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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사모의 영성 가꾸기(5)

황순원 사모 (CMF사모사역원 원장)

삼순영성의 세 번째는 순교를 위해 피를 흘리는 것입니다. 이 말은 사실 듣기만 해도 끔찍한 것이라 생각됩니다. 지금 시대를 보면 곳곳에서 순교의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반드시 기독교를 핍박하는 세력 앞에서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일상생활에서도 날마다 죽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죄와 싸우되 피를 흘리기까지 하라고 하셨습니다.

기독교의 생명은 피를 흘리는 데서부터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 어떤 종교도 죄사함을 위해 피를 흘리는 종교는 없습니다. 한 생명을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기 위해서는 어머니의 피흘림의 산고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어린 생명이 자라기 위해서는 또 다른 어머니의 희생이 필요합니다. 이것 또한 피흘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 어떤 생명도 어머님의 희생 없이는 성장을 할 수 없습니다. 현대 어머니들이 이 고통을 피하기 위해 저생산의 추세가 되는 것은 매우 심각한 현실입니다. 자녀들의 뒤에는 어머니의 피흘림의 산고와 비교할 수 없는 아픔이 따르게 됩니다.

목회자 가정의 자녀들도 예외는 아닙니다. 목회자 자녀들의 희생은 특이합니다. 목회자가 목회를 위해 전념하고 희생하다 보면 자녀들을 소홀히 하게 됩니다. 자녀들까지도 목회자인 아버지의 뒤를 따라서 희생을 할 수 밖에 없는데 다행이도 자녀들이 자진해서 따라주면 그나마도 안심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사례가 많이 있기에 가슴 아픈 일입니다.

선교지에서는 자녀들이 부모님으로 인해 강제로 당해야 하는 문화의 충격과 거기에 따르는 희생은 만만치 않습니다. 심한 우울증으로 건강을 해치는 자녀들을 볼 때마다 부모의 심정은 피가 거꾸로 쏟아지는 것 같습니다. 특히 사춘기를 겪는 자녀들은 견디기가 힘들어 마침내 곁길로 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 생기게 되면 그때서 부보님들에게도 자녀로 인한 심한 고민을 하다가 우울증을 겪어야 합니다.

이민 목회자의 가정도 예외는 아닙니다. 아버지가 목사라는 이유 하나로 자의에 의해 신앙생활을 하기보다는 의무감에 교회에 출석해야 하는 자녀가 사춘기에 들어가자 반항하기 시작합니다. 부모님들은 적응하기 어려워 목회를 포기해야 할까 하는 정도로 심각해지기도 합니다. 자녀에게 요구합니다. ‘네가 목사의 아들 아니냐, 그러면 어떻게 내가 목회를 할 수 있겠니?’ 하는 대화는 자녀의 목을 더욱 졸리는 끔찍한 말로 들려집니다.

부모는 뒤늦게 자녀들을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이해하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그러나 자신이 얼마나 율법에 메여있는 것을 알게 되자 소스라치게 놀랍니다. 도저히 목사의 가슴으로는 이해하기 어렵고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자녀에게 벌칙을 세우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미 자녀는 그 벌칙을 피하기 위해 정상생활을 할 수 없는 자신을 알게 되자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기까지 합니다. 학교는 물론 교회도 다 포기한 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일종의 반항기로 들어갑니다.

이때 부모는 더욱 긴장이 되고 자녀로 인해 더욱 눌리고 눌려서 목회를 접을 생각까지 합니다. 여기에서 사모는 가운데 끼어서 눈물만 흘립니다. 그 눈물 속에는 피가 섞여져 나옵니다. 더 이상 어찌할 방법이 없어 넋이 나간 사람처럼 되어버립니다. 학생은 공부를 해야 한다, 목사의 아들은 이래야만 한다는 원칙이 그들을 사로잡고 있는 한 헤어 나올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이제는 모든 것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실정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렇게도 착하기만 하던 아이였는데... 그렇게도 신앙생활을 잘하던 아이가 어떻게 이렇게까지 되었을까 생각하면 할수록 가슴이 터질 것만 같습니다. 주님 앞에 무릎 끓어 기도할 힘마저 없습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의 자아를 깨기 위해서는 마지막 피한방울까지 다 흘려주신 분이십니다. 마침내 우리가 얼마나 죄인임을 철저히 알게 하십니다. 우리 위해 마지막 피 한방을을 다 흘리시고 다 이루었다 하신 후 숨을 거두신 주님은 다시 삼일 만에 부활하시어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나나타서 하시는 말씀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 하셨습니다. 우리가 주를 위해 피를 흘리려 하기 전에 우선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이미 우리의 죄와 허물을 해결해주시려고 흘리신 방울방울의 피는 우리에게 생명이 되어주시기에 충분합니다. 구약시대에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드린 제사에는 많은 짐승들의 피가 필요했습니다. 이것은 오실 예수님의 흘리실 십자가 사건을 예표한 것입니다. 성부하나님은 죄지은 인간을 구속하시어 자기 백성을 삼으라고 구약에 예언하신 후 구세주의 예표로 짐승들을 희생시켜왔습니다.

신약시대에는 실제로 예언하신 그대로 성자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어 이 예언을 성취하셨습니다. 실제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한 방울의 피도 남기지 않으시고 다 흘리셨습니다. 그 피로 온 인류의 죄가 씻겨졌다는 것은 사람의 이성으로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사건이지만 역사 속에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고 이것을 믿게 하시는 분은 성령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의 피흘림의 사건은 단번에 드려진 제물 되신 것입니다. 두 번도 필요 없습니다. 한번으로 충분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피는 인간의 피와는 다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몸을 입으셨으나 그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단번에 흘리신 피로 우리는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죽은 후 천국 가는 것도 포함되는 것이겠지만 살아서도 우리의 삶은 이제 더 이상 마귀의 종으로부터 자유를 얻게 된 것입니다.

골로새서 3;9절에 보면 ‘신성의 충만함이 육체로 거하시고 우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라고 강조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단번에 흘리신 피의 능력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참 생명은 이 주님의 보혈의 능력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실제생활 속에서도 영향을 끼쳐야만 합니다. 복음이 복음 되어야 합니다. 생명이 있는 자와 없는 자의 차이가 여기에 있습니다. 현미와 백미의 차이는 우리가 다 알고 있습니다. 현미에는 살아있는 씨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물을 주면 현미는 싹이 나옵니다. 그러나 백미는 그렇지 않습니다. 물을 주면 썩어버립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바로 이것을 말합니다. 많은 종교적 행사나 종교 활동이 우리를 살리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예수의 십자가를 믿는다면 바울의 고백처럼 나는 날마다 죽노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가정에서 남편 앞에 배우자끼리 혹은 자녀들 앞에서 아직 자존심이 살아서 꿈틀거린다면 다시 한번 십자가 앞에 나아가 신랄하게 고백해야 할 것입니다. 내안에는 과연 그리스도의 피가 흐르고 있는가? 복음이 살아서 움직이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런 부모들 앞에서는 자녀들의 생명도 살아날 수 있습니다. 부부끼리 서로 낮아질 수도 있습니다. 자존심을 내세울 필요가 없어집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하신 말씀대로 이런 가정에는 참된 평강이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이메일:hwangsunwon@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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