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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초대 교회 - 고난의 끝, 방황의 시작 (1)

조진모 목사 (필라델비아한인연합교회)

▪콘스탄틴 - 최초의 기독교 황제 “콘스탄틴이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삼았다” 또는 “기독교가 로마를 점령하였다”라는 표현은 이미 보편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의 역사를 바꾸어 놓았다는 것이다. 성도들이 법적인 보호아래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3세기 동안 지속되던 교회에 대한 핍박이 그로 인하여 중단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콘스탄틴이 로마 시민들을 기독교 신앙의 길로 인도하려는 목적을 가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여야 한다. 엄격한 의미에서 ‘밀라노 칙령’은 기독교를 로마 제국의 공식적인 종교로 선언한 것이 아니다. 황제의 적극적인 후원에 힘입어 ‘로마 제국의 특혜를 받는 종교’가 되었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다.

그럼에도 유세비우스는 “교회사”를 읽는 독자들로 하여금 콘스탄틴의 정치적, 군사적 승리가 마치 기독교의 종교적 승리였다고 생각하도록 유도한다. 그는 하나님께서 세계를 통일하고 장악하고 있던 로마 제국을 통한 효과적인 복음 전파를 위하하여 콘스탄틴을 대리인으로 세우셨다고 확신하였다. 그러므로 그의 승리는 하나님의 승리이자 기독교의 승리이다. 콘스탄틴은 최초의 기독교 황제이다. 그렇다면 실제 어떤 일이 일어났었는지 잠시 살펴보자. 디오크레티안 황제(284-305)가 사망한 이후 4명의 군왕이 로마 제국을 통치하였다. 동방과 서방에 각각 두 명의 군왕이 있었는데, 콘스탄틴은 서방에서 속하였다. 그는 놀라운 전투력을 발휘하여 영국,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 북아프리카 등을 점령하여 서방의 실세가 되었다. 그 후 서방의 정적이었던 막센티우스가 장악하고 있던 로마를 공격하여 승리함으로서, 콘스탄틴이 서방 전체를 장악하게 되었다. 힘을 얻은 콘스탄틴은 동방의 군왕 중 한명인 리키니우스를 만나 동맹을 맺었다. 기독교에 대한 뜻을 정하여두 사람의 이름으로 역사적인 ‘밀라노 칙령’을 발표한 것이다. 그 후 리키니우스는 동방의 같은 군주이자 기독교를 최후로 박해하던 막시민을 무찌르고 동방 지역을 장악하게 되었다. 콘스탄틴은 자기 여동생을 리키니우스와 결혼하게 하여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 하였다. 그러나 동방과 서방을 장악하고 있던 두 사람의 관계에 머지않아 금이 가기 시작했다. 결국 314년에 전쟁이 일어나, 322년에 콘스탄틴의 승리로 끝나게 되었다. 그 결과, 로마 제국 전체가 그의 수중에 들어갔다. 콘스탄틴이 제국을 평정하는 과정을 상세히 설명한 유세비우스의 “교회사” 마지막 장인 10장은 역사 기록에 대한 성경 주석서와 같은 인상을 준다. 특히 티레에 세워진 웅장한 교회를 기념하여 행하여진 연설문을 삽입함으로서, 독자들로 하여금 콘스탄틴의 통치와 고난을 받던 교회의 회복이 성경적으로 성취된 것임을 강조한다. 가장 마지막에 다음과 같은 문장을 남겼다. "(콘스탄틴과 그의 아들들은) 하나님을 혐오하는 자들을 이 세상으로부터 깨끗하게 없애는 것을 가장 중요한 의무로 삼았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축복을 누렸다. 또한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알 수 있는 분명한 일을 함으로서, 덕행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습을 드러냈다. 능력자 하나님께 헌신의 예배와 감사를 드린다“(교회사, 10. 8).

▪ 콘스탄틴 - 회심 사건 유세비우스는 “교회사”에서 콘스탄틴의 업적을 높이 평가하는 일에 치중하면서도, 실상 그가 어떤 인물인지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는다. 흥미로운 것은, 그가 “콘스탄틴의 생애”라는 책을 기록하여 그의 신앙과 업적을 후대에 남기려 하였다는 점이다. 그에 따르면 콘스탄틴은 철저한 신앙인이다. 하나님께서 콘스탄틴을 로마의 황제로 세워 그의 정치력과 군사력을 동원하여 기독교 제국을 건설하게 하였다고 확신한다. 그러나 ‘밀라노 칙령’을 자세히 읽어보면, 유세비우스의 주장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콘스탄틴이 기독교인들에게 종교의 자유를 준 것은 사실이나, 동시에 그가 모든 종교에 대한 관용을 베풀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다음은 ‘밀라노 칙령’의 한 부분이다. “사실, 국가의 안정과 우리 시대의 평화를 위해, 모든 개인이 자신의 선택에 따라 종교에 참여하도록하게 하는 것은 적절한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모든 종교적 예식이나 예배의 형태를 존중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한다”(교회사, 9. 3). 콘스탄틴이 진정한 기독교인의 입장에 서서 ‘밀라노 칙령’을 발표하였는지에 대한 의문을 갖게 한다. 일부에서는 유세비우스의 견해와 정반대로, 콘스탄틴이 교회에 대한 관용을 베푼 것은 교회를 살리고자하는 순수한 동기가 아니라, 자신의 정치적 야망을 채우기 위한 수단이었다고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 결국 기독교를 향한 진정성은 그가 경험한 회심의 성격에 달려있다. 그를 ‘최초의 기독교 황제’라고 부를 수 있는 여부간의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콘스탄틴의 회심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그가 당시 로마를 장악하고 있던 막센티우스와 밀비안 다리에서 전쟁을 치루면서 생겨난 일이다. 보존된 기록에 차이가 있지만 다음과 같은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콘스탄틴이 하늘에서 있는 빛나는 십자가를 보았는데, ‘이 증표 안에 승리하리라’라는 문구가 있었다. 놀라운 것은, 그가 꿈에서 그리스도를 만난 일인데, 하늘에 기록된 형상이 그려진 깃발을 손에 들고 나타나 깃발을 가지고 전쟁에 나가면 승리할 것이란 확신을 받은 것이다. 신비스러운 사건을 경험한 그는 기독교 지도자들에게 자신이 목격한 모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질문하였다. 콘스탄틴은 그들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인물인지 알게 되었다. 그는 자신이 목격한 그 모습을 로마제국의 깃발로 사용하였고 병사들에게도 부착시켰다. 이 전쟁의 승리가 결국 ‘밀라노 칙령’으로 이어진 것이다. 그의 회심에 대한 의문점을 갖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먼저, 그가 성령과 회개로 거듭났는지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다. 엄밀하게 보면, 기록이 없던 것이 아니라 그런 경험을 하지 않았다. 그가 세례를 받은 시간이 오랜 시간이 지난 사망 바로 전날이란 사실에 유의하여야 한다. 나아가서 그는 로마의 종교인 태양신을 버리지 않았다. 그는 죽을 때까지 태양신 대제사장직을 가지고 있었다. 회심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신앙을 함부로 판단할 수 없다. 그러나 회심의 열매는 반드시 삶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 콘스탄틴 - 방황하는 교회 ‘밀라노 칙령’은 사실상 새로운 것이라기보다 311년 갈리에누스 황제가 선언한 관용령에 대한 재확인이었다. 콘스탄틴은 기독교에 대한 관용을 선택할 때에 지닌 파급 효과를 잘 알고 있었다. 이미 교회의 세력이 크게 확장된 상황에서 그가 현명한 선택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황제의 영향력 아래에 위치함에 따라 교회에 어떤 변화가 왔을까? 이로 인하여 박해가 종식되었다는 반가운 점은 이미 우리가 살펴보았다. 그러나 순결한 모습을 지켜온 기독교가 콘스탄틴이란 권력자와 융합하면서 근본적인 변화가 찾아왔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교회는 사도들의 신앙 전통에 의하여 세워지고 어려운 시련기를 지나면서 더욱 단단한 모습을 갖출 수 있었다. 핍박과 고난 속에서 제대로 연단된 신앙인들이 교회의 전통을 지켜온 것이다. 힘도 없고 이름도 없는 그들이 지닌 복음의 파워는 대단하였다. 많은 순교자들이 피를 흘림으로서 자신들의 신앙이 참되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교회의 힘은 복음이었다. 성령께서 교회를 이끌어왔다. 그러나 교회가 콘스탄틴의 보호를 받으며 영적으로 방황하기 시작하였다는 아픈 역사가 있다. 콘스탄틴은 교회의 문제에 깊이 개입하다가, 나중에는 직접 수장의 자격으로 교회를 다스렸다. 신앙적인 자유는 가짜 교인들을 생산하였다. 기독교인이 되는 것이 사회적, 정치적으로 유리하였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출세하기 위하여 기독교인이 되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이다. 교회와 성직자들이 온갖 특권과 돈에 눈을 뜨기 시작하였다. 상대적으로 성도들의 삶 속에서 현저하게 드러나던 복음의 파워가 힘을 잃기 시작하였다.

2) 성경이 보인다 - 베드로전서 1장 7-9절; 욥기 23장 8-10절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법은 우리의 생각과 근본적으로 다를 수 있다. 하나님은 강한 자들 또는 좋은 환경에 있는 자들을 사용하지 않으신다. 그는 사용하고자 하는 자들을 ‘영적 용광로’에 집어넣고 ‘고난이란 고열’을 통하여 ‘정금과 같은 성도’로 만드신다. 고난은 하나님의 도구이다. 이것은 자신의 죄 때문에 당연히 받아야 할 벌을 받는 것과 구분되어야 한다.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신앙의 연단을 통해 성도들이 공통적으로 경험하는 것이 있다. 하나님께서 가는 길에 항상 동행하신다는 것이다.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더욱 가까이 만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정금 같은 신앙을 가진 사람과 교회는 찾으시는 분이다. 고난은 불순물을 제거해준다. 성도와 교회가 복음과 함께 받아야 할 고난을 포기하고 멀어지고 있다는 것은 매우 불행한 일이다. 슬픈 현실이지만, 오늘도 ‘복음 없는 고난’과 ‘고난 없는 복음’에 속아 자신의 신앙이 가짜라는 사실을 모르는 성도들이 있다. 이메일:covenantcho@yahoo.com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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