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성순복음교회)
오늘은 믿음의 출발이고 가장 중요한 영적 원칙이라고 할 수 있는 ‘권위와 순종’에 대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 로마서의 말씀은 권위에 대한 불순종과 순종을 가장 확실한 대조로 설명해 주고 있는데, ‘선악이 아니라 권위와 순종이다’라는 제목으로, 두 가지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권위에 대한 불순종은 정죄와 사망에 이르게 합니다.
본문 18a절의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와 19a절의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라는 구절은 첫 사람 아담과 하와가 범한 불순종의 죄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처음 에덴동산에서 우리 인간을 지으시고 풍요롭고 아름다운 모든 좋은 것을 다 주셨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지켜야 할 것을 분명히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바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창세기 2장 16-17절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이것은 인간이 마음대로 바꿀 수 없고, 반드시 순종해야 하는 하나님의 권위를 의미합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 받은 존귀하고 대단한 존재라 할지라도 하나님입니까, 아닙니까? 아닙니다.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복을 누리며 권위 안에서 기쁨과 평안을 누리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스스로 하나님처럼 되려는 교만한 마음을 부추기는 뱀의 유혹에 넘어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음으로 말씀에 불순종하고 하나님 권위를 무너뜨리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즉시로 영이 죽으니까 영이신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지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숨는 자가 되었습니다. 선악을 알게 되는 눈이 밝아지니까 조금 전까지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했던 상대방에게서 허물이 보이면서 서로가 원망하기 시작합니다. 풍요의 에덴동산에서 가시와 엉겅퀴가 나서 수고의 땀을 흘려도 가난과 저주에서 해방되지 못하는 세상으로 쫓겨나게 되었고, 영생의 삶을 살 건강이 질병과 사망의 몸이 되어 아무리 운동하고 보약을 먹어도 병과 죽음의 문제를 이기지 못하는 인생이 되고 말았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 결국 모든 인생은 자동 지옥의 사형 언도를 받고 집행일을 기다리며 사는 절망적 존재가 되고 만 것입니다.
내가 선악,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은 내가 주인이 되겠다는 생각입니다. 스스로 하나님처럼 되어서, 나한테 좋은 것은 선이고 나한테 나쁘거나 싫은 것은 악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악을 알게 되면 죽는다는 말은 쉽게 이해가 되는데, 선을 알게 되어도 죽는다는 진리는 납득하기 어려워 실수합니다. 쉽게 설명하면, 교회를 안 다니는 분들 가운데도 선한 분들이 많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보다 구제를 더 잘하며 남을 돕는 사회사업도 잘하고, 또 매너 있고 솔선수범하여 선을 행하는 분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선하다 할지라도 그의 선함이 영혼의 구원을 이룰 수는 없습니다. 인간이 생각하는 선이란 결국 인간 수준에서 좋은 일, 자기가 보기에 선한 일이지 하나님의 거룩함의 수준에 도달할 수는 없습니다. 결국, 인간은 자기 수준의 선을 붙잡고 자기 의에 머물며, 하나님을 바라보지도 생각하지도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 시대를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 권위를 부인하고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겠다는 시대라고 말합니다. 지금 한국이든 미국이든 정치의 세계를 보아도 다 자기가 옳고 상대방이 그르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지 않습니까? 소위 말하는 ‘콩가루 집안’이든지, 불량 학생이 많은 나쁜 학교이든지, 희망 없는 단체 등은 다 권위가 깨져 있고 순종이 없습니다. 우리를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원수 마귀는 ‘권위와 순종’을 깨기 위해 처음에는 ‘옳고 그름’으로 유혹을 합니다. 그러다가 다음 단계로 ‘취향’이란 말로 넘어가는데, 취향은 개인의 선택이라고 유혹을 합니다. 동성애도 이런 것입니다. 결말은 가정이나 사회 파괴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 파괴이며 사망입니다. 이것이 역사의 진리입니다. 가정이든 직장이든 학교든, 국가나 교회에서도 자기 소견대로 ‘옳다 그르다’ 선악이 우선이 되어서 권위를 인정하지 않거나, 하나님의 권위를 무너뜨리면 하나님의 복과 능력이 없어집니다. 결국 사망의 종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2. 권위에 대한 순종은 생명과 의를 얻게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 18b절의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와 19b절의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는 예수님의 순종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 땅에 오심도, 사심도, 그리고 죽으심도 그러했습니다. 육신을 입고 계신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눈물과 통곡으로 기도할 때 어떻게 하셨습니까?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나님 아버지의 권위 안에서 순종을 선택함으로 인류의 구세주가 되시는 역사상 최고의 역전승을 이루었습니다.
마태복음 8장에 보면 예수님이 큰 믿음이라고 칭찬하신 백부장의 믿음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가버나움에 들어가시자 백부장 계급의 로마 장교가 찾아와 예수님에게 중풍병으로 괴로워하는 자기 하인을 고쳐 달라고 간구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마태복음 8장 7절)라고 대답하셨는데, 백부장이 말합니다.
마태복음 8장 8절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
예수님은 그 사람의 집에 가실 의향도 있으셨고, 준비도 되셨습니다. 그런데 백부장은 너무 황송한 일이라고 하면서 예수님께 그 자리에서 명령만 내리시면 자기 하인이 나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백부장은 자신이 그렇게 말하는 근거까지 분명하게 설명했습니다.
마태복음 8장 9절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백부장은 “나도…”라고 했습니다. 로마의 한 군단에는 군사가 6천 명이 있었습니다. 군단 내에는 군단 사령관에게 보고하는 백부장이 60명이 있었습니다. 각 백부장의 아래에는 군사가 1백 명씩 있었습니다. 자기 위에는 사령관의 권위가 있었고, 다시 그 위에는 로마의 권위가 있었습니다. 이 백부장은 위에 있는 권위에 복종하는 사람이었기에 그만큼 아래에 있는 병사들에게 명령할 수 있었습니다. 로마 장교인 백부장은 예수님께 바로 그런 뜻으로 말한 것입니다. “저도 권위 아래 있습니다. 따라서 제게는 권위가 있습니다. 즉 제가 말 한마디만 하면 제 밑에 있는 군사들이 즉시 제 명령에 따라 움직입니다. 이보다 더 큰 권위가 주님께 있음을 저는 믿으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셔도 됩니다.”
그럴 때 예수님은 어떻게 반응하셨습니까?
마태복음 8장 10절 “예수께서 들으시고 놀랍게 여겨 따르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
예수님이 기뻐하시며 칭찬하신 믿음은 바로 하나님의 권위를 알고 그 안에서 순종으로 행하는 믿음이었다는 것입니다. 올바른 믿음의 성장은 권위에 대한 순종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교회의 일꾼을 뽑을 때도 이것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3장 10절 “이에 이 사람들을 먼저 시험하여 보고 그 후에 책망할 것이 없으면 집사의 직분을 맡게 할 것이요”
성경에서 “집사”는 헬라어로 ‘디아코노스’라고 하는데, 일차적으로 ‘종, 일꾼’이지만, ‘타인의 권위 아래 있는 자’라는 뜻입니다. 직분을 맡게 할 때는 위 권위에 순종하는 사람인가 아닌가를 시험하여 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한국교회의 믿음이 서구 그리스도인들보다 더 빨리 성장하는 분명한 이유 중의 하나는 권위에 대한 올바른 이해에 근거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어느 것이 ‘더 좋다, 나쁘다’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권위와 순종이란 면에서만 말하자면, 오랜 기간의 왕조시대 역사와 가부장적 권위의 구조를 가진 한국 사람들은 권위에 대한 접근과 이해가 쉽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의 중요한 영적 원리인 권위와 순종을 이해하고 적용하는 것이 좀 더 쉽습니다. 반면에 서구인들은 자유 경쟁의 민주주의 사회에 익숙합니다. 민주주의는 백성들이 선거로 자기들이 원하는 지도자를 뽑습니다. 이런 자유 경쟁 체제에서는 짧은 기간 동안 권위를 갖는 지도자보다 개인주의에 더 초점이 맞춰지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의 절대 주권의 영적 권위에 대한 이해가 어려울 수 있습니다. 미국 이민교회가 한국교회보다 더 문제가 많은 이유 중의 하나도 이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생명을 풍성히 얻는 믿음의 본질은 선악이 아니라 ‘권위와 순종’입니다. 하나님이 복을 주셨는데, 받은 것이 당연하게만 여겨지면 버릇없는 아이가 되는 것과 같습니다. 내가 옳고 그름을 따라 선택하는 것이 좋은 것이라는 생각이 반드시 깨어져야 합니다. 마지막 시대가 될수록 자기 선택이 많은 시대가 되어 ‘각자도생’이란 말을 합니다. 내가 선악을 따라 사는 인생이 되면 처음에는 내 뜻대로 되는 것 같지만 갈수록 어려워지게 됩니다. 완전하거나 전능한 것은 내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 내 생각과 다르니까 처음에는 어려워 보이지만 역설적으로 승리하는 길임을 믿어야 합니다. 모든 하나님의 약속과 축복이 다 예수님 안에 있습니다. Not I But Christ를 이루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말씀을 순종하며 하나님의 권위 안에 거하므로, 부활의 능력을 체험하고 반드시 복을 누리며 최종 승리를 얻는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03.22.2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