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는 지금 루터의 종교개혁 500주년(2017년)을 바라보고 있다. 우리는 항상 새로운 교회개혁을 요구받고 있다. 우리 자신이 그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다. 무엇 때문인가? 교회와 크리스천들이 교회다움과 크리스천다움을 많이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교회다움의 핵심은 무엇이며, 크리스천다움의 핵심은 무엇인가? 교회다움의 핵심은 교회가 이 땅에 현존하는 그리스도의 몸, 하나님의 백성, 성령의 집으로서의 본질을 간직하고 드러내는 데 있다. 크리스천다움의 핵심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따르는 제자들로서, 용서받은 죄인들로서, 세상 속에서 사랑과 정의와 평화를 구현하며 빛과 소금의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는 그러한 교회의 교회다움과 크리스천의 크리스천다움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교회 안에서, 그리고 크리스천들에게서 세상의 냄새가 너무 많이 난다. 교회의 지도자들인 목사와 장로에게서 세상과 구별된 ‘거룩함’을 찾아보기가 어렵게 됐다. 따라서 종교개혁주일을 맞으면서, 다시 역사를 되짚어봐야 한다! 성경에 나오는 가장 중요한 단어 중 하나는 기억('Remember')이다. 바로 종교개혁을 일으킨 마르틴 루터를 기억함으로, 개혁의 물꼬를 열어야한다.]
중세 후기, 교회가 영적 혼돈에 빠져있을 때 사제이자 교수였던 루터는 성경을 깊이 연구하다가 로마서에서 복음을 재발견한 후 자신의 깨달음을 “이신칭의”라는 교리로 정리했다. 그에게서 특징적인 것은 믿음을 ‘전적인 신뢰’로 보는 새로운 이해였다. 그래서 오직 성경, 오직 은혜, 오직 믿음(Sola Scriptura, Sola Gratia, Sola Fide)을 원리로 하는 개신 교회(Protestant church)가 탄생했다. 꿈에도 그리던 로마 여행에서 참회자들의 형식적 모습과 수도사들의 무지한 모습에 크게 실망하고 돌아온 루터는 대학에서 곧이어 신학박사 학위를 얻은 후, 비텐베르그(Wittenberg) 대학에서 정식으로 성경과 신학을 강의하기 시작(로마서와 시편)했다. 그는 이 대학 동쪽 끝에 자리 잡은 어거스틴 수도원의 작은 다락방에서 숙식하면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성경의 의미를 탐구했다. 그의 평생의 숙제인 구원에 관한 물음과 씨름하던 중 어느 날 소위 탑의 경험이 이루어진 바, 이는 성령의 조명을 힘입어 성경에서 복음을 재발견함을 의미한다. 이 복음 신앙이 종교개혁 신학의 중심을 형성했고 그로 하여금 종교개혁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게 했다.
그는 무엇보다도 인간의 전적 부패 특히 의지의 부자유를 말한다. 즉 인간의 어떤 한정된 부분에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전 인격이 자기중심적으로 정위(Self-oriented)돼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죄악이란 하나님 존전에서 보여지는 인간의 적나라한 모습인 것이다. 인간의 의지 자체가 자기중심적으로 노예화돼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수행할 능력이 그 안에 없다. 따라서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한 모든 성취는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다는 것이다. 둘째, 하나님의 의와 이신칭의이다. 그는 앞서 언급한 ‘탑의 경험’을 통해 로마서 1:17 ‘하나님의 의가 복음에 계시됐다’는 구절에서 복음에 대한 새로운 통찰력을 얻었는데, 그가 말하는 하나님의 의는 단순히 죄인이나 최선을 다하지 않는 사람을 벌하시는 의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통해서 얻어진 수동적 의이다. 즉 심판하시는 의가 아니라 구원하시는 의다.
이 의는 하나님이 죄인을 향해 베푸시는 선의(Good will)요 호의(Favor of God)다. 이 새롭게 이해된 하나님의 의는 결국 죄인에게 은혜(Gratia)로서 나타나며 이 은혜는 오직 믿음(Faith)을 통해 죄인에게 매개된다. 즉 믿음은 거저 주시는 은혜라는 선물을 받기 위해 죄인이 내미는 마음의 손이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인정함을 받는 소지가 우리 밖에 있다. 즉 그리스도께서 성취한 하나님의 의가 믿음을 통해 죄인된 우리에게 전가된다. 즉 우리는 전혀 의롭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의롭다 여김을 받는 것이다.
루터의 종교개혁사상은 철저히 하나님 중심이었다. 그의 종교개혁 작업의 핵심은 하나님을 인간의 눈으로 판단하고 그 위에 자신의 종교를 쌓아가려는 로마 가톨릭교회에 대항해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는 것이었다. 사실 중세 로마 가톨릭교회라고해서 성경의 권위와 성령의 감동(영감)에 대해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또한 선행하는 하나님의 은총을 가르치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믿음의 중요성에 무지한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루터에게 있어서 급진적이었던 것은 이 말들 앞에 붙은 한 작은 단어, “오직”(sola)이었다.
루터는 로마 카톨릭교회가 이것들을 말하면서도 실은 그 밑바닥에는 인간 중심의 종교가 사로잡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당시 로마 가톨릭교회에서는 성경의 권위를 말하면서도 성경을 해석하는 교황의 권위를 그 위에 세웠으며, 은총을 하나님이 주신다고 말하면서도 그것을 인간이 율법의 의를 쌓는 데 도움을 주는 하나의 ‘능력’으로만 이해했고, 믿음이 중요하다는 말을 처음에는 시작하다가 어느덧 ‘선행(善行)으로 형성된 믿음’을 강조했던 것이다. 그러나 루터는 성경은 그 문자가 자명하고 단순하기 때문에 어느 누구라도 이해할 수 있는 책으로서, 자신 이외의 다른 어떤 해석자도 중요로 하지 않는다고 하였으며(성경만으로!), 은총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죄인들을 죄인에서 의인으로 바뀌는 것은 아니지만, 그리스도 신앙을 보시고 의인으로 인정해주시는 ‘호의’(신학용어로 이를 '칭의'라고 한다)로 이해했고(은총만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은 단번에 모든 율법을 성취하며 인간을 의롭게 한다고 하였다(믿음만으로!). 결국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은 교권주의에 대한 저항이기도 했다. 신학과 교리의 최우선의 권위는 성서라고 주장함으로써 교황의 권위는 절대적이지 않음을 밝힌 것이다
결론으로, 교회는 다시 루터의 개혁 원리에 입각한 ‘개혁 운동’으로 돌아서야 한다. 바로 기독교는 어느 곳,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제도’로서가 아니라 ‘운동’이었기 때문이다. 진정한 교회는 딱딱하게 굳어 있는 싸늘한 ‘조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특별한 목적을 위해 불러내신 사람들의 살아있는 ‘몸 곧 생명체’이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 또는 기독교 신앙은 본질상 '명사'가 아니라 '동사'이다. 그러나 항상 ‘운동’으로서의 기독교는 ‘제도화’에 묶여버린다. 그러다가 다시 “운동”으로 거듭된다. 교회가 제도화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와중에도 그 속에서 다수 또는 소수의 ‘남은 자’들을 통해 시대 시대마다 끊임없이 새로운 운동이 출현한다는 것은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전히 교회의 머리되신다는 것과, 굳어져가는 제도권 교회 속에서 여전히 일하고 계신다는 반증이 아닐 수 없다. 그러기에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