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o

옥스퍼드 소크라테스 클럽

강태광 목사 (월드쉐어USA대표)

C. S. 루이스의 삶과 작품을 살피면 만나는 두 모임이 있다. 하나는 문학 토론 클럽인 잉클링스(Inklings)였고 또 하나는 기독교인과 비신앙인의 공개 토론 모임이었던 소크라테스 클럽(The Oxford Socratic Club)이었다. 이 두 모임이 C. S. 루이스가 소통에 능한 작가로, 혹은 효과적으로 대중에게 기독교 진리를 전하는 기독교 변증가로 성장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잉클링스는 매주 회원들이 글을 쓰고 쓴 글을 발표하면 동료들이 비평하는 문학 클럽이었다. 잉클링스(Inklings)는 루이스에게 읽혀지는 글을 쓰고 들려지는 이야기를 개발하는 문학가의 역량을 길러 주었다. 잉클링스는 루이스가 대중의 사랑을 받는 작가로 성장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반면에, 소크라테스 클럽은 기독교 교리 토론 클럽이었다. 소크라테스 클럽에서는 한주에 기독교인의 발제에 비신자가 답변하고, 다음 주에는 비신자의 발제에 기독교인이 답변하는 공개 토론 모임이었다. 이 모임은 루이스가 사람들이 가진 기독교에 대한 문제의식을 파악하게 해 주었고 그 대답을 생각하게 했다. 소크라테스 클럽의 회장으로 13년을 보내며 C.S. 루이스는 변증가로서 기초를 다졌다. 비기독교도와 반기독교적인 사람들을 효과적으로 설득하는 연습을 하고 논리를 준비하여 효과적인 변증가로 성장케 하였다.

소크라테스 클럽은 옥스퍼드 교목에 의해 시작되었다. 교목실에 막 배치된 스텔라 올드윙클(Stella Aldwinckle)은 옥스퍼드 대학교 소머빌 여대(당시 옥스퍼드에는 5개의 여대가 있었다) 신입생, Monica Shorten으로부터 불평을 들었다. 모니카 쇼튼은 너무 상투적인 설교가 일방적으로 전해진다는 것이었다.

모니카 쇼튼(Monica Shorten)은 비기독교인이나 불신자들이 믿기 어려운 하나님의 존재나 그리스도의 신성을 당연한 것으로 전제하고 설교하는 것을 불평했다. 이는 지적 호기심이 많은 대학생에게 합당한 설교가 아니고 자신은 ‘이런 기독교 신앙의 전제들을 쉽게 받아들일 수도 없고, 믿을 수도 없다.’라고 불평을 했다. 스텔라 올드윙클 교목은 모니카 쇼튼에게 이런 생각을 하는 다른 친구들이 있느냐? 물었고 비슷한 생각을 하는 친구들이 많다고 대답했다.

모니카 쇼튼의 얘기를 들으며 교목 스텔라 올드윙클은 학생들의 종교적이고 철학적인 질문에 대답하는 모임의 필요성을 느꼈다. 비슷한 아픔을 겪었던 스텔라 올드윙클은 “종교에 대한 철학적 접근(Philosophical Approach to Religion)”이란 모임의 공고문을 걸고 대학 내 모임을 주도했다.

1942년 1월 26일에 모였던 첫 모임은 대체로 성공적이었다. 많은 궁금증이 해결되었고 분위기도 좋았다. 첫 모임에 참석했던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또 만나자(Can’t we meet again?)”라는 의견을 모았다. 반응에 고무된 스텔라 올드윙클 교목은 두 번째 모임을 주선했고, 두 번째 모임도 성공적이었다.

두 번째 모임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고무된 스텔라 올드윙클 교목은 이 모임은 계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학교의 공식적인 지원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을 했다. 그래서 학교에 정식 클럽으로 등록을 하고 C.S. 루이스를 찾아가 루이스에게 옥스퍼드 소크라테스 클럽 회장직을 맡아 달라고 요청했다. 이렇게 시작된 소크라테스 클럽에서 C.S. 루이스의 역할은 지도교수요 대표자였다.

루이스는 소크라테스 클럽의 회장직을 1941년 크리스마스 즈음에 수락했다. 루이스는 거의 모든 모임에 참석했다. 그리고 C.S. 루이스는 기독교 신앙을 발표하는 발제자로 가장 많이 발표했고, 비기독교인들의 기독교를 향한 질문에 답변자로도 가장 많이 나섰다. C.S. 루이스는 케임브리지대학교 교수로 이동했던 1954년까지 소크라테스 클럽 회장의 임무를 성실히 수행했다.

C.S. 루이스가 옥스퍼드 소크라테스 클럽의 지도자였다면 클럽을 실질적으로 이끌었던 사람은 교목 스텔라 올드윙클이었다. 스텔라 올드윙클이 소크라테스 클럽의 행정 실무와 프로그램 진행을 책임졌다. C.S. 루이스는 <소크라테스 클럽의 설립>이라는 글에서 스텔라 올드윙클을 의장이라고 불렀다. 스텔라 올드윙클이 주제를 정했고, 강사를 섭외했다. 스텔라는 당대에 유명한 강사들과 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은 유망한 강사들을 섭외했다. 소크라테스 클럽이 그 당시 젊고 유능한 학자들의 대중 강의 실험 무대로 주목을 받았다.

소크라테스 클럽은 매주 월요일 저녁 8시 15분부터 10시 30분까지 모였다. 한 번의 모임에는 보통 60명부터 100명 정도의 학생들(및 일부 연구원들)이 모이곤 했는데, 가장 많게는 250명까지 모인 적도 있었다. 그 날은 1944년 1월 24일로서 당시에는 무신론자였던 조드(C. E. M. Joad, 1891-1853)와 루이스 사이에 토론이 벌어지던 저녁이었다.

소크라테스 클럽은 학 여학생의 불평으로부터 시작했지만, 대단히 성공적인 모임이었고, 학부 학생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오리엘(Oriel) 대학교에서 기독교 철학을 가르쳤던 그렌스테드 (Grensted) 교수는 ‘소크라테스 클럽은 전쟁 기간에 옥스퍼드 학생들에게 어마어마한 영향을 끼쳤다’라고 말했다. 당시 많은 사람이 소크라테스 클럽에 대하여 비슷한 평가를 했다. 소크라테스 클럽은 27년간 총 414회가 모였고 강사 306명이 등장했다.

이 모임을 소크라테스 클럽이라 부르게 된 이유는 이 공개 토론이 소크라테스 토론 원칙을 따르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 토론 원칙 핵심은 적극적인 청취(active listening)다. 확정된 결론을 갖지 않고 열린 맘으로 토론에 임하고 자세히 듣고 토론이 내리는 결론을 수용한다. 이런 토론 정신 매주 많은 대학생들이 모여들어 열띤 토론을 벌이게 하였다.

이 소크라테스의 토론 원칙을 가장 잘 지킨 사람이 C.S 루이스다. 올드윙클 목사는 루이스를 회고하기를 “그는 독단적(Dogmatic)이지도 않았고 지배적(Domineering)이지도 않았다. 그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공감하며 들었고, 다른 사람의 의견에 대하여도 적대적이 아닌 도움을 주려는 의도로 논찬했다.”라고 회고했다. 논쟁에서 이기는 것이 목적이 아닌 진리를 찾는데 집중한 루이스의 마음이 드러나는 장면이다.

Kangtg1207@gmail.com

07.13.2024

Leave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