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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 장애인의 구원은 가능한가? (하)

정승원 목사(세계밀알연합이사,미주밀알 창단맴버,총신대 신학대학원 교수)

그러면 어떻게 지적 장애인은 죄 문제를 해결하며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 분명한 것은 지적 장애가 없는 사람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을 것이다. 죄 문제에 있어서 본질적으로 두 사람이 다르지 않다면 구원 문제에 있어서도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을 것이다. 둘 다 인간 개인의 능력 밖의 일이라는 것이다. 지적 장애인의 구원 문제는 일찍 죽은 유아의 구원 문제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둘 다 지적 능력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유아의 구원이 가능하면 당연히 지적 장애인의 구원도 가능하다. 아더핑크(Arthur Pink)는 아이들의 구원은 비밀에 속한 것이라고 하면서 만일 그들이 구원을 받았다면 그것이 그들이 하나님에 의해 선택되고 아들에 의해 구속받고 성령에 의해 중생된 자들에 속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인간의 전적 타락 126. 130). 아브라함 카이퍼는 “신자들의 자녀들은 효과적 은혜의 수혜자로 생각해야 한다. 그들 안에서 이미 효과적 은혜의 적용은 시작되었다. 또한 분별할 수 있는 나이 전에 죽은 아이들도 구원 받았다고 간주할 수 있다”라고 주장한다(Calvinism and Confessional Review. 602).

웨스트민스터 고백서는 유아 때 죽은 택아(Eletinfants)는 그리스도에 의해 그리고 기쁘신 뜻대로 역사하시는 성령을 통하여 중생되고 구원 받는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말씀 사역에 의해 외형적으로 부르심을 얻기 가능하지 않은 사람들도 마찬가지라고 가르친다(10:3). 이 고백서에는 선택받은 유아라는 단서를 붙인다. 선택받았으면 구원을 받고 그렇지 않으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비록 이 고백서는 명쾌하게 유아의 구원 문제를 설명하지는 않지만 지적 능력이 없는 유아의 구원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말씀 사역에 의해 외형적으로 부르심을 얻기 가능하지 않은” 지적 장애인의 구원도 가능함을 말하고 있다. 헤르만 바빙크는 유아의 구원에 있어서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확정적이고 결정적인 판단은 삼가야 한다면서 하나님은 말씀과 성례도 없이 새 사람이 되게 하사 영생에 이를 수 가 있다고 주장한다(Dogmatick, vol 4, 810). 분명 유아나 지적 장애인의 구원에 대해서 인간이 단정 짓는 일을 위험한 일이다. 인간의 구원은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에 달린 문제이기 때문이다. 유아세례를 반대하는 이유들 중에 유아에게는 지식이 없다는 사실에 대하여 칼빈은 다음과 같이 변론한다.

“그들은 말하기를 믿음은 들음에서 나오는 것인데(롬10:17), 유아들은 아직 들을 능력이 없고 따라서 하나님을 알 수도 없다고 한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듣는 것이 믿음의 시작이라고 하는 사도의 말은 다만 주께서 그의 백성을 부르실 때에 흔히 사용하시는 일상적인 절차와 경륜을 지칭하는 것뿐이며 다른 방식을 절대로 허용하지 않는 불변의 절대적인 법칙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생각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많은 사람을 부르실 때에 그런 다른 방식을 사용하신 것이 분명히 드러난다. 곧 복음 선포의 수단과 관계없이 성령께서 조명하시는 그런 내적인 수단을 통해서 자신을 바르게 알게 하시는 것이다.”

칼빈은 복음을 듣고 구원을 얻는 방법이 불변의 절대적인 법칙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강조한다. 또한 복음을 들음으로 믿음이 시작된다는 사도바울의 말은 일상적이 절차와 경륜을 지칭하는 것뿐이며 다른 방식을 절대로 허용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고 반박한다. 복음 선포의 수단과는 다른 방법으로 성령께서 조명하시는 내적 수단을 통해서도 자신을 알릴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칼빈의 말이 옳다면 지적장애인 역시 복음 선포의 수단과는 다른 방법으로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복음주의에서 롬10;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말씀을 근거로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믿음이 필요하고 또한 입으로 시인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로마서의 주제는 인간이 의롭다함을 받는 것은 행위(인간의 공로나 능력)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는다는 것이다. 만약 마음으로 믿는 것과 입으로 시인하는 것이 인간의 공로나 능력에 관한 것이라면 로마서의 주제와 모순이 된다. 바울이 이런 의미로 믿음과 시인을 설명하실 리가 없다.

바울은 앞 로마서 10:6-8에서 신명기를 인용하면서 이렇게 말씀한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혹은 누가 무저갱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냐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만약 인간의 개인적 믿음과 지적 시인이라는 공로로 구원에 이룰 수 있다고 하면 그것은 자기가 하늘에 올라가겠다는 것이요 또 자기가 내려가겠다는 행위라는 말씀이다. 그리스도가 다 하셨는데 왜 인간이 뭔가 하려고 하느냐는 말씀이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인간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그리고 하신 말씀이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이다.

이 말씀을 받으러 하늘에 올라갈 필요도 없고 무저갱으로 내려갈 필요가 없다. 그 이유는 그 말씀은 우리 입에 있고 우리 마음에 있기 때문이다. 입으로 시인한다는 것은 내가 지적으로 동의하고 입으로 의지적 시인을 한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우리 입에 넣어 주시고 우리 마음에 두신 말씀이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 말씀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의미하는 복음의 말씀이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은 우리 개인의 주관적 믿음도 아니요 우리의 지적 시인도 아니다. 비록 우리에게 심겨진 복음의 말씀에 대한 반응을 요구하시지만 그 반응이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한다는 말씀은 아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이다.

칼빈은 “선택이 우리가 복음을 받아들인 후에야 비로소 효력을 발생하며, 선택의 타당성이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실에서 생겨난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잘못이다”라고 주장한다(Inst, 3:24:3).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구원을 위한 공로가 아니라는 것이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는 복음을 받아들일 능력이 원천적으로 없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살리셔야 했다(엡2:1). 그러므로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도구일 수는 있어도 원인은 될 수 없는 것이다. 칼빈은 또한 “지성과 의지의 고유한 기능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하는 것들은 구원의 필연적 조건이 아니지만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할 수 있는 은혜라고 강조한다(Inst. 2:5:14).

결론적으로 하나님은 모든 자들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신다(딤전 2:4). 분명 하나님은 유아와 지적 장애인들도 구원에 이르고 진리에 이르기를 원하신다. 또한 구원은 얻는데 있어서 실제적으로 복음을 듣고 이해하는 것 외에 다른 성령의 신비로운 방법으로 복음을 지적 장애인의 마음 밭에 심어주실 수 있다. 결국 장애인, 비장애인, 성인, 유아 등 모든 자들의 구원에 있어서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와 은혜를 전적으로 신뢰해야 한다. [필자주] 본 논문에서의 연구대상인 ‘지적장애인’은 성경지식이나 복음에 관한 내용을 이해할 수 있는 지적 능력이 없는 제 1급 지적장애인을 의미한다. sastelu@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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