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규서 목사 (월셔크리스천교회)
목회 초년이 무르익을 무렵 목포 달리도교회로 부임하게 되었습니다. 부임하기 위해 주소를 받아들었을 때 목포 시내 한 복판에 소재한 교회로 알았습니다. 그렇게 생각했던 것은 주소지가 목포시 충무동이었기 때문입니다.
부임 당시 섬 마을에는 두 개의 교회가 있었습니다. 본래 그 섬에는 교회가 하나였는데 서로 자신들의 마을에 건축하자는 주장으로 큰 마을 사람들과 작은 마을 사람들의 분쟁이 증폭되면서 교회가 나누어지게 되었습니다. 그 섬을 오고가는 페리호는 하루에 두 번 운행을 하고 있었습니다. 목포에 나가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같은 배를 타고 나가야만 했습니다. 30분 걸리는 뱃길에서 오른쪽 줄은 큰 마을, 반대편에는 작은 마을 사람들이 앉아서 서로 등 돌리고 있던 그 모습은 지금 생각해도 가슴 아픈 추억입니다.
서로 미워하며 거리를 두고 있을 때 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매주 금요일 밤이면 학생들이 모여 철야 집회를 갖고 있었습니다. 설교를 마치고 잠깐 사택에 들어왔을 때 긴급히 부르는 소리에 교회로 달려갔습니다. 한 자매가 마루로 된 예배당 바닥에서 구르고 있었습니다. 자세히 보니 귀신이 그 속에서 역사하고 있었습니다. 그 자매에게는 두 명의 다른 자매들이 있었는데 번갈아가며 귀신이 그들에게 들어가 역사하고 있었습니다.
특별히 장로님과 권사님들에게 연락도 하지 않았는데 교우 모두가 교회로 모이게 되었습니다. 한 권사님께서 비몽사몽간에 교회 앞마당에 군부대의 트럭이 정지하더니 군인들이 마당에 가득한 것을 보고는 군대 귀신이 왔구나 생각하여 교우 모두에게 비상 연락을 취하여 전 교인이 모인 것이었습니다.
전 교우들이 합심하여 기도하였습니다. 찬송을 부르는 중 가사가 “예수의 피”라는 구절이 나오면 이 자매는 마치 영화 엑소시스트에서나 나오는 장면처럼 혀를 길게 내밀었습니다. 새벽이 되자 주께서 담대한 마음을 주셨습니다. “어디에서 왔니?”라고 물었습니다. 그 자매의 입을 통하여 작은 마을 형부에게서 왔다고 말했습니다. “바다로 갈래 아니면 온 곳으로 갈래”라고 물었습니다. 온 곳으로 가겠다고 답하였습니다. “그럼 그곳으로 가라!” 라고 명하자 자매의 몸을 넘어뜨리고 굉음을 지르며 귀신은 떠났습니다. 자매는 4시간이 넘도록 죽은 듯이 긴 잠에 들었습니다. 본래 네 자매들이 제가 부임한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였습니다. 건축 문제로 교회가 분열되자 맏언니와 형부는 작은 마을에 교회를 개척하는데 앞장서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형부는 큰 마을 교회에 남아 있는 나머지 세 자매를 설득하여 자신의 교회에 오기를 권하였습니다. 그러나 설득이 여의치 않자 그들에게 모진말로 많은 상처를 주었습니다. 그러나 세 자매는 그런 형부를 위해 힘써 기도하였습니다. 그날도 형부를 위해 기도하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그 일이 있은 후 몇 날이 안 되어 온 동네가 발칵 뒤집힐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그 자매들의 형부가 경운기로 사람을 치어 죽게 하여 법적 구속되는 사건이었습니다. 달리도 마을에 유명한 주정뱅이 아저씨가 있었는데 그날 밤에도 술을 많이 마시고 농노를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지나가던 마을 사람들이 부인에게 알리게 되었는데 부인이 와서 아무리 집으로 모시고자 애를 써도 그날따라 말을 듣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부인은 붙들고 오랜 동안 씨름을 하다가 농로에 쓰러진 남편을 두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래도 잠이 들면 추울 것이라 생각하여 가마니 한 장을 덮어 주었다고 합니다.
그것이 화근이 되었습니다. 새벽에 일을 하기 위해 경운기를 몰고 농로를 지나가던 그 자매의 형부가 가마니를 덮어 놓은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타고 넘었던 것입니다. 큰 마을 교회 작은 마을 교회 할 것 없이 안타까운 마음에 구명 운동에 앞장섰습니다. 작은 마을 교우들은 물론 큰 마을 교우들도 그 자매의 형부를 위해 기도하고 서명 운동을 하고 면회를 가는 등 마음을 다하여 기도했습니다.
섬마을 사람들은 그 일에 대해 안타까워하며 서로 협력하였습니다. 이런 연합의 힘과 기도로 그 자매의 형부는 과실치사로 석방 받게 되었습니다. 자매들은 서로 불편했던 관계를 회복하게 되었고 후에 그 자매는 신학대학에 입학하여 크고 귀한 주의 일꾼이 되었습니다.
아름다운 섬마을 ‘달리교회’는 은혜와 성령이 충만한 교회로 기억됩니다. 지금도 생각하면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은 장년들은 물론 청소년들까지 온 교인의 믿음이 특심했습니다. 저녁마다 있는 집회가 있었고 학생이나 청년을 비롯한 온 교인들의 열정적인 기도로 강대상과 마루바닥은 성할 날이 없어 몇 개월에 한 번씩 수리를 해야만 했습니다. 이렇듯 모든 성도들의 마음을 다한 기도로 인해 드디어 큰 마을과 작은 마을에는 분열이 끝나고 화평을 찾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