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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형태가 다를 뿐…

Christin History, 필립 젠킨스 교수가 밝히는 ‘영지주의’의 변형 과정 소개

[“이 세상은 내 집이 아니다.” 이 말은 대다수 정통 그리스도인들의 태도를 반영하지만, 영지주의자는 이 말을 더 멀리 끌고 가려 한다. 영지주의 관점에서 물질세계는 타락한 창조물 정도가 아니라 회복 불가능한, 전적으로 잘못된 창조물이다. 신-적어도 선하고 참된 신-은 물론 역사 속에서 일하지 않는다. 탈출(Escape)은 오직 내면에서 해방의 필요성을 깨닫는 소수의 무리에게만 가능하다. 지혜 곧 소피아(Sophia)는 영적인 사람들 곧 엘리트를 위한 것이다. 지혜는 이들을 물질적인 것의 수렁에 빠져 있는 우매한 인간들, 곧 우주 사기극의 피해자들과 구별 지어주는 것이다. 대중은 잠자고 있을 테지만 진정한 영지주의자는 깨어 있다고 주장한다. 역사학자 필립 젠킨스 교수(P. Jenkins)는 이단인 영지주의는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라 그들이 주장했던 이념들이 오히려 인간의 역사와 함께 생존해오고 있다고 기술한다(The Heresy that Wouldn't Die: Though Gnostic sects faded in the early church, Gnostic ideas have had a long shelf life). ]

영지주의가 완전히 사라진 적은 없다. 오늘날 일부 학자들은 로마 제국 후기에 영지주의의 비밀 복음서들이 금지 당했다며 개탄해 마지않고 있지만 말이다. 영지주의의 중요한 주제들은 예컨대, 유대교 카발라 전통 속에도 살아남아 있다. 카발라 전통은 신적 선(divine goodness)이 담긴 그릇들이 부서지면서 세상이 창조됐다고 설명한다. 카발라교도들은 신을 향한 신비적 상승을 추구하는 동시에 ‘티쿤 올람’(tikkun olam)의 달성, 곧 부서진 세계의 회복을 서약한다. 기독교 세계를 봐도 알 수 있듯 기독교 국가들이 공식적으로 이단을 억압한 결과 영지주의 관념들은 변경 너머 메소포타미아와 아르메니아 같은 지역들로 퍼져갔다. 영지주의적 이원론 관념들은 바울파(Paulicians)와 마니교(Manichaeans) 같은 운동을 통해 아시아 여러 지역으로 퍼져나가 번창했다. 바울파나 마니교는 빛의 자녀들에게 이 세상의 악한 신으로부터 벗어나는 법을 가르쳤다.

이따금 영지주의 관념들은 유럽으로 역수입되기도 했다.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이 카타르(Cathar) 또는 알비파(Albigensian) 운동인데, 이들은 13세기 프랑스에서 정벌군에 의해 대학살에 가까운 억압을 받았다. 카타르교도는 이 세상을 철저하게 거부하는 “완전한 사람들”만이 온전한 구원을 얻는다고 믿는 오랜 영지주의 관념을 충실하게 따랐다. 이렇듯 새롭게 부흥한 옛 운동들은 기독교의 복음서들에 주로 의존했는데, 이 복음서들에 나오는 비유들을 나름대로 독특하게 해석했다. 그렇지만 초기 영지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이 운동들은 “전도자 요한의 책(Book of John the Evangelist)” 같은 자기네 성경을 쓰기도 했다.

기독교가 통치하는 사회에서 살아간 후기 영지주의자들은 교회와 교리에 대항하는 태도를 분명하게 취했으며, 이는 참으로 영적인 사람들을 돋보이게 해주었다. 카타르교도는 로마가톨릭교회를 문자 그대로 사탄의 회당이라며 거부했다. 가톨릭교도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의 온갖 혐오스러운 것들을 창조하고 구약 성경에 그 잔인한 악행이 세세하게 기록돼있는 미혹의 신을 좇는다는 것이었다. 평범한 가톨릭교도들이 양떼인 것은 고분고분하고 무지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이들이라는 의미에서였다. 도시화와 산업화로 유럽이 위협적인 사회가 돼가자, 빛의 자녀(영지주의자)들은 교회 그리고 기성 교회의 하나님과 악한 사회를 노골적으로 동일시했다. 낭만주의 영국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는 사회 자체의 탐욕과 무지의 환영인 거짓 신 늙은 노보대디(Nobodaddy), 질투의 아버지에게 사로잡혀 있는 세상을 보았다. 블레이크는 거인 앨비언(Albion)의 영이 멸망하고 분열되는 완전한 영지주의 신화를 보여주었다. 세상은 이성적이고 지적인 유리즌(Urizen) 세력이 지배하고 이 세력은 로스(Los)라는 혁명적 상상력의 도전을 받는다. 오로지 로스만이 앨비언이 상실한 신성을 기억하고 있고 그만이 앨비언을 깨울 수 있다.

19세기 프랑스 시인이자 비평가인 샤를 보들레르는 반역의 논리를 자연스런 결론까지 이끌고 갔다. 무섭고 불의한 사회와 동맹을 맺은 교회가 하나님에 관하여 설교한다면, 그 교회로부터 반역자로 중상을 당한 해방자, 사탄을 찬미하는 길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19세기 말부터 영지주의 문서 원본들이 다시 한 번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1896년부터는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면 누구나 3세기 “피스티스 소피아(Pistis Sophia)”의 번역판을 읽을 수 있게 됐는데, 이것은 영지주의 신화를 완벽하게 개관하고 있다. 여권 신장 시대의 사람들에게 더욱 충격을 준 것은, 이 문서가 마리아를 비롯한 여러 여성 제자들이 예수와 주고받은 긴밀한 교제를 기록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 작품이 당시에 준 충격은 나그 함마디 문서들과 도마복음이 수십 년 뒤에 주게 될 충격만큼 강력한 것이었다. 1970년대가 되기까지 세계는 이런 급진적인 견해를 몰랐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절대 믿어서는 안 된다!

“피스티스 소피아”를 비롯한 여러 문서들은 진보주의자들과 페미니스트들이 위계적 교회의 족쇄에서 풀려난 새로운 기독교를 구축하고자 했던 시대에 굉장한 매력을 풍겼다. 이 목적을 이루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언가 새로운 것을 만드는 게 아니라 예수를 따른 최초의 제자들의 잊혀진 진리-못된 교회 관료주의가 억압했던 교리들-를 되찾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었다. 1909년에 쓴 글에서 프란시스 스위니는 이렇게 주장했다. “고대 영지주의자들은 교육받은 여성들, 여성해방 운동의 초기 개척자들, 기존 입장들의 진실성과 권위에 의문을 제기하는 변증적인 딸들, 가장 지성적인 여성들이었다.… 영지주의자들은 성령의 여성성을 믿었던 원래의 믿음을 충실히 지켰다.

이 진리는 4세기가 되면서 기독교회의 남성 제사장들에 의해 일반적으로 금지됐다.” 20세기의 첫 4반세기에 영지주의가 주목을 받았던 많은 이유들은 오늘 우리에게도 무척 낯익다. 영지주의는 많은 사상가들이 문제시했던 요소들로부터, 특히 강력한 역사비평의 대상이 돼왔던 구약 성경으로부터 해방된 기독교를 제시했다. 또 신자들은 고등비평가들이 신약 성경이 신학적인 영향을 받은 후대의 픽션이라고 주장했으니 신약을 더 이상 받아들이지 않아도 됐다. 영지주의 렌즈를 통과한 기독교는 역사에 뿌리 내린 종교에서 일종의 내면의 심리적 깨달음으로 탈바꿈했다.

20세기 영지주의는 교회 안팎에서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다. 명시적인 영지주의 사상들이 많은 비교 집단들과 신흥 종교 운동들, 특히 신지학 운동(Theosophical movement)에서 파생한 운동들에 영감을 주었다. 현대 비교의 사례를 한 가지 들자면, 수면과 망각과 재각성이라는 노골적인 영지주의 신화를 제공하는 사이언톨로지(Scientology)가 있다. 사이언톨로지는 한때는 누렸지만 원초적 존재가 MEST(물질, 에너지, 공간, 시간)의 미혹에 빠지면서 잃어버린 막강한 영적 상태로 되돌아갈 수 있다고 신자들을 가르친다.

심리학 역시 영지주의 사상을 전파하는 주요 수단이었다. 카를 구스타프 융은 심리치료사이기도 하지만 신비주의자이기도 한데, 고대 영지주의 사상가들과 “죽은 자를 위한 일곱 설교(1916)”같은 작품들에 들어 있는 신화에서 많은 것을 끌어왔다. 환자가 스스로 환상과 의존의 세계에 갇혀있음을 인식하도록 유도하는 여러 방식의 현대 심리치료법의 근저에도 영지주의의 근본 가설들이 깔려 있다. 환자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자신들의 기억을 회복해야 하는데, 이를 통해 자신들의 생명을 시들게 하는 수면과 망각과 환상의 상태를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고대 영지주의자들의 경우에는 곤경에 처한 영혼들이 낯선 물질세계에서 길을 잃고 헤매면서 본향으로 돌아갈 길을 찾으려고, 곧 자신의 참 정체성을 기억하려고 애쓰고 있다고 여겼다. 영지주의의 구원 개념은 심리학자들의 통합(integration)이나 개별화(individuation)의 개념이 됐다.

그런데 영지주의는 고대의 종교 운동들을 학문적으로 재발견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명백히 종교적인 형태로도 되돌아왔다. 가장 유명한 이름은 일레인 파겔스(Elaine Pagels)인데, 그녀의 핵심 저서인 “영지주의 복음서들(1979)”이 제시한 종교적 종합은 프란시스 스위니 시대에 제시된 종교적 종합과 아주 유사하다. 파겔스도 마찬가지로 탈역사화되고 심리학적이며 철두철미 여성친화적인, 그리고 불교와 많은 유사점을 가지고 있는 이상적 기독교를 제시했다.

파겔스에게, 그리고 나중에 카렌 킹(Karen King) 같은 저자들에게, 이런 관념들은 “영지주의”라는 딱지가 붙은 주변적인 대안물이 아니라 고대 예수 운동의 진정한 핵심이었다. 고대 영지주의 복음서들은 2003년에 댄 브라운이 “다 빈치 코드”에서, 그런 운동들은 기독교의 변두리가 아니라 중심에 있었다고 주장하면서 다시 한 번 주목을 받았다. 심지어 이 소설에서 예수의 후손임이 입증되는 여주인공의 이름은 영지주의의 영감을 받은 소피(Sophie)다. 영지주의 관념들은 기독교 문화에서 성장한 수많은 사람들에게, 특히 예수라는 인물을 사랑하지만 성경이나 교회에서 듣는 이야기 너머에 무언가가 틀림없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너무나 매혹적인 것이다.

오늘날 그 옹호자들이 취사선택해 재포장한 영지주의는 이러한 필요를 충족시켜 주고 있고, 그것은 “진정한” 고대 성서들을 그 버팀목으로 삼고 있다. 현대 영지주의 옹호자들은 영지주의는 계속 잠자고 있는 평범한 신자들로서는 결코 그 진가를 이해할 수 없는 원래의 믿음을 드러낸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무리 비천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만방의 모든 사람들이 똑같이 얻을 수 있는 방식으로 그분의 진리를 드러내실 분임을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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