공부를 하게 되면 결국 자신도 도덕성을 잃을 뿐 아니라 교회 정치의 소용돌이에 휘말릴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긍정적인 동기로서, 공부를 포기하고 자신이 정한 목표인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거룩한 삶을 선택하는 것이 더욱 바람직한 결정이란 결론을 내린 것이다. 즉, 베네딕트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하나님을 더욱 깊이 알고 바로 섬기려는 경건한 향한 열망이었다.
■ 경건한 수도사 로마를 떠난 베데딕트가 처음 찾은 곳은 깊은 신앙심을 가진 성도들이 모여 지내던 엔피데(Enfide)라는 도시였다. 그곳에 도착한지 얼마 되지 않아, 그의 깊은 신앙심에 대한 소문이 사람들에게 속히 퍼져나갔다. 세상적인 일보다 영적인 일에 관심을 쏟는 사람들과 함께 지내며 경건을 실천할 수 있는 곳을 찾은 것이다. 그러나 곧 그의 삶에 근본적인 변화가 찾아왔다. 엔피데에서 수비아코(Subiaco)로 가는 길에서 그곳에 거주하는 로마누스(Romanus)라는 수도사를 만났다. 그들이 나눈 대화가 인연이 되어, 결국 베네딕트는 수도사가 되기로 결심하였다. 로마누스로부터 짐승가죽으로 만든 옷, 즉 수도복을 수여받은 베네딕트는 그 후로 3년간 외부와의 접촉을 끊었다. 다른 수도사들과 마찬가지로 3년간 동굴에서 지내며 자신 안에 있는 욕망을 버리기 위해 몸부림을 쳤다.
■ 준비된 수도원장 거룩을 향한 그의 열망이 주위에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그를 찾아왔다. 비코바로(Vicovaro) 수도원에 속한 수도승들은 아예 자신들의 수도원장이 되어달라고 반복하여 요청하다. 그들의 간청을 수락한 베네딕트는, 수도사들에게 엄격한 규율에 입각한 생활을 요구하였다. 자신이 추구하는 경건한 삶을 수도원에 접목시켜보려는 시도였다. 결과는 매우 부정적이었다. 수도사들이 새로운 수도원장이 자신들의 삶을 구속하고 자유를 앗아가는 것이 큰 불만을 품고 크게 반발한 것이다. 심지어 음식에 독을 넣어 그를 암살하려할 정도였다. 결국 베네딕트는 수비아코로 돌아왔다. 이번에는 그가 홀로 지내는 삶을 선택하지 않았다. 그를 따르던 사람들과 12개의 소규모 수도원을 짓고 함께 지냈다. 그러나 얼마 후, 자기를 시기하던 인근 교회의 지도자의 배척과 음모로 인해 그 곳을 떠나야 했다. 그가 최종적으로 정착한 곳은 몬테카시노(Monte Cassino)였다. 비록 베네딕트 개인에게는 매우 견디기 힘든 어려운 일이 연속적으로 일어났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모든 일이 진행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로마를 떠난 후 경험한 여려가지 일들은, 영향력이 있는 일을 위한 준비의 과정이었다. 그가 정착한 몬테카시노는 전통적으로 우상을 섬기던 영적으로 황폐한 곳이었다. 조속한 시일에 온 마을 사람들을 개종시키는 놀라운 일을 주도하게 되었다. 또한 그가 산 위에 수도원을 세웠는데, 자신이 염원하였던 경건에 대한 열정을 지닌 수도승이 모여서 생활하는 영적 공동체로서 출발하게 되었다.
■ 베네딕트 규칙서 베네딕트가 비코바로에 있었던 수도원을 떠나야 했던 결정적인 원인은 그가 제시한 규율이 너무 엄격하였기 때문이다. 수도사들의 반응이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가? 사막과 동굴에 거주하면서 금욕과 고행으로 경건을 갈망하는 수도사들의 마음 자세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이다. 베네딕트는 3년간 동굴에서 수도사의 삶을 살면서, 진정한 경건을 이루기 위하여 죄의 권세와 치열한 영적전쟁을 치러야하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만일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삶을 목적 삼는다면, 반드시 세상과 구별된 삶을 배우고 실천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은 것이다. 이러한 그의 고민이 잘 정리된 문서가 바로 “베네딕트 규칙서”이다.
교회사에서 베네딕트의 명성은 그가 작성한 “베네딕트 규칙서”에 기인한다. 중세시대에 서방 교회의 원동력이 되었던 수도원 운동의 기본적인 방향성이 제시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수도원에서 생활하는 수도사들이 분명한 목적과 방법을 공유하기를 소원했다. 수도원은 모든 것을 이룬 성자들이 모인 곳이 아니라, 경건한 삶을 배우고 실천하려는 연약한 인간이 함께 공동체를 이루어가는 집합체이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배경을 지닌 사람들이 모여 가족처럼 생활을 하려면, 모두가 공감하고 동의하는 규율이 있어야 하고, 이 모든 것은 반드시 엄격하게 지켜져야 한다고 믿었다.
“베네딕트 규칙서”는 전체 73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중에는 수도사의 의무, 예배에 관한 규율, 치리에 관한 내용, 수도원 내부의 경영에 관하여 것, 그리고 다양한 규칙이 포함되어 있다. 비록 베네딕트가 모든 규칙이 엄격하게 지켜질 것을 기대하였지만, 규칙 자체를 살펴보면 그가 수도사들에 대한 배려심이 대단히 많았다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그는 수도사들이 영적 군사들과 같은 자세를 취하기를 기대하였지만 그들을 장악하거나 획일적 행동이 가능한 집단으로 훈련시키려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수도사들은 아직 경건의 모습을 갖추기 위해 성숙해야 할 부분이 많이 있는 인간들이기에, 규칙이란 그들에게 유익하고 필요한 "조언" 또는 "권장 사항"이란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한 예를 들어보자. 베네딕트는 무엇보다 인간의 기본 욕구인 의식주의 문제에 대하여 매우 관대하였다. 광야 또는 산에서 홀로 지내는 수도사들의 기본적인 정신은 가장 고생스런 삶을 선택하는 것이다. 덜 먹고, 제대로 입지 않고, 편안하지 않는 잠자리를 자는 것을 경건한 삶과 연결시킨 것이다. 이와 반대로, 베네딕트는 수도원에 거주하는 수도사들에게는 의식주에 관한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를 채워주었다. 물론 절대로 허영심은 어떤 모습이라도 허용하지 않았다. 무슨 이유 때문일까? 베네딕트는 친히 자신의 고행을 경험하면서 깨달은 것이 있었다. 수도원에 모인 수도사들이 좀 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경건한 노력에 매진해야 한다고 믿었다. 공동 기도, 성경 읽기, 그리고 노동이다. 이 세 가지는 향후 서방교회 수도원 운동의 핵심 사항으로 자리를 잡아갔다. covenantcho@yaho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