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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의 쓰나미 절제해야

제1계명 따라 마크 갈리가 진단하는 이미지에 노출된 크리스천이 맞는 사순절 묵상 소개
이미지의 쓰나미 절제해야

[사순절은 우리가 아는 것처럼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는 계절이다. 사순절의 전통은 초대교회가 예수님이 무덤에 계셨던 40시간을 경건하게 보낸 것에서 시작했다. 사순절은 최종적으로 325년 니케아공의회에서 부활절 전 40일(주일포함 46일)의 기간으로 정해졌다. 초대교회에서는 사순절 기간 동안 금식하는 것을 매우 엄격하게 지켰으며, 이 기간 동안에는 연극이나 공연을 보는 일과 각종 오락 행위가 금지됐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 크리스천들은 이 사순절을 어떻게 보내야할까? 40일이란 기간이 현대인들에게는 결코 짧은 기간이 아니어서 초대교인들처럼 매일 금식하며 엄격하게 사순절을 지키기 어려운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를 구원하는 복음이 그리스도의 고난과 뗄 수 없는 것이라면, 우리가 이 사순절을 아무런 감동과 느낌 없이 그냥 지난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일지 모르겠다. 크리스처니티투데이 편집장 마그 칼리(Mark Galli)는 ‘편집데스크’ 코너를 통해서, 크리스천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바로 ‘비주얼 이미지의 쓰나미’에 그냥 손쓸 틈도 없이 무방비 상태로 휩쓸려가고 있다고 진단한다(Can We Survive the Visual Tsunami? Could there be a deeper rationale for the first commandment?). 한마디로,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쏟아지는 이미지들의 홍수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이다. 여기에 사순절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있다. 그리스도의 고난을 생각하면서 우리의 보는 것들을 중단해야 한다. 절제하자는 것이다. 사순절의 미덕은 무엇보다도 절제다.]

사순절은 무엇보다도 크리스천으로서 자신을 돌아보는 절기이며, 십계명은 바로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전통적인 잣대다. 삶을 돌이켜보면 볼수록, 십계명을 있는 그대로 준수하지 못한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최근 들어 우리가 살고 있는 문화는 십계명의 1-3계명들에 복종하기가 거의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다. 하나님은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출20:4)라고 1계명을 주셨다. 형상이나 이미지를 금하는 이 명령은 ‘우상 숭배’를 멀리하기 위한 방편이라고도 해석한다. 따라서 1계명은 우상들을 숭배하는 것을 금지시키는 일종의 ‘전주곡’이라고만 보통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1계명은 바로 모든 이미지들을 금지한다고 해석돼야만 한다. 자크 엘륄(Jacques Ellul)이나 많은 학자들 역시 ‘이미지의 폭발’ 또는 ‘이미지의 쓰나미’가 본격적으로 진행되기도 전에, 형상이나 이미지에 대한 경배가 만연될 것을 우려했고, 이는 서구에서 ‘이미지 파괴’라는 전통으로까지 계승돼 내려오고 있다. 이미지들은 우리에게 모든 자극이 된다. 물론 신앙을 끌어올리는 전통적인 영역에서부터 연예, 오락 산업을 통해 시기심을 배양하고 더 나아가기까지 우리는 이미지에 흠뻑 빠져있다. 그러나 이미지를 통해 접하게 되는 것들을 우리로 하여금 수동적이 되게 만든다. 반면에, 말씀은 정신적 반응을 요구하게 되고 말씀(언어)과의 상호 작용을 통해 의미를 찾게 된다. 따라서 말씀 또는 구술되는 것들의 의미가 무엇인지 분별할 수 있고, 말씀이 창조하고자하는 사건이나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바로 이점이 왜 기독교 신앙이 말씀 중심인가를 알 수 있는 결정적인 열쇠다. 그래서 설교가 얼마나 중요한 복음 전달의 도구인지를 알 수 있다. 실제로, 바울은 복음 전파의 수단으로서 선포되어지는 복음의 중요성을 로마서 10장 14절에서 말했다: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따라서 예수께서 말씀이라고 이름 지은 것은 절대 우연이 아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이미지는 단번에 파악하거나 이해할 수 있는 쉬운 문제가 아니다. “예수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골1:15)라고 선포되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사는 이미지의 가치를 분명히 확언했다. 정작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미지를 통해 인식되는 것과 말씀을 통해 인식되는 것이 차이가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우리의 이미지들이 우리가 살아가는 데 알파요 오메가인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1분 아니 몇 초도 되지 않아서 우리는 또 다른 이미지를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TV, 번쩍이는 광고판, 잡지 등등에서 보게 된다. 물론 이미지들은 항상 우리 옆에 있어왔다. 실례로, 이미지는 책을 읽을 수 없는 이들을 가르치고 선도하는 도구로 사용돼왔다. 교회 벽화와 성당을 장식하는 많은 미술 작품들(스테인드글라스)은 그러한 목적으로 제작됐다. 그러나 엘륄이 1965년에, “그러한 이미지는 점점 더 누군가의 우주가 되어버리고, 이미지들의 증가는 현상의 본성을 계속 변형시켜오고 있다”고 지적했듯이(The Humiliation of Word), 이미지가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변해, 성경에서 금하는 경배의 영역으로까지 올라서게 된다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결국 '이미지 폭발'은 이미 진행되고 있다. 이제 이미지는 자신의 권리 회복을 넘어 이 시대의 지배적인 매체로 등장하면서 그 부작용이 도처에서 드러나고 있음은 부인하기 힘들다. 그리고 그 부작용을 우려하고 고발하는 목소리에도 우리는 귀를 기울어야 한다.

하지만 영상 매체에 부작용이 있다고 해서 현대 세계에서 우리는 텔레비전과 인터넷 같은 매체를 외면하고 살 수는 없다는 한계에 처해 있다. 이미지의 제작은 허용하되 그에 대한 경배는 금하는 좋은 예가 바로 놋뱀이다.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불뱀들에게 물려 죽게 되자 하나님은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민 21:8)고 명령하셨다. 이에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았고, 뱀에게 물린 자들이 그 놋뱀을 쳐다보고 살았다. 예수는 이 놋뱀을 당신의 십자가 사건의 예표로 사용하기까지 하셨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함이라”(요3:14-15).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놋뱀을 우상화하여 섬겼을 때, 구체적으로 말해서 놋뱀을 향해 분향했을 때,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한” 히스기야는 그것을 부수어 버렸다(왕하18:4).

결론으로, 하나님은 이미지 역시 은총을 전하는 수단으로 사용하셨다. 그러나 이미지만을 고집하게 되면, 수동적이 되어 창의적인 사고 활동이 저해를 받게 되고, 더욱 이미지에 노출되면 사고가 멈추게 된다. 대표적인 실례가 바로 범람하고 있는 포르노그래픽 이미지들이다.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신 것처럼, 이미지가 어디에나 편재하고 있는 세상에서 포르노나 폭력을 부추기는 이미지에서 벗어나 살아가기가 여간 어렵지 않게 되었다. 사순절을 맞아, 모든 형상을 만들지 말라는 이상한(?) 명령을 주신 하나님을 깊이 묵상하며, 한 걸음 더 나아가기를 소원한다. 바로 내가 무의식중이라도 클릭 한번으로 이미지를 보는 사소한 잘못들을 포함한 모든 죄들을 씻기시는 은혜의 충만함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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