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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을 되돌아보는 성탄절

성 탄 설 교

김 현 선교사 ( 캄보디아 선교사)

미국의 법이 성탄절은 기독교 의식이 아니라 세속적 전통이라는 해석을 내렸다. 이것은 기독인들에게는 실망스럽고 개탄할 일이다. 하지만 미국의 법 해석으로는 부인할 수 없는 기정사실이 되어버렸다. 일의 발단은 이렇다. 1990년 크리블랜드 주, 변두리에 위치한 솔론 시 소속, 오하이오 고등학교 이사들이 학교에서 성탄절에 관한 모든 행사를 금하는 일에 학부모들을 큰 충격에 빠졌다. 이는 학교 이사들이 학교에서의 모든 성탄절 기념행사를 금한 것이다. 이유인 즉 미국에서 정교분리라는 법정신에 어긋난다고 확신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분개한 학부모들은 이의를 제기하여 법정에 호소하기에 이르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탄절이 기독교행사이므로 학부모들이 패배할 것으로 예측했었다. 그러나 예상을 뒤엎고 학교이사들이 법정싸움에서 패배를 하였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법정의 성탄절에 대한 해석이었다. 법정 안에 서로의 공방을 마치자, 법정은 성탄절이 기독교 전통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세속전통으로 먼저 시작되었다고 하는 해석에 신빙성의 무게를 두고 결정을 내린 것이다. 그때까지 성탄절은 기독교의 전통이라고 믿어 온 많은 기독인들에게는 적잖은 충격이었다. 재판에서 이겨 승리를 만끽해야 할 기독인들이 성탄절이 기독인들의 전통이 아니기에 재판을 승소할 수 있다고 하는 사실에 대해 혼란함을 금치 못했을 것이다.

실제로 여러 기독교 학자들 간에도 성탄절의 시초에 대하여 의견이 분분한 것은 사실이다. 성탄절의 기원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한 자들의 이론에 따르면, 성탄절은 고대로마의 겨울 축제로써 세턴”이라는 농경신(agriculture deity Saturn)을 기리는 축제행사(Saturnalia)에서 기인하였다고들 한다. 통상 12월 17-23일까지 축제기간으로 정하여 이때 개인적으로 선물을 주거나 각종 파티를 베풀며 카니발을 즐겼다고 한다. 물론 이 행사가 성탄절의 시초라고 하는 것 자체도 여전히 의견일 다름이다. 여기서 한번 잠시 성경으로 돌아가 성탄절 날짜의 타당성의 문제를 생각해보자. 과연 12월 25일이 주님의 탄생 날로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가? 그것은 결코 아니다! 성경 안에는 어느 구절에도 예수의 탄생이 12월 25일이라는 정확한 기록이 없다. 구약 전체를 통하여 주님의 탄생에 대하여 비교적 상세한 예언을 하였지마는 그 어디에도 정확한 날짜를 예언한 곳은 없다. 그리고 신약시대에 와서도 주님은 물론이고, 사도 바울과 주님의 12제자들의 가르침에 성탄절의 기념에 대한 명령은 전무하다. 더 나아가 어느 초대교회에서도 주님의 탄생일을 기념하는 전통도 발견되지 않는다. 따라서 성탄절에 대한 기념의식은 초대교회 이후에 언제인가 기독교의 전통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렇게 성경으로도 확실한 주님의 탄생일을 알 수가 없고, 성탄절의 이교도적 축제라는 분분한 의견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대부분의 충실한 기독교인들과 교회들은 마음 속 깊이 성탄절을 기념하고, 거룩하게 지키려고 애를 쓰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 이유로는 성탄절을 기념할 때 주님 탄생의 정확한 날짜에 의미를 두기보다는 “구세주가 이 땅에 오셨다”라는 구속에 대한 예언 성취에 모두가 감격하고 감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주님 자신이 성만찬을 베풀면서 주께서 다시 오기까지“나를 기념하라”(눅22:19)라고 분명히 명하셨기에, “주님이 오셨다”라는 사실을 기념하는 것이야말로 성탄절을 맞이하는 성도들에게 커다란 의미를 가져다준다. 바로 이 사실, 즉 “주님의 메시아로서의 탄생”에 대하여 신약의 네 복음서는 모두 동일하게 강조하고 있다. 특별히 마태기자는 주님을 핍박한 유대인들을 향하여 여러분들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게 하신 예수가 그토록 기다렸던 메시아 주님이라는 사실을 강변하는 글로 일관하였다. 그의 복음서 27장 54절에서 주님의 무덤을 지키던 이방인들인 로마병정들의 말을 빌어 “과연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라는 고백을 기술함으로 절정의 변증적 메시지를 남긴다. 마태복음 전체가 초지일관 “예수는 곧 그리스도, 메시아”라는 사실을 변증하였다. 이 주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변증이 마태가 복음서를 기술하는 목적이다. 본문은 메시아의 탄생을 구체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주님으로 오신 사실이 가져다주는 성탄절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 오늘 본문을 통하여 이에 대한 하나님의 성경 말씀이 주는 몇 가지의 중요한 교훈을 얻어 보도록 하자.

첫째, 저자 마태는 예수 탄생의 서막(1:1-17)에서 예수는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아브라함의 후손이며(창17: 1f; cf. 15: 1f), 또한 다윗 왕의 후손임을 분명하게 밝히면서, 그 예수가 예언되어진바 곧 이스라엘의 진정한 그리스도, 구세주로 오신 분임을 강조하였다(렘23:5; 33: 15; 롬1:3).

언약(Covenant)은 하나님께서 친히 그의 백성들과 구원을 위한 법적인 구속력이 있는 계약을 행사하셨기에 주님의 하나님께서 스스로 이행하신 것이다. 그 성스러운 계약에 따라 하나님께서는 마침내 계약백성들에게 예수를 구원주로 보내주신 것이다. 따라서 마태는 그의 복음의 서막의 도입과 종결(1:1,18) 그리고 본문 전체 모든 내용이 “예수는 죄인들의 메시아”라는 주제로 기록함으로써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계획과 섭리가운데서 이 땅에 구세주로 보내지셨음을 분명히 변호하였다. 이것은 곧 사도바울의 가르침과도 일치하였다(엡1:1-14참조). 바로 이 구세주를 유대인들이 불순종과 무지로 인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한 것이다. 하나님은 마태를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교훈으로 남기어, 두 번 다시 유대인 같은 실수가 반복되지 않도록 철저하게 알리고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무지몽매함으로 비극적인 죄인의 역사가 되풀이 되지 않도록 언약 백성으로서 우리에게 오신 구세주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점검해 보는 것이 성탄절의 의의이다.

둘째, 따라서 저자 마태는 예수의 오심은 구세주로서의 구속의 역할, 곧 세상의 죄에서 인생들을 구원하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철저하게 증거하고 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21). 예수는 구속의 주님으로 예언되어진 대로 죄인의 속죄를 위하여 오신 것이다. 곧 이사야 53장 4-5절에 이미 메시아의 고난을 예언한 바를 그대로 이루시려고 오신 것이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이러한 구세주에 대한 예언이 예수의 공생애 중에 성취된 사실을 마태는 그의 복음서의 종반부에서 구체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은 당시 대제사장이나 장로들이 비난하는 바처럼 죄인으로서의 죽음이 아니라, 메시아로서의 인간의 죄를 대속하는 행위로서의 고난을 설명한 것이다. 이에 히브리서 기자 또한 예수의 이러한 구속의 사실에 동조하며 예수의 고난과 죽음의 목적을 분명히 하였다. 그는 “… 이제 자기(예수)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히9:26-28)라고 기술하였다. 예수는 진정으로 죄인을 용서하고 구원케 하시는 구세주로 온 것이다. 그래서 진실한 성도들은 “기쁘다 구주 오셨네”를 고백하며 찬양해왔던 것이다. 바로 성탄절은 세속의 전통과는 상관없이 이러한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전통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셋째, 저자 마태는 예수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에 대하여 변증하고 있다.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20). 예수는 단순한 한 인간이 아니라 그는 곧 100% 하나님이요, 또한 100% 인간으로 탄생한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기에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되었고, 또한 육신을 빌어 탄생하여 육신에 속하였음에도 죄 없이 태어났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법이 요구하는 희생양의 제물로써 순수성을 유지할 수 있었고, 또한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 아들로써의 하나님의 섭리가운데 신적인 이적과 기적을 행사할 수 있었던 것이다(8-9장 참조). 이러한 기적과 이적의 사실들이 예수는 오실 메시아임을 증명한다고 마태는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들을 예수가 생애 전체를 통해서 행하였으니 그가 하나님이 아들이 아니면 누구이겠는가? 그래서 마태는 예수의 신적 이적의 역사들을 논리 정연하게 나열하고 있었다(cf.4:23-24). 그런데 언제인가부터 우리 주변에서 예수를 하나의 위대한 인물이나 예언자 정도로 치부하는 사상이 교계를 좀먹어왔다. 따라서 성탄절을 맞이할 때마다 모든 성도들은 성삼위일체 가운데 2위 되신 하나님의 아들께서 이 땅에 복음을 알리고 죄인에 대한 용서와 구원을 위하여 오심을 새삼 마음에 기려야 할 것이다. 예수는 결코 이 땅에 위대한 위인 중의 한 사람으로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구원주, 그리스도로 오신 것이요, 죄를 대속할 희생양으로 오신 것이다.

넷째, 저자 마태는 예수의 탄생으로부터 하나님의 구원사역들, 그리고 죽음, 부활, 그리고 승천, 이 모든 구속의 사건들이 결코 우연히 발생한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이 오래 전부터 섭리가운데 계획하신 대로 역사의 흐름 속에서 구체적으로 예언되어 기록되어왔고, 바로 그 하나님의 말씀들이 때가 되어 성취되었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증거하고 있다: “이 모든 일의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22). 예수의 모든 사역은 이미 오실 메시아의 사역으로 구체적으로 구약에 그 예언들이 구체적으로 기술되었고, 그 기술된 말씀에 따라 메시아로서의 탄생을 강조하였다. 주님의 사역은 메시아로서의 하나님의 사역이요, 하나님의 구속사역을 성취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록된 말씀으로 강변하고 있다. 따라서 누구든지“예수가 메시아다”라는 역사적 사실을 부인한다면 결과적으로 성경의 말씀 또한 부인되어지는 것이다. 애석하게도 이 시대에는 예수의 메시아 되심도,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도 동시에 부인되고 있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동시에 그 기록된 말씀이 증거하는, 예수의 메시아로 오심도 믿어야 한다. 허나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다고 주장하는 그 유대인이 주님을 버렸었기에 마태는 오늘날 주님오심을 역사적 사건들로 믿는 성도들에게는 성경의 하나님 말씀됨도 철저히 믿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성경의 증거 없이 어찌 예수의 메시아로 오심을 알 수 있겠는가? 예수가 메시아로 오셨다는 소식을 깨닫지 못하면서 어찌 성도라 할 수 있겠는가? 따라서 성도들은 성탄절을 기릴 때마다 주님의 오심을 기록한 하나님의 성경말씀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다섯째, 마지막으로 마태는 주님의 오심의 또 하나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의 계약백성들과 함께 더불어 사신다는 사실을 전해주고 있다: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 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23). 이것이야말로 죄인들에게서는 가장 큰 복이 되는 것이다. 죄인과 함께 하셔서 위로하시는 주님!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롬8:31)라는 사도바울의 고백을 보더라도 익히 알 수 있는 일이다. 마태복음 서문에서 밝힌 대로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계약백성으로 사는 사람들에게 “나는 너희의 주가 될 것이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참조:창12; 15; 17장)라는 신적 계약 속에는 왕으로서 백성을 통치하는 책임을 완성하는데 있다. 그러기 위해 하나님의 나라의 임재 가운데 왕으로 그의 백성과 더불어 영원히 함께 사는 것이다(예: 동방박사의 경배).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구약의 계시 가운데 나타난 계약을 이루시고, 새로운 은혜의 계약을 세운 것이다(참조:마태26: 26-28; 눅22: 19-20; 고전11: 23-26)). 이 땅에서부터 저 천국까지 하나님께서는 이미 그리스도 주님과 더불어 성령님의 도래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과 함께 하시고 통치하심을 밝히고 있다. 그러기에 예수는 구주요, 만유의 구주되신 것이다. 요한도 그의 복음서에서 이 사실을 잘 강조하고 있다. 그의 복음서 서문에서 예수는 하나님이요, 또한 하나님과 함께 하신 하나님으로 묘사하고(1:1,2), 그는 창조주이시며(1:3), 그가 세상에 오셨고 그의 백성가운데 함께 거하셨다(1:14)는 사실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마태의 예수의 구속주 되심에 대한 변증과 일치한다. 예수의 메시아적인 역할은 구약의 예언대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29)라고 서술하고 있다. 성탄절에는 예수께서는 희생의 제물로 오신 메시아임을 깨달아 마음을 정하게 하고, 세상적인 화려한 행사에 집착해서는 안될 것이다. 주님의 희생을 가슴에 새기는 성탄절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인생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와 인도하심을 믿어야 할 것이다. 마태 기자가 성령의 감동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기술함에 있어서, 예수가 메시아임을 깨닫지 못하고, 그를 십자가에 못박게 하는 비극적인 역사를 상기하면서 그의 복음서의 서론 부분에서 위의 다섯 가지의 교리를 강조하고 있다. 이 생명 같은 교리를 믿는 것이 우리 신실한 교인의 믿음의 증표이다. 이를 성탄절을 맞이하는 모든 성도들이 새삼스럽게 상기해야 할 것이다. 교회마다 성도 개인마다 성탄절을 기리는 방법이 다를 지라도 그 밑에 흐르는 중요한 사상은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유대인들이 져버린 오만한 역사를 되풀이해서는 안될 것이다.

모두가 기억하자! 이 시대의 기독교 역사가운데 1)성경의 무오함이 부인되었고 2)예수의 동정녀 탄생이 부인되었고 3)예수의 신성의 부인과 동시에 주님의 속죄적 죽음이 부인되었고 4)예수의 육신의 부활이 부인되었고 5) 예수의 메시아로서의 기적의 사건들이 부인되었다. 이러한 세대에 사는 성도들이 어찌 유대인들의 실수를 고발하는 마태의 강변을 잊어서야 되겠는가? 이것이 과연 한 복음서의 기자를 통한 2000년 전의 기독인들의 신앙고백사건으로 치부해 버릴 것인가? 아니면 현 시대를 개탄하며 새롭게 도전하는 하나님의 성령의 음성으로 들을 것인가? 이번 성탄절을 맞이하여 한번쯤은 깊이 생각하고 반성하는 계기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영적으로 혼란시대에 성탄절을 맞이하는 우리 성도들에게 마태 기자의 손을 빌어쓰신 하나님의 말씀의 경고이다. 이것이 주님께서 성탄절을 맞이하는 우리들을 향한 마음일 것이다.

마태 기자가 성령의 감동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기술함에 있어서, 예수가 메시아임을 깨닫지 못하고, 그를 십자가에 못박게 하는 비극적인 역사를 상기하면서 그의 복음서의 서론 부분에서 위의 다섯 가지의 교리를 강조하고 있다. 이 생명 같은 교리를 믿는 것이 우리 신실한 교인의 믿음의 증표이다. 이를 성탄절을 맞이하는 모든 성도들이 새삼스럽게 상기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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