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진모 목사 (필라델비아한인연합교회)
기독교는 분열의 역사를 걸어왔다. 왜 그럴까? 교회는 죄인들이 모인 곳이니, 다 그런 것이고 그냥 눈감고 넘어가야할까? 오랜 세월동안 교회는 단 하나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사도들이 전해준 신앙의 전통으로부터 이탈하기 시작하였다. 가장 커다란 이유는 교회가 세워진 곳의 성도들이 자신들의 전통과 사상의 관점에서 복음을 이해하였기 때문이다. 결국 1054년에 동방교회와 서방교회로 분리되었다. 한 가지 분명히 할 것이 있다. 교회는 항상 ‘다른 관점’ 때문에 진통을 겪어왔다. 자, 다른 각도에서 함께 생각해보자. 교회안의 신학적 관점의 대립과 분열에도 불구하고 현재 우리가 사도적 신앙 전통을 ‘같은 관점’에서 공유하고 있음을 다행스럽게 여겨야 한다. 교회가 325년 니케야 종교회의로부터 받은 귀한 영적 유산이 지대하다.
▪ 예루살렘 공의회 325년에 니케야 종교회의를 회집하기 이전에 사도행전 15장에 기독교 최초의 공의회로 알려진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필요가 발생하여 자연스럽게 열린 모임이었다. 복음은 오직 하나밖에 없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고 모두 수용하였지만, 복음을 이해하고 적용하는 과정에 있어서 상반되는 그룹이 생겨났다. 특히 이방인들의 구원과 연관된 신학논쟁이 생긴 것이다. 유대교의 전통이란 관점에서 복음을 이해하려는 그룹과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바울의 생각을 따르는 그룹과 사이에 충돌이 있었다. 단순히 생각의 차이로 남아 있기에는 매우 예민한 문제였다. 결국 교회지도자들이 예루살렘에 모여 이 문제를 두고 신중하게 논의하였다. 모임의 결과는 다음과 같다. 이방인들은 할례를 받을 의무가 없다는 것과 구원은 율법이 아닌 오직 그리스도외 은총으로 가능하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예루살렘공의회가 지닌 역사적 의미는 지대하다. 교회 안에서 발생한 신학적인 문제가 성도들의 마음을 갈라놓는 것은 물론, 결국 서로를 향해 유발된 적대감이 감정적인 대립으로까지 진전되었다. 예나 지금이나, 교회 행정이나 제도에 대한 사소한 이견도 얼마든지 교회의 다툼과 분열을 가져올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이 가르치는 복음의 진리에 대한 이견으로 인한 분쟁은 내용과 성격에 있어서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교회는 복음의 진리를 지키는 사명과 사랑을 실천하라는 그리스도의 명령을 동시에 받았다 교회의 순결과 화합, 두 가지 모두 중요하다. 이중 하나만을 경시할 수 없다. 그러나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 닥칠 때, 교회는 침묵하고 남의 일인 듯 마냥 덮어둘 수 없다. 예루살렘공의회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함께 받은 자들이 함께 모여, 교회에게 주어진 진리를 재발견함으로서 화합을 도모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준 계기가 되었다. 이 모임을 통해 이방인 전도가 탄력을 받게 되었으며, 결국 교회를 통하여 복음의 진보가 이뤄진 것이다. 진리에 관하여, 교회가 서로 다른 생각을 존중하는 것은 결코 미덕이 아니라는 것을 후대에 가르쳐 준 것이다. 진리로 하나 됨이 진정한 성도의 연합이기 때문이다.
▪ 니케야 종교회의 325년, 교회지도자들이 니케야(Nicea)에 회집하였다. 요즘 정기적으로 모이는 노회나 총회와 같은 성격의 모임이 아니었다. 예루살렘공의회와 유사한 이유로 모인 것이다. 초대교회의 출발과 함께 성도들이 “그리스도가 누구인가? 과연 그는 하나님인가 사람인가?”에 대한 질문을 갖게 되었다. 문제는 자기 나름대로의 이해한 답을 고집하게 됨으로서, 결국 교회를 크게 혼란시킨 ‘기독론 논쟁’으로 발전하였다는 것이다. 특히 그 당시 유행하던 신플라톤주의에 영향을 받았던 사람들이 철학이란 안경을 끼고 복음을 이해한 것이 화근이 되었다.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갖는 자체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인다. 제대로 알아야 바로 믿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십자가에 달려 죽은 그가 ‘나의’ 죄를 용서하고 ‘나에게’ 영생을 허락하였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과정, 그리고 그를 주인으로 인정하고 믿음의 대상으로 삼고 살아가는 모든 과정에서 모든 성도는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지에 대한 분명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초대교회 교부들이 ‘정통 기독론’을 세우는 일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그들의 사역 가운데 실제적인 문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초대교회는 오래전부터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대한 성경적인 체계를 세워온 것이다. 325년에 니케야에서 종교회의가 열렸다는 것은 ‘기독론 논쟁’이 교회 내에서 끊임없이 가열되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해 이루신 복음 자체는 인정하면서도, 과연 십자가에서 피를 흘린 그의 정체성이 어떤지에 대한 이견으로 인하여 교회 안에 심한 다툼과 분열이 일어난 것이다. 비록 완전한 형태는 아니었어도 정통성을 지닌 초대교회 교부들이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에 대한 신학적 체계를 세워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지도자들이 모였다는 것은 교회 내의 상황이 시급하였다는 것을 한다.
▪ 니케야 종교회의와 콘스탄틴 대제 니케야 종교회의는 예루살렘공의회의 성격과 유사한 이유로 모였지만 매우 다른 점이 있었다. 당시 로마의 황제였던 콘스탄틴이 교회지도자들을 초청하여 소집하였다. 예루살렘공의회는 교회지도자들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모였다는 점에서 커다란 차이가 있다. 콘스탄틴은 동방에 있는 교회감독들이 주를 이뤘지만, 서방의 교회의 감독들도 초청하였다. 원래는 중앙아시아에서 모일 계획이었으나, 교회지도자들에게 편의를 제공하기 위하여 니케아에서 모인 것이다. 나아가서 그는 체제비를 국고에서 부담하도록 하였다.
콘스탄틴 대제에 대한 평가에 따라 니케야 종교회의에 대한 평가가 다르다. 크게 둘로 나누어진다. 그의 회심을 의심하거나 교활한 정치인으로 보는 견해를 가진 학자들의 평가는 매우 부정적이다. 결국 그가 교회를 장악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신학논쟁을 빌미로 공의회를 소집하였다는 것이다. 이와 반대로, 교회가 신학적인 논쟁으로 인해 안정을 찾지 못하자, 이를 원만하게 해결하고 결속하기를 바라는 좋은 동기로 소집하였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오랫동안 세례를 받지 않다가 죽음을 앞두고서야 받는 등, 콘스탄틴의 교회를 향한 진정한 의도를 의심할 만한 일들도 있다. 그러나 그는 분명 기독교에 대한 특별한 법령들을 제정하거나 교회의 법률을 인정하고 침범하지 못하도록 보호하는 일을 하였다. 나아가서 이교도들의 전을 몰수하여 교회에 건네주기도 하는 등, 전통적 교회의 모습을 훼손하는 일을 방지하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우리는 콘스탄틴의 정확한 동기를 알 수 없다. 그는 정치인이었기에, 정치적인 계산이 없었다고 말할 수도 없다. 단지 단순히 교회를 장악하기 위하여 모임을 가졌다고 속단할 수도 없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교회지도자들의 태도이다. 그 당시 교회지도자들이 과연 황제 앞에 전적으로 머리를 숙이고 그가 지시하는 대로 따라할 만한 어용이었을까? 아니다. 말할 수 없는 핍박과 순교의 시기를 지나면서 지켜온 신앙이었다. 황제가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관철하기 위하여 모임을 가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면 아마도 대부분이 그 자리를 떠났을 것이다. 그리고 황제와 거리를 두려했을 것이다. 니케야 종교회의에 콘스탄틴이 참석하였다. 멋진 옷을 입고 등장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 자리에 참석한 감독들이 참석한 후에 자기 자리에 앉았다. 박해로 인해서 몸이 불구가 된 성도들이 그 자리에 있었다. 이미 순교한 자들의 유골도 그곳에 있었다. 이 모임의 성격을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교활한 정치인이었다고 가정하여도 결코 거부할 수 없는 사실이 있다. 하나님께서 이 모임을 주관하셨다는 것이다.
콘스탄틴의 동기가 어떠하였던지, 교회를 심하게 분열시키며 성도들의 신앙을 흔들어 놓았던 '기독론 논쟁'이 니케야 회의 이후에 종식되었다. 교회지도자들이 함께 모여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지에 대한 분명한 정의를 내린 결과가 오늘날까지도 변함없이 내려오고 있다. 하나님께서 니케야 종교회의를 당신의 영광을 위하여 소중한 도구로 사용하신 것이다.
2) 성경이 보인다 - 야고보서 4:13-17; 이사야 29:15-16; 예레미야 23:23-24 하나님은 섭리하시는 분이시다. 그는 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을 계획하신대로 이끌어 가시는 분이시다. 그가 지닌 능력과 지혜는 우리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의 생각에는 우연하거나 결코 옳지 못한 동기로 일어난 일이라고 확신하여도,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것을 당신의 손에 넣고 원하시는 대로 이끌어 가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믿음을 지녀야 한다. 우리의 인생과 교회가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시고 보존하시며 다스리시기 위하여, 미리 계획하신 대로 일을 성취하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교회 안에 교리적 대립을 포함하여 연합을 깨뜨리는 일들이 생겨날 때, 우리는 더욱 겸손히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며 의지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과거 교회역사를 돌아보며 하나님께서 위기 속에서 교회를 어떻게 도우셨는지 자세히 관찰하는 것을 결코 빼놓을 수가 없다. covenantcho@yahoo.com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