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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은혜와 충성 (사무엘하 23:13-17)

안병권 목사 (가나교회/KAPC 남가주노회 노회장)
안병권 목사

(가나교회/KAPC 남가주노회 노회장) 

미국 수도 워싱턴에 알링턴 국립묘지가 있습니다. 이곳에는 유명한 묘지가 있습니다. 바로 미국의 35대 대통령인 존 에프 케네디의 묘지입니다. 이 묘지 앞에는 꺼지지 않는 불이 계속 타오르며 밤낮 비추고 있습니다. 케네디 대통령의 묘와 함께 또 유명한 곳은 무명용사의 묘지인데 지난 1,2차 세계대전과 6.25전쟁에서 전사한 신원이 알려지지 않은 이들의 유해를 모아 합장한 묘이며 여기에 50톤이나 되는 대리석으로 묘비를 만들었는데 이 묘지가 무명용사의 묘지입니다. 무명용사, 사실 이름이 밝혀지지 않았을 뿐이지 이들도 누구 못지않게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들입니다. 목사의 길도 사실 무명용사의 길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누군가 알아주기를 바라며 가는 길이 아니지요. 특히 목회자의 길도 무명용사와 같은 길로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가야할 길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다윗의 용사들의 무용담이 실려 있습니다. 사실 23장 전체에 다윗의 많은 용사들의 멋진 활약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다윗과 블레셋과의 전쟁 기간에 일어난 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군대는 아둘람 굴에 진치고 있고 적국인 블레셋 군대는 르바임 골짜기에 진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다윗의 지휘 막사는 산성에 있고 블레셋의 지휘막사는 베들레헴 성 우물 근처에 있습니다. 이때 다윗이 혼잣말로 “저 베들레헴에 있는 우물물을 한 번 마셨으면”이라고 말했는데 이 말을 근처 있던 세 용사가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블레셋 진영에 돌파하고 들어가 그 우물물을 떠왔고, 다윗은 그 물이 세 용사가 목숨을 걸고 떠온 것을 알고 마시지 않았습니다. 그리고는 이 물은 세 용사의 피와 같다고 칭찬하며 하나님께 부어 드렸습니다. 

이 이야기만 보면 여기에 왕과 신하, 대장과 부하 간의 충성과 인정 그리고 사나이들의 끈끈한 브로맨스와 같은 감동을 받을 수 있습니다. 주군의 그냥 한 말을 지나치지 않고 목숨을 걸고 수행한 용사와 그들의 눈물 어린 충성을 보며 그것을 하나님께로 드리며 세 용사의 충성을 인정해 준 다윗의 자기 부하에 대해 애정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이 이야기가 남자들의 끈끈한 충성에 관한 내용이라고만 안다면 굳이 성경을 볼 필요 없이 영웅전이나 전쟁사를 보면 아주 많이 나와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다윗도 세 용사도 아닌 하나님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특히 다윗과의 약속을 충성스럽게 지키고 있는 하나님의 은혜와 충성을 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세 용사가 보여준 충성은 어떤 충성이었을까요?

 

세 용사가 보여준 충성은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그들의 충성은 고난을 각오한 충성이었습니다. 세 용사들은 물을 떠오는 장소가 어딘지 잘 압니다. 그리고 그곳을 갔다 온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압니다. 세 용사가 물 떠온 우물은 블레셋군대의 지휘막사 즉 본부가 있는 옆에 있으므로 경비가 삼엄하고 병사들도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세 용사가 전투실력이 좋아도 살아오기 힘든 곳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런 경비를 뚫고 그야말로 목숨을 걸고 물을 떠 왔습니다. 고난을 각오하고 간 것입니다.

목회자의 길도 이럴 것입니다. 사실 편하려고, 영화를 누려보려고, 세상의 인정을 받으려고 이 길을 간 것은 아닙니다. 영광 보다는 분명히 힘들고 어려운 길임을 알고 있습니다.

얼마 전 어떤 목사님이 제일 성경에서 부담스럽고, 두려운 성경 구절은 하박국의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하박국 3:17-18에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라고 했습니다. 그 목사님은 솔직히 말씀하면서 아니 어떻게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고,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고, 우리에 양이 없는데 기뻐할 수 있느냐“고 했습니다. 아무 것도 없는 상황에서 단지 하나님이 내게 계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기뻐할 수 있느냐고 합니다. 물론 목사님이 믿음이 없어서 하는 말은 아닙니다. 고난을 각오하고 들어선 길이지만 힘드니까 하박국 선지자의 고백이 정말 가능한지 마음에 새기면서 한 말일 것입니다.

주의 길은 봉사하라면 해야 합니다. 그래도 섬기라면 섬겨야 합니다. 어려움을 당하고, 억울함을 당하고, 알아주지 않아도 목회자의 길을 가야 합니다. 충성은 상황을 뛰어 넘었기에 충성인 것이다. 헌신은 아픔을 뛰어 넘었기에 헌신인 것이다.

둘째로 세 용사의 충성은 자원하는 마음으로 충성한 것입니다. 강제로 떠밀려 할 수도 있지만 저들에게 물을 떠오라고 아무도 시키지 않았습니다. 저들이 자원해서 간 것입니다. 충성에는 자원하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다윗의 시 중에 회개 시가 있습니다. 다윗이 범죄하고 (부하의 아내를 취하고 그 부하를 고의로 죽게 만들었다) 회개하며 지은 시가 시편 51편인데 여기서 다윗은 이렇게 참회하며 기도합니다.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시 51:11-12).

여기서 저는 왜 다윗은 하나님 저를 쫓아내지 말라고 애원하는 것은 이해가 되는데 왜 자원하는 심령을 달라고 기도했을까 궁금했습니다. 이는 그가 힘들 때, 사울 왕에게 쫓겨 다니면, 광야나 굴에서 기거할 때 오직 하나님만 함께 하시면 두려울 것 없고, 고난도 감내할 수 있다고 믿고 살았는데, 이제 왕이 되고 나라를 자기 손에 가지고 보니, 어느 순간부터 하나님이 부담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간섭이 부담이 되고, 하나님의 은혜가 슬슬 귀찮아 진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맘대로 하려고 하고 싶은데 하나님의 간섭이 싫증이 생긴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좋은 대로 하다 보니 남의 가정을 파괴하고 살인을 저지르는 파렴치한 죄를 저지른 것입니다. 그리고 깨달은 것이 힘들 때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그립고 그 마음을 다시 회복하게 해 달라고 한 것입니다. 자원하는 마음은 자랑하는 마음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만을 자랑하고, 하나님의 은혜만을 자랑하고 하던 시절이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기 때문입니다.

세 용사는 이런 자원하는 마음으로 물을 떠 온 것입니다. 알아 달라고 한 것도 아니고, 칭찬이나 영광을 받으려고 한 것이 아니라 감사하는 마음으로 간 것입니다. 목회자의 길도 이런 것입니다. 성도의 신앙생활도 이와 같아야 합니다. 주여 주님의 은혜가 자랑스럽습니다. 감사합니다. 좀 더 충성하지 못해 늘 아쉬운 마음뿐입니다.

마지막으로 세 용사는 사소한 일에도 충성했습니다. 본문이 있는 삼하 23장에는 다윗을 위해 목숨을 바친 용사들의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그들은 이름까지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세 용사는 이름도 없고 그 활약도 전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왕이 마실 물을 떠온 이야기 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 무명의 세 용사는 사소한 일에 충성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사소한 일이 아닌 자기 일에 충성한 것입니다. 이 충성을 어디에서 배웠을까?

사실 다윗은 이 이야기에서 멋진 왕으로 나오나 오늘 본문에서 그것을 보여주기 위함이 아닙니다. 삼하 23장에는 다윗이 얼마나 부족하고 형편없는 왕인지 그 죄를 곳곳에 숨겨놓고 있습니다. 먼저 23장 마지막 절에는 헷 사람 우리아의 이름이 나옵니다. 그리고 34절 하반절에는 길로 사람 아히도벨의 아들 엘리암의 이름도 있습니다. 우리아는 다윗에게 아킬레스건과 같이 그의 악한 죄를 드러나게 해주는 이름입니다. 그리고 지략가 아히도벨이 왜 그의 아들 압살롬이 반역했을 때 재빨리 압살롬의 편에 섰는지 그 이유를 암시하고 있습니다. 아히도벨의 아들 엘리암은 우리아의 아내 벳세바의 아버지입니다. 그러니까 아히도벨은 밧세바의 할아버지이니 다윗은 아히도벨의 손녀딸을 강제로 취한 것이고 손녀사위를 계략을 써 죽인 것입니다. 성경은 다윗의 멋진 모습이 아니라 다윗의 죄를 폭로하고 있습니다.

또한 사무엘하 전체적 맥락을 보면 그 구조가 문학적 기법이 인클루지오(수미쌍괄법)라는 편집으로 되어있습니다. 즉 본문의 삼하 23장 다음 24장에는 다윗의 또 다른 죄 즉 하나님의 뜻을 어겨 인구계수하는 큰 죄에 대해 말하고 있고 21장에는 사울 왕의 죄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용사 이야기는 인간의 죄에 둘러싸여 있는 것처럼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싸고 있는 동일한 이야기의 가운데는 무엇이 있을까요? 바로 다윗의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찬양의 노래가 있습니다 (22장, 23:1-7). 이는 성경의 저자 (하나님)가 의도를 가지고 기록하고 구성해 놓은 것입니다. 다윗의 멋진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범죄자 다윗,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다윗의 잘못을 보여주며 그러한 다윗이라도 하나님은 그와의 언약을 지키려고 충성하시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 용사들을 통해 보여주시고 계십니다.

제가 좋아하는 성구 중에 하나가 창세기 36:24입니다. “시브온의 자녀는 아야와 아나며 이 아나는 그 아버지 시브온의 나귀를 칠 때에 광야에서 온천을 발견하였고” 이는 메시야의 족보가 아닌 에서가문의 족보인데 그 후손 가운데 시브온의 자녀 중에 아나라는 사람이 아버지의 나귀를 칠 때 광야에서 온천을 발견한 것이 뭐 그리 중요한 사건인지 성경에 기록해 놓았는지 의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는 철저히 영적인 가치에 비중을 두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 중요한데 하나님의 백성의 가문도 아닌 인간 가문의 족보에 별로 중요하지 않은 사건을 기록한 것은 정말로 파격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구절에서 은혜를 받았습니다. 이는 하나님은 선민이든 아니든 누구든지 다 보고 계시고 지켜주시고 있음을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일거수일투족 모든 부분을 지켜주시고 인도해주십니다. 목회자의 길이 힘든 것 하나님은 더 잘 아십니다. 하나님의 충성 때문에 힘들어도 이 길을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충성을 배워야 합니다.

ganachurch@gmail.com

03.29.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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