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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초대 교회 - 신앙의 자유와 경건 (5)

조진모 목사 (필라델비아한인연합교회)

“콩 심은데 콩나고, 팥 심은데 팥난다”라는 말이 있다. 무슨 뜻일까? 세상의 모든 일은 반드시 원인에 따라 결과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만일 콩을 심었는데 팥이 났다면, 뭔가 착각하였거나 누군가에 의해 바뀌어졌기 때문이다. 아무리 과학이 발달하여 전혀 새로운 개량품이 개발된다고 해도, 보편적 자연의 이치를 어기는 경우는 없다. 그렇다면 신앙은 어떨까?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에 근거한 신앙을 공유하지만, 개인의 성향에 따라 조금씩 다를 수 있다. 가장 이상적인 신앙은 이성과 감성 또는 지식과 경험이 균형을 이루는 모습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한 면이 다른 면에 비해 더욱 강조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처음에는 그 차이가 씨앗처럼 작아 보이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콩 또는 팥을 분명 구분처럼 분명한 신앙적 차이가 현저하게 드러난다. 질문: 각 성도가 건전한 신앙의 뿌리를 가져야 할 절대적인 이유가 무엇인가?

1) 교회 역사를 보면...

■ 동방에서 서방으로 동방교회의 수도원운동은 일찍이 자리를 잡았다. 개인의 경건을 위해 고독한 수행을 선택했던 수도사들 자연스럽게 모여 작게 출발하였으나 조만간에 전형적인 모습을 지니게 되었다. 특히 이집트를 중심으로 수도원 공동체가 확산되면서, 향후 개인 명상과 신비스런 신적 연합을 강조하는 동방 종교의 특징이 서서히 자리를 잡아갔다. 이러한 동방교회의 신학적 특성은 향후 서방교회와 영원한 결별의 중요한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그렇다면 수도사의 활동과 수도원운동은 오로지 동방교회의 전유물이었나? 아니다. 서방교회의 수도원운동은 중세를 지나오면서 지대한 신학적 발전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널리 알려진 신학자들은 대부분 수도원에서 학문 활동을 하였던 학자들이다. 서방교회의 수도원의 성격을 동방교회와 비교할 때, 생활하는 겉모습은 매우 유사한 점이 많았지만 근본적으로 달랐던 것이다. 서방교회의 수도원운동 역시 한 수도사의 활동으로 시작되었다. 동방교회의 수도원운동을 서방에 소개한 인물은, 동방교회 출신으로 건전한 신학 발전에 남다른 공헌을 하였으며 수도원 운동에 큰 관심을 가졌던 아타나시우스였다. 그가 정치적인 어려움을 피하기 위해 서방에 머물러 있는 동안, 수도사 안토니의 사상을 전파하려고 노력한 결과 몇 사람의 추종자를 얻게 되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인물로, 투르의 마르틴(Martin of Tours, 316-397)로 알려진 헝가리 출신의 수도사를 꼽을 수 있다.

■ 최초 서방 수도사 마르틴 로마가톨릭교회는 마르틴의 업적을 높이 평가한다. 순교자가 아니지만 성인으로 추대한 최초의 인물이기도 하다. 그가 서방교회의 방향을 새롭게 설정하였다고 인정하기 때문이다. 마르틴의 10세가 되었을 때 로마군 장교였던 부친의 뜻을 거부하고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일 정도로 자신의 주장이 분명하였다. 그의 기독교 신앙은 로마 군인으로 징집되어 복무하는 과정에서도 드러났다. 적군의 피를 흘리는 것이 신앙 양심에 위배가 되기에 전쟁에 나갈 수 없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 결과 체포되어 군 감옥에 투옥되었는데, 두렵거나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서가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서 무기로 무장하지 않은 채 적진과 맞서는 군대의 선봉에 서기를 원했다. 다행스러운 것은,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기에 큰 어려움 없이 18세에 군복무를 마칠 수 있었다. 마르틴은 아리우스 신학을 철저하게 반대함으로 ‘서방의 아타나시우스’라고 불리던 프랑스 푸아티에의 힐라리우스(Hilarius of Poitiers, 310-367)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 후 마르틴도 적극적으로 아리우스파를 대적하여, 어려운 상황을 피할 수 없었으니 자신의 신학적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힐라리우스와 맺은 인연이 평생 그의 삶을 주도하게 되었다. 고향과 이탈리아에서 시간을 보낸 후 360년에 다시 프랑스로 돌아온 마르틴은 힐라리우스의 도움을 받아 리귀제(Liguge)에서 수도사로서의 사역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마르틴에 대한 소문을 들은 다른 수도사들이 함께 그를 중심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동방교회와 유사하게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의 공동체가 이루어졌는데, 361년에 이곳에 최초로 서방 수도원이 세워지게 된 것이다. 마르틴이 정열적으로 사역에 매진한 결과, 372년에는 마르무티에(Marmoutier)에 다른 하나의 수도원을 설립하기도 하였다. 날이 갈수록 마르틴의 신앙과 행실에 대한 좋은 소문이 퍼져나갔다. 투르(Tour) 시민들은 그를 자신들의 주교가 되기를 간절히 원하였다. 선뜻 이 자리에 응하지 않을 것을 예상하여, 그에게 병자들을 보살피는 사역을 부탁하여 투르로 오게 하였다. 주교의 자리에 대한 큰 관심이 없던 그는 그들의 눈을 피하여 숨기도 하였지만, 결국 그들의 소원대로 주교직을 수락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르틴은 수도사라는 신분과 수도원 공동체의 삶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마르무티 수도원에서 생활을 하였다.

■ 서방 수도원 전통의 씨앗 비록 수도원운동이 동방교회로부터 시작되어 서방교회로 건너왔지만, 마르틴의 신학은 당시 상황을 비추어볼 때 매우 건전하였다. 이미 언급한 대로, 마르틴은 아타나시우스가 대적하던 아리우스 신학을 최선을 다해 배격하였다. 그가 주교로 재임하는 동안 투르 시의 전통 민간 신앙을 뿌리 뽑기 위해 이방 종교의 신전과 우상을 파괴하였다. 일부 시민들의 거센 반발에도 불구하고, 소신 있게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감행하였다. 그는 평생 복음을 전하여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돌아오게 하는 일을 결코 게을리 하지 않았다. 비록 마르틴은 이성적이며 지적인 인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신앙은 감성적이며 신비한 면을 많이 포함하고 있었다. 마르틴과 동시대에 살았던 술피티우스 세베루스(Sulpitius Severus)라는 작가에 의해 저술된 그의 일대기를 통하여 그가 어떤 인물이었는지 알 수 있다. 물론 마르틴의 삶을 탄생부터 죽음까지 시대별로 완벽하게 서술한 자서전은 아니다. 그가 경험한 중요한 일을 중심으로, 전체가 27장으로 짧게 구성된 흥미로운 책이다. 저자는 1장에서 자신이 글을 기록한 이유를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하늘의 상급을 바라고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몰두한 마르틴의 삶을 자세히 살핀 장본인으로서 일종의 책임감을 갖게 된 것이다. 계속하여 주의 교회 안에 마르틴과 같이 참된 지식을 추구하고 선한 영적 전쟁을 싸우고, 신적 덕행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자들이 세워지기를 바라기 때문이었다. 자연히 저자는 마르틴이 일반 사람과 매우 다른 특별한 인물이었음을 강조하려는 모습이 이 책에 역력하게 보인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3장의 소제목은 “마르틴에게 나타난 예수님”이다. 마르틴이 군인으로 복무 중이던 어린 나이에 그가 체험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마르틴이 한 거지를 불쌍히 여겨 자신이 차고 있던 칼로 외투를 반으로 잘라 그에게 건네주었다. 그날 밤, 잠을 자는 중에 환 상중에 예수님께서 그를 찾아 오셨다. 이때 예수님이 입으신 옷이 마르틴을 놀라게 했다. 그 날 자기가 거지에게 건네준 바로 그 옷을 입고 계셨기 때문이다. 잠을 깨어나 보니, 반으로 잘렸던 외투가 다시 원래의 상태로 복구되어 있었다. 세베루스의 일대기는 마르틴이 영적으로 단단히 무장한 인물이었으며 남에게 없는 능력을 지녔기에 신비스런 일을 많이 행하였다고 줄줄이 서술하고 있다. 6장에서는, 그가 마귀의 공격을 받았으나, 주님을 철저하게 믿는 믿음으로 대항하자, 마귀가 도망한 사건을 소개하고 있다. 7장에서는, 마르틴이 죽은 예비 신자를 위해 기도하니 그가 살아나는 기적이 일어났다. 16장에도 비슷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데, 병든 자들이 줄줄이 마르틴을 찾아와 기도를 받아 깨끗함을 받는 일이 있었다. 17장에서는 마르틴이 귀신들린 사람을 깨끗함으로 그와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그 후에도 계속적으로 마르틴이 놀라운 능력으로 기적을 베푼 내용이 반복적으로 기록되었다. 우리는 마르틴의 일대기를 읽은 많은 사람들이 감동을 받아 수도승이 되고 수도원을 찾았다는 사실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전통적으로 서방교회는 동방교회와 비교해 볼 때에 이성과 지식을 강조하는 신학을 발전시켰다. 시간이 흐를수록 동방과 서방 교회의 차이가 심화되었다. 중세에 접어들면서 학문으로서의 신학의 발전을 중시하던 수도원의 공헌이 두드러진 것이다. 그러나 서방교회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던 수도원은 초기부터 개인의 경험과 신비적 체험을 중요시하는 전통을 유지하였다. 씨앗의 역할을 하였던 마르틴의 영향을 결코 무시할 수 없다. 향후 이성과 감성 또는 지식과 경험 사이에 균형이 잡힌 신앙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이 끊임없이 계속되었지만, 한 쪽에 지나치게 치우침으로 인해 교회의 영적 질서가 깨어지는 일이 자주 일어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2) 성경이 보인다 - 누가복음 13:6-9; 요한복음 15; 갈라디아서 5:16-26

건전한 성도는 반드시 양질의 열매를 맺게 되어있다. 중요한 것은 경건한 신앙 인격과 성품이다. 남을 의식해서 만들어내는 말과 행동이 아닌, 삶 속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그의 모습을 결정하는 것은 그가 지닌 신앙의 뿌리이다.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성도는, 성령의 사역으로 인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됨으로서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영적 열매를 맺게 된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반드시 성경이 가르치는 그에 대한 객관적 사실을 지적으로 인정하는 것과 그와 영적 교제를 유지하고 누린다는 양면을 포함한다. 건강한 성도는 머리와 가슴으로 동시에 하나님을 믿는다. 어떤 환경이나 유혹에서도 쉽게 넘어지지 않는 견고한 신앙인이 지닌 특성 중에 하나는, 이성과 감성 또는 지식과 경험 중 한 쪽에 치우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covenantcho@yah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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