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진모 목사 (필라델비아한인연합교회)
‘흑백논리’는 위험한가? 그럴 수도 있다. 어떤 사실을 주장하면서 선택의 가능성을 오직 두 가지로 국한되어 생각하면 반드시 오류가 발생한다. 좌와 우, 선과 악, 삶과 죽음 등을 앞에 두고 중립적인 면을 인정하지 않고 극단적인 결정을 하려하기 때문이다. ‘흑백논리’를 지닌 사람과 대화하기가 힘든 이유는 자신의 주장만이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세계에 갇혀서 다른 것을 보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흑백논리’의 위험성이 성경의 진리에도 적용되어야 하는가? 성도들은 누구를 대하든지 온유함과 포용력을 잃지 말아야 하지만 성경의 진리에 관해서는 단호해야 한다. 해석의 여지가 있거나 삶에 적용하는 문제에 관해서는 열린 귀와 마음을 가져야 하지만, 유일한 성경의 진리는 사수해야 한다.
▪ 381년 콘스탄티노플 회의로 가는 길 381년, 서방 신학을 지지하던 데오도시우스 황제가 종교회의를 소집하였다. 니케야에서 첫 번 공의회로 모인 325년 이후 두 번째로 가진 역사적인 모임이었다. 니케야 종교회의에서 신학적 패배를 맛본 아리우스주의자들이 포기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미 교회가 니케야 신조를 옹호하는 한 파와, 온갖 정치력을 동원하여 이에 반대하는 다른 파로 분리되어 혼란이 계속되었다. 콘스탄티노플 회의를 통하여 이들의 대립이 중단되었다. 니케야 신조를 확인하고, 이를 부정하는 이단을 정죄하는 중대한 결정을 내린 것이다. 결국 아리우스주의자들이 완패로 끝난 것이다. 그러나 콘스탄틴노플 회의로 가는 길이 그리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아리우스주의자들의 결사적인 방해공작은 어느 정도 예상한 일이지만, 매우 혼란한 상황에서 교회의 방향성을 더욱 상실하게 하는 새로운 장애물이 등장하였기 때문이다. 소위 ‘중도파’가 출현하였기 때문이다. ‘중도파’는 그 당시 대립하고 있던 양쪽의 주장을 수용하려고 노력하였던 자들이다. 그들의 눈에는 상대의 주장을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태도를 지닌 흑백논리의 싸움으로 보였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아리우스파를 ‘비유사파’라고 부른다. 성자와 성부가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성자와 성부가 동일하다고 보는 니케야파를 ‘동일본질파’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중도파를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그들을 ‘유사본질파’라고 부른다. ‘유사본질파’는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의 사상을 따른 세 사람, 즉 체사레아, 에메사, 그리고 니코메디아 등에 의해서 발전되었다. 그 후에 픽타비스의 주교 힐라리우스에 의하여 더욱 발전되었는데, 니케야 신조가 정의한 ‘동일본질’을 거부하고, 성부와 성자 간의 ‘유사한 개념’을 새롭게 끌어들인 것이다. 이들의 주장이 교회의 내분을 봉합할 수 있는 해법이라고 믿었던 지도자들이 생겨났다. 심지어 이들은 황제를 설득하는데 성공하여, 커다란 힘을 형성한 적도 있다. 성경이 가르치는 것은 ‘동일본질파’의 주장이었다. 이들은 성경의 진리에 맞서서 대항했던 ‘비유사파’와 ‘유사본질파’에게 양보할 수 없었다. 흑백논리를 주장하는 협소한 마음을 지닌 사람들이라고 지적받기도 하였다. 당연한 일이었다.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의 동일성에 대하여 성경은 가르치는 진리는 유일하기 때문이다.
▪ 교부 아타나시우스 교회가 381년 콘스탄티노플 회의에 이를 때까지 진리를 수호하며 험한 길을 걸어간 인물을 소개한다. 알렉산드리아의 감독이었던 교부 아타나시우스(295?-373)이다. 그가 신약성경의 정경, 즉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27권의 목록을 367년에 처음 교회에 소개하였다. 성경에 능통하였던 그는 성부와 성자는 ‘동일’하다고 결론을 내린 후,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생명을 위협하는 상대의 모함과 위협을 물리치고, 성경의 진리는 오직 하나뿐임을 증명한 상록수와 같은 인물이다. 아타나시우스는 교회를 보호하고 신앙의 정통성을 수호하려는 의지를 “이교도 논박”, “성육신에 대하여”, ”아리우스파 반박론“ 그리고 ”아리우스파의 역사“ 등에 잘 정리하여 놓았다. 여기에 성경적 진리를 변증하며 이단을 대항하는 그의 노력이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 성자는 성자와 동일하다 아타나시우스의 글을 간단히 소개하고자 한다. “말씀(성자)을 하나님의 작품으로부터 제외시켜 창조주로서 아버지와 동등한 분으로 높이고, 본성상 성자시라고 인정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만약 그가 단지 피조물일 뿐이라면, 그가 다른 피조물들과 마찬가지로 서로에 대해서 동등한 지위를 지닌다고 인정하고, 그를 포함한 피조물 각각에 대해서 ‘피조물이되 피조물들 중 하나와 같지 않은’이라고 하여야 한다. 당신들 아리우스주의자들은 ‘소생’을 ‘발생한 혹은 창조된’이라고 표현함으로써 ‘만들어진 작품’처럼 설명하였기 때문이다”(아리우스파 반박론, 2. 20). 잠언 8장 22장의 내용은 마치 아리우스주의자들의 주장이 옳은 것처럼 보인다. “여호와께서 그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일하시기 전에 나를 가지셨으며...”라는 내용이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 성경구절에 근거하여, 성자가 성부에 의하여 창조되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아타나시우스는 이 성경구절을 옳게 해석하는 일에 많은 지면을 할애하였다. “그는 성부를 가리켜 ‘주’라고 한다. 자기가 종이기 때문이 아니라, ‘종의 형체’를 지녔기 때문이다. 그는 성부로부터 유출된 말씀이므로,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다른 한편으로는 ‘주’라고 부르는 것이 옳았다. 성부의 일을 온전히 이루기 위해 오셨고, 종의 형체를 취하셨기 때문이다”(아리우스파 반박론 2, 50). 이 성경구절은 성자가 성부로부터 받은 사역에 대한 언급이란 설명이 옳은 것이다. 이와 같이 아타나시우스는 성자가 성부에 의해 ‘창조’된 분이 아니라, ‘유출’되었다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유출’은 ‘나왔다’ 또는 “낳았다‘라는 뜻으로서, 그가 본질상 성부와 동일함을 증명한 것이다. “그는 성부에게서 나셨기 때문에 독생하신 분이다. 또한 창조계로 내려오사 많은 형제를 만드셨기 때문에 ’장자‘이시다”(아리수스파 반박론 2, 62). 성자와 성부는 동질일 뿐 아니라 분리될 수도 없다. 서로 안에 계시는, 즉 상화 내재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창조된 것들은 성자 안에 참여함으로써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된다. 그러나 성자 자신은 참여에 의한 성자가 아니라, 성부의 본래의 소생이다... 그는 성부의 샘에서 나오신 생명으로서, 그 안에서 만물이 생명을 얻고 실재적 존재를 얻는다”(아리우스파 반박론 3, 1). 아타나시우스가 주장한 성부와 성자의 동일성은 ‘단일신론’을 주장하였던 사벨리우스의 이해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사벨리우스는 성자는 근본적으로 성부와 하나이지만, 그가 필요에 따라 성부가 되었다가 성자가 되기도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말씀이셨고 아무것도 그를 가두지 못했다. 오히려 그가 만물을 포괄하셨다. 그는 온 창조계 안에 계시되, 본질적 존재로는 그 모든 것으로부터 구별되어 계신다... 따라서 인간의 육신 안에 계실 때도 그 육신에 생명을 주셨다. 동시에 온 우주에 생명을 주고 계셨고, 만물에 임재하여 계셨다”(성육신에 대하여, 17). 성자는 분명 성부가 아니다. 그러나 본질은 하나이다. 성자는 성부에게 속한 것을 지니고 계신다. 성자는 언제나 하나님이셨지만, 인간의 몸을 입고 성육신하셨다. 자신이 하나님 됨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신성과 인성을 공유하게된 것이다.
2) 성경이 보인다 - 에스더 4:1-17; 요한복음 11:16; 디모데후서 3:12-4:8; 유다서 1:17-21 기독교 신자들은 이 세상의 공격을 받을 준비를 하면서 살아야 한다. ‘흑백논리’를 지닌 사람들이라고 손가락질 받으며 조롱거리가 될 수도 있다. 우리가 이해하고 믿고 따르는 진리의 원천은 성경이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치는 진리에 대하여 단호한 태도를 취하여야 한다. 반드시 믿어야 할 내용을 부인하거나 양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세상의 권세를 잡은 원수 마귀는 매우 지혜롭다. 하나님을 도전하여, 성도가 진리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일을 연구하고 실행하는 전문가이다. 이 사회는 ‘흑백논리’를 들먹거리며 성도들의 마음을 약하게 만들고 있다. 칼과 총을 대신하여, 새롭게 교회와 성도를 위협하고 넘어뜨리는 영적 무기이다. 일사각오의 신앙을 회복해야 한다. 가장 조심하여야 할 대상은, 중용 또는 평화주의이다. 신앙보다 사회적인 인간관계가 더욱 중요할 수 없다. 진리는 모든 것을 초월하여 존재한다. 분명히 하자.
성도들은 ‘흑백논리자’들이 아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유일한 진리의 수호자’들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하늘의 진리를 가슴에 품고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들은 자부심과 사명감을 동시에 지녀야 한다. covenantcho@yaho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