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PC 개혁장로회신학대학원 학감)
지난 1월 7일 화요일 저녁, Zoom을 통하여 겨울 특강을 진행하는 도중에 교회의 장로님으로부터 문자 메시지가 들어왔습니다. 심한 바람으로 인하여 전등이 몇 번씩이나 껌뻑거리는 가운데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겨우 강의를 마치고 메시지를 열어보니 긴급한 안부를 묻는 내용이었습니다. 놀라운 마음으로 뉴스를 틀어보니 LA 근교의 인구 밀집 지역 세 군데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강풍과 함께 엄청난 속도로 주택가로 번져가고 있었습니다. 특별히 내가 살고 있는 지역에서 북쪽으로 불과 2-3마일 떨어진 알타데나 지역의 주택가들은 평소에도 눈에 선할 정도로 낯익은 지역이라서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타 들어가는 모습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북가주에 거주하는 큰아들도 전화를 걸어와서 긴급 상황을 대비하라고 다급히 말하였습니다.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정전이 되면서 상황 파악이 불가능해졌습니다. 거의 뜬눈으로 밤을 보내고 아침에 창문을 열어보니 온 동네가 하얀 재로 뒤덮여있었고 하늘은 검고 누런 연기로 인하여 숨쉬기가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어떻게 이런 엄청난 재난이 하룻밤 사이에 발생했는지 아직도 믿어지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노아 시대 사람들도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면서” 일상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도중에 갑자기 홍수가 임하여 멸망 당했다고 경고합니다(38-39절). 평범한 일상생활 중에 홍수 심판이 갑자기 임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재림과 함께 임할 최후의 심판 역시 일상생활 중에 갑자기 임할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남자들은 들에 나가 밭일을 하고, 여자들은 집에서 맷돌을 갈면서 살림하고 있을 때 갑자기 임할 것입니다. 우리는 종말, 곧 그 날과 시간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성경은 우리에게 항상 “깨어있으라”는 교훈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42절). 종말에 관한 대표적인 교훈인 “열 처녀의 비유”의 결론도 “그런즉 깨어 있으라” (마 25:13)입니다.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종말은 두 가지 의미에서 쓰이고 있습니다. 첫번째 의미는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곧 온 우주의 마지막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우주적 종말”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우주적 종말”이 오기 이전에 우리는 죽음을 통하여 주님께로 갑니다. 우리는 이것을 “개인적 종말”이라고 부릅니다. “우주적 종말”이나 “개인적 종말”이나 공통점은 우리가 그 때를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깨어있으라”는 교훈을 간직하고 살아가야 합니다.
한국에서도 2-30년 전부터 소위 “죽음학”(thanatology)이라는 분야가 도입되어서 죽음에 대한 의미를 학문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편안하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방법을 의미하는 “Well Being”이라는 용어와 더불어서, 안락하고 고통 없이 죽는 것을 의미하는 “Well Dying”이라는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과연 어떻게 하면 고통 없는 “행복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을까요? 인터넷에서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Well Dying”을 위한 여러 가지 단계 중에서 가장 간단한 3단계를 보아도, (1) 필수 준비 요소, (2) 희망 사항, (3) 나의 자취 등으로 분류해서 준비할 항목들을 제시합니다. 과연 이러한 단계로 준비해나가면 죽음에 대한 대비가 된 것일까요? 그러나 “Well Dying”에 대한 준비는 최근에 시작된 것이 아니고, 인류 역사와 함께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미 5000년 전부터 고대 이집트의 파라오는 통치 기간 전체를 통하여 자신의 죽음을 대비하여 거대한 피라미드를 건설해 나갔습니다. 중국을 의미하는 China의 시조인 진시황제 역시 엄청난 규모의 능을 만들어서 자신의 죽음을 대비하였습니다. 그들은 과연 죽음을 맞이할 준비가 된 것일까요?
오히려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를 통하여 죽음에 대한 가장 모범적인 대비를 보게 됩니다. 자신과는 달리 예수님께서는 죄 없이 십자가에 달리셨음을 알고 있던 강도는,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눅 23:42)라고 간구하였고,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43절) 고 응답하셨습니다. 강도는 죽음 직전에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미에 눈떠 있었고, 영원한 생명을 얻어서 천국에 이른 것입니다.
반면에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다가갈수록 놀라울 정도로 십자가에 대하여 어둡고 잠들어 있음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종말에 대한 교훈과 함께 십자가로 다가가면서 제자들에게 “깨어 있으라”는 경고의 말씀을 반복하십니다. 십자가를 하루 앞두고 제자들을 데리고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 기도하실 때에 제자들을 향하여,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마 26:38)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기도 후에 돌아와서 제자들의 자는 것을 보시고 다시,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있을 수 없더냐” (40절)라고 반복해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번째 오셔서 다시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41절)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베드로를 포함한 제자들은 이 당시 잠이 들 만큼 몸이 고단한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이미 일주일 전에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별로 이동하지 않고 며칠을 지냈기 때문에 몸은 졸음이 올 정도로 피곤한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잠이 들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것은 십자가가 싫었던 것입니다. 십자가를 대면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저의 아이가 중고등학교 다닐 때 어느날 저녁에 집에 돌아와 보니, 무언가 잘못을 저지른 후에 이불을 덮고 침대에 누워 있었습니다. 잠이 든 것이 아니라, 잠든 시늉을 하는거죠. 제자들의 마음 상태가 바로 이런 상황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몸이 피곤하여 잠들었다기보다는, 십자가가 싫고, 대면하기 두려웠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깨어 있어야 할 대상은 바로 “십자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기 위하여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때에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마 16:13)라는 질문에 이어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15절)라고 물으셨습니다. 이에 대하여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16절)라는 정답을 제시하여 예수님의 축복과 함께 교회의 약속과 천국 열쇠의 권세까지 부여받게 됩니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에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비로소 자신이 세상에 오신 목적인 십자가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21절). 이에 대하여 베드로는 극렬하게 반대하면서 예수님께 저항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22절). 여기에서 “항변하여”로 번역된 헬라어 “에피티마오”는 “rebuke,” 곧 “꾸짖다”를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한 아들을 사로잡고 있던 귀신을 향하여 “꾸짖었을” 때와 (마 17:18), 풍랑과 바다를 향하여 “꾸짖었을” 때에 (마 8:26) 사용된 단어와 동일합니다. 감히 제자인 베드로가 스승인 예수님을 “꾸짖은” 엄청난 사건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제자로 지내온 3년 기간 중 최초의 항변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역으로 베드로를 꾸짖으면서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16:23)라고 꾸짖으면서 베드로를 “사탄”으로 부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한 관점은 이처럼 극력하게 둘로 나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대하여 신앙고백을 하고 교회의 약속과 천국 열쇠까지 받았지만, 십자가에 대하여 여전히 어두워 있었고 잠들어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이제 곧 이방인을 몰아내고 이스라엘의 왕좌에 앉으실 “영광의 왕”으로만 생각했지,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실 “고난의 왕”이라는 사실에는 잠들어 있었습니다. 요즘도 소위 “복음주의”라는 명목으로 선거 때마다 등장하여 누구를 찍으라는 구호와 주장을 듣게 되는데, 이것은 십자가의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요, 십자가에 잠들어 있었고 심지어는 극렬하게 반대했던 베드로를 따라가는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가 항상 깨어있고 눈떠야 할 대상은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에 대한 사도 바울의 고백은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고전 1:8, 22-24). 오늘도 “십자가”에 “깨어 있어서” 주님과 동행하는 복된 하루 보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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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15.2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