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성실장로교회 원로)
V. 율법주의(legalism)와 율법폐기주의(antinomianism)
성경적인 기독교 윤리를 세우기 위해서는 율법주의와 율법폐기주의(반율법주의)의 잘못을 알아야 한다. 율법주의와 율법폐기주의라는 용어는 율법과 복음의 관계에 관한 두 가지 잘못된 가르침에서 비롯된다. 율법주의는 우리가 하나님의 율법이나 법규와 규정을 준수함으로써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선언된다고 가르친다. 율법폐기주의(도덕법 폐기주의, 혹은 반율법주의)는 하나님께서 신자들에게 도덕법 (즉, 십계명)에 순종할 것을 요구하지 않으신다고 말한다.
A. 율법주의 (legalism)
예수님은 당시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의 율법주의적인 삶의 위선적이고, 독선적인 가르침과 삶을 책망하셨다 (마 23:4; 눅 18:9). 사도 바울은 초대 교회를 오염시킨 잘못된 교리인 율법주의에 맞서 싸우면서 복음을 단호하게 사수했다(갈 1-3; 딤전 1:6-7).
로마 카톨릭 교회는 오랫동안 수도원 금욕주의, 참회 제도 (penitential system), 성례전주의 (sacramentalism) 및 인간의 공로가 구원에 보탬이 된다는 것을 강조해 왔다. 로마 카톨릭은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칭함을 받는(justification by faith alone) 성경적 교리를 부인하며,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함께 선행을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고 가르친다. 초대교회부터 지금까지 율법주의는 인간이 만든 규범과 규정을 준수하도록 했다(골 2:20-23).
최근 수십 년 동안 “바울에 대한 새 관점”(New Perspective(s) on Paul)의 지지자들은 하나님 앞에서 사람의 최종적인 의로운 신분(final right standing before God)이 되는 근거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야 한다고 가르쳐 왔다(“바울의 새 관점”의 주제는 아래의 별도의 제목으로 자세하게 다루겠다).
이슬람교, 유대교, 불교와 같은 종교는 인간이 선한 행위로 인해 천국에 들어가거나 열반을 경험하는 구원을 가르치기 때문에 비기독교적인 형태의 율법주의이다.
율법주의의 가장 핵심 포인트는 사람들이 선한 행위를 통해 하나님 앞에서 의를 얻으려는 시도이다. 그들은 율법의 요구 사항을 이행함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인정 (God’s approval)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다.
마틴 루터는 1517년 그리스도인들이 오직 믿음 (sola fide)으로만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하면서, 개신교 종교개혁을 일으켰다. 이것은 구원이 믿음과 선행을 통해서 온다고 주장하는 로마 카톨릭의 구원 교리를 거부하고, 성경적인 칭의 교리를 재확립한 위대한 일이었다. 갈 3:11,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
그러면 율법주의의 특징은 무엇인가? (R.C. Sproul의 “three forms of legalism” 을 요약한다).
1. 율법주의은 하나님의 관계보다는 하나님의 율법에 초점을 맞춘다. (Focusing on God’s laws more than relationship with God).
율법주의자는 규율을 준수하는 일에만 집중하고, 원래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더 넓은 맥락을 파괴시킨다. “(destroying the broader context of God’s love and redemption in which He gave His law in the first place).”
2. 진심으로 순종하는 마음 없이 외적인 법을 지킨다 (Keeping external laws without a truly submitted heart).
율법주의자들은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의도와 상황을 무시한다. 율법주의자들은 하나님께 대한 순종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분리시킨다.
3. 율법주의자들은 하나님의 법에 인간의 규칙을 추가시키고, 그것을 신성한 것으로 취급한다. (Adding human rules to God’s laws and treating them as divine).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이 점을 책망하셨다. 우리 인간에게는 하나님께서 명시적으로 제한하지 않으신 것들을 제한할 권리가 없다.
그러면 성도들은 행동 (순종)에 관심을 가져서는 안된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성도들의 생활에는 율법주의와 관계없는 바른 순종이 있어야한다(엡 2:8-10).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성도들이 율법주의애서 벗어나기 위하여 하나님의 계명을 무시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기독교인에게 주어진 자유를 벗어난 자유의 방종(an abuse of Christian freedom)이다. 요한복음 15:14,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우리는 우리의 칭의에 도움을 주기 위하여 (구원에 보탬이 되기 위하여),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무조건적인 은혜로 택하셔서, 은혜로 의롭다고 선언해 주셨기 때문에, 성도들은 하나님께 감사하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다.
우리는 구원을 얻기 위해서 계명을 지키거나, 순종을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 대한 사랑 때문에 주님께 순종한다. 순종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이지, 구원의 방식이 아니다(Obedience is how Christians should live, not how they are saved).
루터는 “매일 묵상 집”(A daily Devotional)에서 이러한 말을 했다. “우리는 선행과 사랑에 대해서도 가르쳐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것들을 (선행과 순종) 적절한 시간와 장소에서 가르쳐야 한다. 문제는 선행과 사랑의 주제는 우리가 어떻게 의롭게 되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의 문제이다.”(how we should live, not how we are justified).
바울의 새 관점 (The New Perspective on Paul)
바울의 새 관점 (The New Perspective on Paul)은 E. P. 샌더스 (E. P. Sanders)가 1977년에 출판한 <바울과 팔레스타인 유대교> (Paul and Palestinian Judaism)에서 시작되었다. 종교개혁 이후 전통적인 개신교의 관점은 바울은 율법의 행위를 통해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칭의 (justification by faith alone; sola fide) 를 얻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샌더스에 따르면 바울 서신은 “일반적인 선행” (general good works)을 다루지 않고, 대신 유대인을 다른 민족 집단과 구별하는 “경계 표식”(boundary markers)이었던 할례, 음식법, 안식일 법과 같은 준수 사항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Dunn, James D. G. (2005). The New Perspective on Paul. Grand Rapids: Eerdmans Publishing Co).
샌더스은 1세기 팔레스타인 유대교는 “율법적 공동체 (legalistic community )”도 아니었고 “행위에 의한 구원 (salvation by works) “을 지향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언약 아래 있었다. 개신교의 믿음과는 달리, 그들이 율법을 따르는 것은 언약을 맺는 방법이 아니라, 그 안에 머무르는 방법이었다 (following the Law was not a way of entering the covenant, but of staying within it) 주장했다.
그리고 제임스 던 (James Dunn)에 의하면, 성공회 신학자 N. T. 라이트 (Wright)가 1978년 틴데일(Tyndale) 강의에서 “바울에 대한 새로운 관점”이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했다고 주장했다. N.T. 라이트 (Wright)는 “새로운 관점”의 대중화를 위하여 수많은 작품을 저술했다.
바울의 새로운 관점에 따르면, 칭의에 대한 전통적 개신교의 이해가 잘못되었다고 주장하면서, 바울의 새 관점을 주장하는 자들은 바울이 행위의 의(works-righteousness)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신약의 하나님 백성 안에 있는 “유대인의 경계 표시”(Jewish boundary markers in the New Testament people of God)를 반대한다고 주장한다. 쉽게 말하면, 바울의 새 관점을 주장하는 자들은 신약성경의 유대적 맥락이 잘못 이해되었고, 이 잘못이 칭의에 대한 전통적 개신교의 이해에 오류를 가져왔다고 주장한다.
새로운 관점에 따르면, 유대인의 구원 체계는 행위의 의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언약적 율법주의, 즉 사람이 은혜로 하나님의 백성에 들어가고 언약에 대한 순종을 통해 그 안에 머물러 있다는 믿음에 기초를 두고 있다고 한다(one enters the people of God by grace and stays in through obedience to the covenant).
이것은 바울이 “율법의 행위”(works of the law)라는 표현으로, 행위의 의(works-righteousness)를 언급할 수 없었다고 한다. 대신 그는 누가 하나님의 백성인지 아닌지를 분명히 보여주는 유대인의 경계 표시(Jewish boundary markers)를 언급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유대적 맥락(the Jewish context)에 대한 새 관점의 재구성 (reconstruction)이 전혀 정확하지 않으며, 신약에서 바울이 반대하는 행위를 통한 의 (works-righteousness)의 경우를 쉽게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더구나 로마서, 갈라디아서, 빌립보서뿐만 아니라, 신약성경 전체가 칭의에 대한 전통적 개신교의 이해를 지지한다.
(다음 호에 “바울의 새로운 관점”이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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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9.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