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현 박사 (International Theological Seminary 총장)
나는 암 판정을 받은 후 투병하면서 경험하고 느낀 것들은 나와 같이 고통당하는 이들과 나누기 위해서 블로그를 시작하였는데 그 제목을 “희망을 찾아서”라고 하였다. 다른 질병이나 고난도 마찬가지겠지만 암과의 시간은 나에게 무엇보다도 나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나의 삶에 몇 년이 더 남아있는지 모르고 언제 다시 암이 재발할지 몰랐기에 매일 매일 나는 알게 모르게 우울증 그리고 두려움과 싸워야 했다. 희망은 나에게 저절로 찾아오지 않았고 소망은 내 육체와 삶 속이 아닌 다른 곳으로부터 와야 했다. 사도바울이 고린도후서 6장에서 말한 것처럼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살아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9절)라는 말이 내가 그 때 경험하였던 심정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었다. 죽음의 그림자 밑에서 삶 자체가 기적이었고 소망의 햇빛이 하나님의 은혜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은 죽은 자도 소생케 하고 시들어 가는 영혼에 새로운 입김을 불어넣을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그 때 체험하게 되었다. 희망은 언제나 “불구하고”(in spite of, 헬라어로는 δὲ δὲ )라는 전치사를 전제로 한다. 죽음에도 불구하고, 슬픔에도 불구하고, 가난과 헐벗음에도 불구하고...이러한 역경이 없다면 희망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사도바울이 말하는 영원한 소망의 존재도 인간의 역경이 결코 우리 사는 날 동안 끝나지 않음을 토대로 한 것일 것이다.
“나는 내 구속자가 살아 있음을 아노라”(욥19:25)라는 욥의 절실한 고백은 그가 빠졌던 깊은 절망감을 알지 못하고는 이해할 수 없다. 그의 절망감은 자신이 의지했던 모든 이들로부터 버림받음에서 온다. 하나님께 정의를 부르짖었지만 아무런 응답이 없고, 그의 가족, 친구들, 친척들은 그에게 등을 돌린다. 심지어 그를 섬기던 종들마저도 욥을 비웃으며 조롱한다. 욥은 종들에게 자기 말을 들어달라고 간청해야 되는 처지가 돼버린다(19:16). 하나님이 자기를 치신 즉 모두에게 업신여김을 받는 이가 돼버린 것이다. 홀로 된 그에게 남은 것은 오로지 죽음뿐이었으리라. 그러나 죽음의 문 앞에서 섰을 때 욥은 심판관이신 하나님이 아닌 새로운 분을 만나게 된다. 이 분은 그를 조롱하는 가족, 친구와는 달리 욥의 중개자이며 대속자(redeemer, 고엘)라고 소개돼있다. “안다”라는 히브리어 동사는 표면적인 지식이나 가벼운 친분관계가 아닌 인간의 깊숙한 내면까지도 나누는 친밀한 관계를 이야기한다. 따라서 욥이 이 구속자를 안다는 고백은 그가 지금까지 알고 있던 하나님이나 가족들을 초월하여 자신의 고통과 아픔까지도 내어놓고 의지할 수 있는 분을 새롭게 대면하였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히브리 성경에서 나타나는 대속자(고엘)는 혈연지간인 가족 중 가장 가까운 친척이다. 이스라엘인이 빈곤에 처해서 갖고 있는 재산이나 밭을 팔았을 때 대속자가 이것을 다시 되찾도록 도와주었으며 또 룻과 같이 남편을 잃은 과부를 아내삼아서 그 가문에 대를 잇도록 도와주는(보아스) 역할도 하였다. 다시 말해서 대속자는 가문의 구세주 역할을 한 것이다. 가부장적인 고대근동사회에서 부족장과 같은 지위를 가졌던 욥은 대속자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주위에 과부들과 고아들, 가난한 이들의 아버지가 되어주었으며 그들의 권리와 이익을 옹호해 주었다(29:12-16). 자기 가족, 친척뿐이 아닌 사회에서 소외된 많은 이들에게 대속자기 되어준 것이다. 그러나 욥이 고난에 처하게 되자 이제는 본인이 대속자를 필요하게 된다. 많은 이들을 위해 대속자의 삶은 살았지만 정작 욥에게 대속자가 되어 준 이는 과연 누구일까? 19장 25절과 26절에서 욥은 대속자가 살아계심을 알고 자기 몸에 있는 두 눈으로 하나님을 보게 될 것이라고 외친다. 다시 말해서 아는 것과 보는 것, 그리고 대속자와 하나님은 평행관계이며 대속자와 하나님은 동일한 분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겠다. 이러한 대속자의 하나님은 21절과 22절에서 욥이 언급하고 있는 심판의 하나님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어떻게 욥은 자신을 심판하는 하나님으로부터 대속자이신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었을까? 또 이러한 두 가지 모습의 하나님은 공존할 수 있는 것인가?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넘치는 진노로 그의 얼굴을 잠깐 가리웠으나 영원한 자비로 이스라엘을 긍휼히 여기실 것이라고 말한다(54:8). 하나님의 심판은 잠깐이고 자비는 영원이라는 뜻이다. 욥 또한 이러한 하나님의 자비를 알고 있었던 것일까? 우리 크리스천들은 성육신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온전히 담으신 대속자이심을 믿고 있다. 따라서 욥이 절망가운데 발견한 대속자도 성육신 이전의 예수님이라는 신학적 해석도 가능하겠다.
ITS 학생들 중 인도에서 온 수발이라는 학생이 있었다. 수발은 수업 중 우연히 교과서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는 예수님의 그림을 보게 되었는데 그 그림 밑에는 죄인들을 용서해 달라는 예수님의 기도가 적혀 있었다. 이 예수님의 기도를 읽고 그는 자기가 믿는 힌두교의 신들과 달리 죽으면서까지 인간을 사랑하시고 용서하시는 예수님이야말로 진정한 신이라고 믿게 되었다. 수발은 브라만(힌두교 카스트 제도에서 가장 상위 계층인 제사장들)이 대부분인 마을에서 처음으로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었으며 마을사람들은 그가 외국 종교로 개종하였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의 가족과 모든 관계를 끊었다. 이웃, 친척 중심인 대가족사회에서 이렇게 고립된다는 것은 그 사회에서 더 이상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음을 말한다. 수발의 부모는 더 이상 이웃들로부터 아무런 도움을 받을 수 없게 되었으며 수발과의 관계도 악화만 되었다. 이러한 수발에게 가족과 친척이 되어준 이들은 그가 다니게 된 성경학교 학생들과 선생님들이었다. 모든 이들에게서 버림받은 그에게 이 믿음의 공동체가 대속자가 되어준 것이다.
욥은 고통과 외로움 가운데서 대속자 되시는 주님을 만난다. 이 대속자는 자신을 대적하는 존재들과는 달리 이방인이 아닌 자기편에 서계시는 분이라고 욥은 고백한다. 역경이 우리를 억누르며 절망에 빠뜨려도 우리와 “함께”(with) 또는 우리를 “위해”(for) 계시는 분이 있기에 우리는 희망을 말할 수 있다. 희망은 혼자 존재하지 않는다. 사도바울이 말한 것처럼 희망은 믿음과 사랑과 항상 같이 존재한다. 그리고 희망, 믿음, 사랑은 공동체 안에서만 가능하다. 홀로 서 있는 믿음, 소망, 사랑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욥에게 하늘의 대속자가 그의 힘과 소망이 되어주셨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대속자이시기에 고난가운데서도 희망을 가질 수 있다. 자신의 몸과 생명을 바치면서까지 우리를 사랑하시고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신 우리의 대속자 예수 그리스도, 이 한 분만으로 우리의 삶은 절망에서 희망으로 바뀔 수 있는 것이다. 또 교회도 머리가 되시는 대속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 어두운 세상에서 희망의 빛을 발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하겠다. [정정: 제 1567호 7면에 게재된 본 원고의 소제목이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자가 누구인가?”였기에 바로잡습니다] james.lee@itsla.ed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