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성순복음교회)
공중 그네 타기에서 서로 다른 쪽에서 날아와 몸을 날려 공중에 떠 있는 사람을 다른 쪽 사람이 잡아주는 모습은 감탄을 자아내게 합니다. 일반적인 사람들의 시선은 공중을 날아가는 곡예사에게 맞추어지지만, 더 중요한 사람은 안전하게 잡아주는 사람(receiver)이라고 합니다. 아무리 능숙해도 생길 수밖에 없는 두 사람 사이의 격차와 오차를 능숙하게 극복하고 붙들 수 있는 쪽은 잡아주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열심히 구르고 힘차게 날아올라도 내 생각과 다른 문제나 어려움은 생길 수밖에 없는 것이 인생입니다. 하지만, 잡아주는 분이 능력자이면 오차와 격차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나의 실수와 연약함이 아무리 커도 잡아주는 분이 하나님이면 붙잡아 주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문제나 대적보다, 불경기보다 크시고 질병과 사망보다 크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으면 자신 있게 발돋움할 수 있는 것이고 포기하지 않고 전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우리 인생을 “질그릇 조각 중 한 조각 같은 자”(사 45:9)라고 말씀합니다. 쉽게 깨어지는 질그릇과 같이 약한 자, 천한 자가 존귀해질 수 있는 길은 담는 내용물이 존귀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질그릇은 “되는 싸움”을 하는 존재가 아니라 “담는 싸움”을 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질그릇이 금그릇, 은그릇이 되려고 싸우면 안 됩니다. 될 수 없는 일을 하다가 오히려 가면 쓰고 위선을 떠는 치졸함만 드러날 수 있습니다. 또 천하게 쓰임 받을 질그릇이 자존심만 내세우면, 오히려 별거 아닌 것으로 상처나 잔뜩 입고 힘까지 잃게 됩니다.
질그릇은 오직 담는 내용물에 따라 달라지는 것임을 기억하면 됩니다. 그러니까 죄와 사망에 깨어지는 연약한 질그릇 같을지라도 부활과 생명이신 예수님을 담으면 존귀한 그릇, 능력 있는 인생이 됩니다. 보배이신 예수님은 만왕의 왕, 만주의 주, 만물의 충만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 4:7)
솔로몬이 지은 성전은 당시 세계 최고의 건축물이라고 할 정도로 화려하고 존귀해 보였습니다. 헌당할 때 유명하고 대단한 사람들이 다 모였고, 엄청난 수의 백성들도 모였습니다. 또 수가 많아 기록할 수도 셀 수도 없는 양과 소를 잡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과 임재는 그것 때문이 아니라 제사장들이 법궤를 지성소에 갖다 놓으니까 성전에 가득히 임하였습니다. 오늘날도 동일하게 내 마음 중심에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실 때 영광과 능력으로 임재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는 것입니다. 질그릇인 인생이 금그릇, 은그릇이 되겠다고 ‘나는 교회 나온 지 몇 년 되고, 내가 누구하고 친하고, 내가 과거에 뭘 했고…’ 그러면서 싸우지 말고 중심에 보배이신 예수님을 담는 삶을 사는 것이 승리의 길임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나는 지금 “되는 싸움”을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담는 싸움”을 하고 있습니까?
샬롬
10.19.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