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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말씀에 인생을 걸고(마태복음 4:19, 사사기 3:31 )

손영규 목사 (경주 새교회 리더 목사, 소망병원 원장, GAMA선교회 대
손영규 목사

(경주 새교회 리더 목사, 소망병원 원장, GAMA선교회 대표)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도전하십니다! 사도 마태를 통하여 기록된 말씀을 보면, 우선은 갈릴리 호수의 어부인 제자들에게 도전하신 것이요, 아울러 오늘 우리 모두를 향한 크나큰 도전의 말씀입니다. 역대급 혁명적 말씀입니다. 

그 주님의 도전(사도 마태의 419 도전)은 동역자 될 제자들을 부르시고 세우신 것입니다. 

 

사사기 본문 배경 

 

사사기는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도착한 이후 약 300여 년간의 역사를 다루고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이끄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온 이후, 그들은 아직 강력한 중앙 정부를 세우지 못하였고, 12지파로 나뉘어 각기 분배받은 땅을 강화하려는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가나안 땅에는 이스라엘의 각 지파와 가나안 사람 및 블레셋 사람들과 싸움이 그칠 날이 없었습니다. 이 혼란한 시기는 여호수아로부터 위대한 선지자이며 마지막 사사였던 사무엘에 이르기까지 대략 300여 년간을 말합니다. 이 시기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곤경을 당할 때마다 그 위기를 극복하도록 ‘이스라엘의 재판관들/지도자들’을 보냈는데 그들이 바로 ‘사사들’입니다. 이 기간에 크고 작은 사사 12명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구원하였던 것입니다.

 

1. 삼갈 - 그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무명의 용사/Nobody)

 

삼갈은 이스라엘의 12명의 사사들 중 가장 작은 사사에 속한다고 보여집니다. 

그의 활동에 대해서는 사사기는 오직 한 절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의 출신지와 활동사항 그리고 그의 시대적 배경에 대해서도 알려진 것이 없습니다. 단지 드보라의 노래 속에서 한번 언급될 뿐입니다(삿5:6). 그는 그저 평범한 소몰이꾼 목동 Nobody에 지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삼갈 역시 후반 절에 묘사된 것같이 “그도 이스라엘을 구원하였더라”는 언급에서 그 역시 분명한 사사 중의 한 사람이었던 것을 입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칭호는 중요한 것입니다. 한 사람에 대한 칭호가 그 사람의 신분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칭호가 분명히 중요한 것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그보다도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그 사람이 ‘어떤 존재’이며(to be), 그리고 ‘어떤 일을 했느냐’(to do) 하는 것이 의미 있고 중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삼갈이 바로 이러한 점을 깨닫게 해줍니다. 

삼갈! 그는 시시하고 별 볼일 없는 사람(Nobody)이었습니다. 그러나 시시한 자들을 들어 쓰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겸손케 하십니다.

 

2. 삼갈 - 그는 무엇을 가졌습니까?(소 모는 막대기-사역의 도구)

 

사사 시대는 철기 시대가 시작되는 직후였습니다. ‘철’이라고 하는 이 강력한 금속이 인간의 생활 속에 등장함으로써 농기구와 무기를 새롭게 혁신시켰습니다. 소아시아의 히타이트(헷) 족속들이 BC 14세기에 처음으로 철제 무기를 사용한 것입니다. 그들은 당시에 강력한 국가로 등장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으로 들어 왔을 때인 BC 13세기 경에는 가나안으로 이미 들어온 블레셋인들도 철기를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아직도 청동기와 놋을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농기구를 위해 조그마한 쇠붙이를 구하려 할 때면 불레셋 사람 대장간에 가서 겨우 부탁할 수밖에 없었지만 불레셋인들은 이미 많은 철제 무기를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불레셋의 침략을 받아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에 일개 목동에 불과한 삼갈의 손에는 소모는 막대기 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은 약 2.4m 가량의 긴 나무 막대로 한 끝에는 작은 못이 있었으며, 다른 끝에는 작은 쇠붙이가 붙어 있어 짐승을 모는 도구로, 때로는 농기구로 이용하였습니다.

상식적으로는 소모는 나무 막대기가 철제무기를 상대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비록 보잘 것 없는 막대기일지라도 하나님께서 들어 쓰실 때에는 놀라운 위력을 발휘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무슨 도구이냐? 가 아니라, ‘누가 사용하느냐?’라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성경을 통하여 삼갈의 전투와 비슷한 전투를 익히 잘 알고 있습니다. 그 역시 손에 막대기 하나 들고 블레셋 군대 앞에 당당히 선 사람이 있습니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입니다. 당시 다윗은 나이 어린 무명의 청년(Nobody)이었고 골리앗은 신장이 290cm나 되는 어려서부터 용사였습니다. 그러므로 사울 왕은 다윗에게 골리앗을 능히 이기지 못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삼17:33). 골리앗은 57Kg이나 되는 갑옷을 입었고 창자루는 놋으로 된 베틀채 같은 것이었으며, 창날이 6.8Kg이나 되는 철로 된 단창을 어깨 사이에 메었고, 허리에는 칼을 찼고, 손에는 긴 창을 들고 나왔습니다(삼상17:5-7). 그러나 다윗은 한 손에는 막대기를 잡고, 또 한 손에는 물맷돌를 들고 나아갔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본 골리앗은 이르기를 “네가 나를 개로 여기고 막대기를 가지고 내게 나아왔느냐…오라 내가 네 고기를 공중의 새들과 들짐승들에게 주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전력상 비교도 안 되는 전투에서 다윗은 보잘 것 없어 보이지만 강력한 위력을 발휘한 물맷돌로 용장 골리앗을 물리쳤습니다. 

신앙생활은 영적 전투입니다. 악한 사탄 마귀는 골리앗처럼 다가올 것이고, 그 졸개 악령 귀신들은 블레셋 군대들처럼 떼거리로 달려들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존재이며, 어떤일을 하고 있습니까?

혹시 어느 학교에서 공부하거나, 강의하고 있습니까? 조그마한 가게를 꾸리고 있습니까?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직장에 다니고 있습니까? 

교회를 섬겨 감에 “나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야!”, “나는 이제 나이 들고 병들어 교회에서도 별 볼 일 없는 사람이야!”, “나는 이 땅에서도 별로 알려지지도 않고, 시시한 사람이야! 누가 나에게 관심이라도 가질까?”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보면서 낙심하고 좌절한 사람은 없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의 모습을 살펴보면 우리는 사실 ‘Nobody’입니다. 

 그러나 우리 속에 ‘여호와의 이름’이 들어와 역사하면, 시시한 Nobody인 우리 손에 ‘여호와의 막대기’가 들려지면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우리는 주님 안에서 의미 있는 Somebody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시시한 고기 잡는 어부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우리 모든 기독인들도 ‘집사/권사/장로’, ‘전문가’, ‘사장’, ‘학생’, 그리고 그 어떤 명칭이나  직위로 일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들은 ‘소모는 막대기’에 불과합니다.

교회나 사회에서의 그 어떤 직분이나 직위도, 권력이나, 학력이나, 재력이나, 인맥으로 받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시시한 자들이라도 그 측량할 길 없는 은혜로 세우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를 도구로 사용하실 때에 놀라운 일들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세우시고, 쓰시겠다’고 하심에 즉시 순종하는 것이 은혜요 축복인 것입니다. 비록 새끼 나귀나 늙은 나귀라 할지라도 말입니다(마21:2-3). 

이 시시한 자들을 주께서 주님의 나라와 주님의 교회를 위해서, 당신의 한 작은 막대기로 쓰시겠다는 사실 앞에, 우리들은 다만 감격할 수밖에 없고, 주님께 쓰임 받았다는 그 은혜만으로도 감사할 따름인 것입니다. 

 

3. 삼갈 - 그는 어떤 사람이 되었습니까?(하나님의 사역자-이스라엘의 구원자 사사)

 

저는 본문을 읽어 가는 중에 또다시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삼갈이 받은 은혜가 무엇입니까? 소몰이꾼이거나 일개 농사꾼에 지나지 않았던 그가 이스라엘의 열두 사사의 반열에 서게 된 것입니다. 저에게 은혜의 소낙비같이 다가온 말씀은 ‘그도’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본문은 삼갈도 이스라엘을 구원한 12명의 사사 중의 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히브리어 3인칭 대명사 ‘후’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구원한 용사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삼갈 ‘그’가(그의 출신과 배경과 형편이 어떠했던지 간에)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을 받았다는 엄연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신나는 일입니까! 더욱이 저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한 말씀은 ‘그만’(he only)이라고 기록하지 아니하고, ‘그도’(he also/too)라고 기록하고 있는 표현에서, ‘또한(also)’이란 뜻을 가지고 있는 히브리어 부사 ‘깜’을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많은 이스라엘의 구원자 중에서 ‘삼갈도’ 한 사람으로 쓰임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마태의 419선언을 통해서, 주님께서 베드로와 안드레만 부르신 것이 

아니고, 이후에 12제자들로 부르셨고, 오늘 이 시간에도 우리들을 불러 말씀하시고 있는 것 입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몸 된 교회와 그 복음을 위해, 또 그 작은 직장이나, 가족들을 지키기 위해, 새벽마다 올리는 눈물의 기도. 남편과 아내와 자녀를 위해 밤이 맞도록 올리는 눈물의 기도, 나는 안다! 나는 안다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이 주님의 약속의 말씀에 인생을 걸기를 원합니다. 

 

이제 저도 또다시 주님의 부르시는 말씀에 인생을 걸기로 했습니다. 이제 저의 나이가 72세입니다. 인생의 겨울 길목에 들어선 것입니다. 제 친구들 대부분이 은퇴하고, 등산이나 살살 다니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30대에 저를 부르셔서, 의사로, 선교사로, 교수 요원으로 훈련시키셨고, 40대에 교회 장로로, 대학교 교수로, 그리고 중국 의료선교사로 세우셨고, 그러다 중국 선교지 현장에서 체포되어 추방당하여 유리 방황하게 하시다가, 나이 들어 고향에 돌아가서 조그마한 개인병원을 열고 살아가게 하셨는데, 다시금 도전의 말씀을 주시는 것입니다. 의료선교에의 새로운 장을 열기 위해서, 한의학을 통한 ‘한의 의료선교의 장’을 캄보디아 땅에 열라는 명령을 받은 것입니다.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치유와 생명의 빛을 비추라고! 킬링필드를 힐링필드로 바꾸라고! 도전을 주신 것입니다. 이제 모든 것을 정리하고 준비해서 2026년에는 캄보디아 한의 의료선교를 위해 다시 선교지로 나아가길 준비하고 있습니다. 

 “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1:8)

어디가 ‘땅 끝’입니까? 이 단어는 ‘대표 단수’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해서 영어 NIV 성경은 이를 번역하기를 ‘the Ends of the Earth’ 로 복수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땅 끝’이란? 각각 부름을 받은 자들이 그 사명을 담당하고 있는 모든 곳입니다. 중국 선교사는 중국이, 캄보디아 선교사는 캄보디아가, 각기 부름을 받고 사명이 있는 곳이 땅 끝입니다. 

시시한 Nobody 우리들을 부르시어, Somebody 되게 하시는, 주님의 말씀에 인생을 걸어 봅시다!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평가하더라도,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잘했다, 수고했다! 나의 잔치 자리에 어서 와서 앉으렴!” 

doctoryks@hanmail.net

 

01.25.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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