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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의 신학: 욥기에 대한 묵상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자가 누구인가?

이승현 박사 (International Theological Seminary 총장)

고통가운데 있는 이가 자신의 의로움을 주장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사도바울이 로마서 3장에서 말한 것처럼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모든 사람들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다고 하였는데 어려울 일이 우리에게 닥쳤을 때 우리는 지난 과거의 실수나 잘못들을 돌이켜보며 그 잘못들 때문에 우리에게 고난이 닥친다고 생각하기 쉽기 때문이다.

심은 대로 거둔다는 격언처럼 우리의 고통도 우리가 과거에 심은 씨앗의 결과라는 생각이 우리의 마음에 깊게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겠다. 따라서 고난가운데 있는 나는 죄와 잘못으로 하나님의 심판이 나에게 왔다고 본능적으로 반응하게 된다.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자가 과연 어디 있겠는가? 죄를 짓지 않은 이가 세상에 어디 있는가? 원인이 없는 병이 없듯이 고난에도 분명히 원인이 있다는 확신은 우리자신을 수술대에 올려놓고 진단을 내리기를 원한다. 병의 진단이 치료의 시작이라면 죄의 고백은 고난이라는 난관을 이해하고 극복하려는 의지라고도 볼 수 있겠다. 하나님께서는 의로운 분이시니 잘못이 있다면 우리에게 있지 않겠는가? 요한1서는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다 라고 말한다(1:10).

욥의 친구 엘리바스는 밤에 환상가운데 그에게 나타난 형상이 “사람이 하나님보다 의롭고 창조주보다 더 깨끗하겠는가?”라고 하는 음성을 들었다고 말한다(4:16-17). 엘리바스는 자신이 믿고 의지하는 하나님은 교활하고 지혜로운 자를 낮추시고 낮고 가난한 자를 높이시고 구원해 주신는 분이라고 고백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징계는 잠시이며 모든 환란에서 구원하실 것이라고 확신한다. 맞는 이야기 아닌가? 신학적으로 너무나 옳은 이야기를 엘리바스는 환상과 함께 자신이 연구하고 조사해본 결과 얻은 결론으로 욥에게 내어놓는다. 그러나 욥은 자신의 고통과 슬픔이 신학적으로 설명해서 이해하고 극복할 수 있는 개념이 아닌 실존적인 위기임을 알린다. 엘리바스는 욥에게 하나님의 섭리 안에 놓여있는 고통의 의미와 목적을 알리려고 하지만 심한 고통에 있는 욥에게 미래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현재의 고통이 미래의 희망도 인생의 의미도 앗아가 버린 것이다. 생사의 기로에 서있는 욥에게 절망과 인생의 허무함이 엄습한다. 죽음의 난간에 서 있는 이에게 인간의 죄와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논하는 것은 벌써 밟힐 대로 밟히고 상할 대로 상한 그의 영혼에게 더 아픔을 주는 불의한 행동인 것이다(6:29).

욥의 친구들의 신학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이 신학의 잣대를 언제, 어떤 상황에, 그리고 누구에게 적용해야하는가 하는 해석학에 있어서의 문제를 욥은 제시하고 있다. 고통을 단순히 죄의 결과 또는 하나님의 훈계 또는 훈련으로 설명하려는 노력은 고통 받고 있는 이의 아픔을 사소화 시키며 그에게 더 무거운 짐을 지어주는 결과를 낳을 수 있는 것이다. 욥이 구하는 신학은 따라서 정통을 주장하며 인간의 고통의 삶에 고개를 돌리는 차가운 신학이 아닌 비정한 고난의 현실에 대항해서 따뜻한 온기를 불어넣어 줄 수 있는 연민과 자비의 신학이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임을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우리의 죄를 알리는 메시지는 필요하다. 하나님께 회개로 돌아옴이 하나님과의 화해와 치료의 시작임은 분명한 것이다. 그러나 이미 고통에서 헤매는 이가 필요한 메시지는 하나님의 위로의 메시지이다. 이사야 40장에서 말하는 것처럼 그들 마음에 와 닫는 소식을 전해야 하는 것이다.

필자도 2006년에 암 진단을 받고 하나님께 많은 죄의 고백을 하며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를 빌었다. 또 내가 잘못한 이들에게도 다가가서 그들의 용서를 빌었다. 이러한 하나님과 이웃들과의 화해가 나의 마음에 평화와 치유를 가져온 것은 사실이다. 고난가운데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라고도 할 수가 있겠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 질병이 하나님께서 나를 훈련시키시려는 수단이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주위에 몇몇 아는 분들도 격려하는 의미에서 하나님께서 나를 크게 쓰기위해서 이러한 고난을 주신다는 말씀도 하셨다. 하지만 이러한 “격려의 말”들은 나에게 오히려 더 큰 부담으로 다가왔다. 하나님께서는 나의 시험감독이고 나는 인생에 가장 큰 이 시험을 극복해야한다고 생각해야했기 때문이다. 한 친구목사가 나에게 전화를 걸고 어떻게 지내냐고 물어봤을 때 나는 하나님께서 이 시험을 통해서 무엇을 가르치려하시는지 배우려고 한다고 말하였다. 그러자 그 목사는 나에게 여기서 배울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하였다. 단지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기억하라고 하였다. 나는 이 말을 들으면서 나의 짐이 가벼워지는 것을 경험했다. 하나님은 나의 시험 감독관이 아닌 사랑과 은혜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통해 해방감을 느끼게 되었다.

욥은 그의 친구들이 들었을 때 불안하고 불쾌할 만큼 자신의 결백함을 주장하였다. 나는 욥의 결백함을 믿는다. 욥이 고통가운데 밤을 지새우며 자신을 돌아보고 얻은 그 고백은 진실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고난은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정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다른 사람들을 의식해서 체면과 외관을 유지하려던 노력들이 다 무의미해지며 진정한 나와 대면하게 된다. 고통을 통해 인간은 진실해질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욥의 결백함은 따라서 그의 자존심 또는 불경함의 표현이 아닌 그의 신앙의 고백이라고 나는 본다. 자신의 결백함을 주장함으로서 욥은 그의 고난이 응보적인 신학으로 설명할 수 없음을 나타낸다.

욥은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지 못함을 부정하지 않는다(9:2). 그러나 욥이 경험한 하나님의 의로움은 인간이 이해할 수 없으며 저항할 수 없는 힘이다(9:19). 욥이 아무리 결백함을 주장해도 하나님의 절대적인 자유의지 앞에서는 굴복할 수밖에 없는 것이 하나님의 의인 것이다. 욥의 친구들과 같이 하나님의 섭리를 안다고 말하며 그 섭리에 자신의 경험을 종속시키기 보다는 자신의 양심과 경험에 충실하며 그것들의 진정함을 부정하지 않지만 인간의 의보다 뛰어난 하나님의 의의 신비를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 차원 높은 신앙임을 욥은 말하고 있다. 사도바울이 로마서 6장에서 역설적으로 질문하기를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라고 했듯이 욥은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기 위해 자신이 살아온 의로운 삶을 부정하기를 거부한다. 진정한 하나님의 의는 인간의 의로움에도 불구하고 나타나는 의이다. 우리 자신과 이웃들을 형식적인 죄의 틀에 가두며 하나님의 의를 논하기보다는 하나님의 의에 대한 우리의 무지를 인정하며 우리의 의가 결코 하나님의 의를 부정할 수 없음을 인지하는 것이 우리 신앙의 바람직한 시작이 아닐까 생각된다.

james.lee@itsla.e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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