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성실장로교회 원로)
Ⅲ. 폴 틸리히의 존재의 신학 (Theology of Being) (2)
폴 틸리히에게 하나님은 궁극적 관심의 상징이다. 틸리히는 “궁극적인 관심”에서 “상징 언어만이 궁극적인 것을 표현할 수 있기 때문에” 상징적으로 표현되어야 한다고 한다(ultimate concern must be expressed symbolically “because symbolic language alone is able to express the ultimate). 그리고 틸리히는 “하나님은 궁극적인 관심을 나타내는 가장 근본적인 상징의 역할을 한다” (God functions as the most fundamental symbol for ultimate concern) 했다.
틸리히에게 신은 존재의 기반 (the ground of being)이며, 그리고 존재 구조의 기반the ground of the structure of being) 이다. 틸리히의 신은 우리가 생각하는 개념의 유신론이 아니라, 초월적 유신론 (transcendent theism)이며, 틸리히의 신은 “신 너머 신이다” (God ‘beyond’ theism). 틸리히는 하나님의 존재를 긍정하는 것은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과 동일하게 무신론적이라고 했다. 왜냐하면 존재 자체는 존재를 초월하기 때문이다 (Being itself transcends existence). (Harvie M. Conn, op. cit., p.89).
폴 틸리히는 성경을 실존주의 철학의 입장에서 재해석했다. 특히 그의 3권으로 된 <조직신학>에서 자기의 신학 체계를 세우면서 실존주의 철학을 기초로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궁극적 관심”이며, 죄는 소외(疏外, estrangement)이며, 죄는 하나님, 자기, 이웃으로부터 분리로 규정한다(The Essential Tillich, The University Chicago Press, pp 165-166). 이 모든 개념은 실조주의 철학을 의존한다.
그는 고전적인 의미에서의 죄의 개념은 현대의 생활에 긴장만을 초래했다고 정통적인 죄의 개념을 비판했다. 그는 주장하기를 죄에 대한 진정한 정의는 우리 존재의 지반에서 소외 또는 소원해지는 것이다 했다. 실존적 소외는 인간에게 죽음의 두려움, 죄책감, 무의미와 절망을 가져다 준다.
틸리히는 인간이 율법, 금욕, 신비, 경건 등을 통하여 실존적 소외를 극복하려고 하지만 실패했다. 실존적 소외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은 새로운 존재에 의해 새사람이 되는 것이다.
틸리히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소외 또는 소원해진 것의 극복됨의 상징이요, 하나님과의 연합을 파괴하려는 모든 소외의 세력이 그 안에서 소멸된 “새로운 존재”(The New Being)의 상징이다. 그리스도로서의 예수는 자기 존재의 영원한 지반에 투명하게(transparency) 되어 하나님을 계시했으며, 본질과 실존 사이의 분열이 극복된 존재인 새로운 존재의 지참자(bearer)이다. 그는 그 자신으로서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그리스도가 존재로 옮겨지는 전달체이다. 이러한 틸리히의 기독론은 역사적 중요한 교리인 예수의 선재성, 동정녀 탄생, 대속적 죽음, 부활, 그리고 승천 등을 부인한다.
폴 틸리히의 은혜의 개념은 “너희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진다는 음성처럼, 우리 삶의 어둠을 뚫고 들어오며”, (Grace breaks into the darkness of our lives as if a voice were saying “you are accepted just as you are.”)이며, 그리고 “자기를 초월하는 어떤 것에 대한 참여를 전제로 하는 자기 긍정”으로 설명한다. (“self-affirmation…which presupposes participation in something which transcends the self.” (Paul Tillich, The Courage to be, Yale University Press; July 2000, p. 165)).
이러한 틸리히의 신학에 대한 박아론 교수의 비판은 “틸리히는 “신”에 관하여 말할 때 “존재 (Being)” 라는 철학적 개념 때문에, 인격신의 존재를 부정하고 철학적 허구 속에서 배회하였고, 그의 기독론에 있었서도 새로운 존재 (New Being)이라는 철학적 개념 때문에 역사적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철학적 허구 속에서 갈팡질팡했다” 바르게 평가하였다.
틸리히에 대해 로버트 레이몬드 (Robert Reymond) 교수는 이렇게 비평했다. “틸리히의 기독론은 나사렛 예수를 단순한 인간 수준으로 격하시켜, 그리스도를 인간의 예배의 대상으로 가치가 없는 존재로 만들고 있다...틸리히가 예수를 그리스도를 존재 (Being)라기보다, 그리스도가 되어가는(Becoming) 자로 이해한 것은 아주 비성경적이다”(Robert Reymond, Jesus Divine Messiah: The New and Old Testament Witness, Mentor; Revised edition, 2001).
김의환 교수는 “엄밀한 의미에서 예수가 상징으로 간주될 때, 신(神)도 아니며, 새 존재도 아니다. 다만 새 존재의 지참자(bearer)일 뿐이다. 그렇기때문에 기독교는 절대적 종교가 될 수 없고, 다만 절대적이며 우주적 종교를 향한 증거일 뿐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틸리히의 그리스도관은 “힌두교인이나 불교도에게 받아들여질 만한 물 탄, 맛 잃은” 그리스도관이다(현대신학 개설, 개혁주의 신행협회).
틸리히의 구원관은 “사람은 어떻게 존재로부터 소외의 극복에 참예하는가?”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전통적인 해답인 중생, 칭의, 그리고 성화의 개념은 틸리히에 의해 재해석된다. 중생은 새 존재를 가져오는 자이신 예수 안에 나타난 새로운 현실 속으로 끌려 들어온 상태가 된다. 칭의는 인격적인 하나님의 주권적인 행위가 아니요 인간이 자신의 여러 불리한 점에도 불구하고 용납되었음을 표시하는 상징어이다. 성화도 새 존재의 능력이 교회의 내외부를 막론하고 인격과 공동체를 변화시키는 과정으로 재규정된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새 존재는 인생의 궁극적인 관심과 모든 존재의 지반에 대한 추구의 해답이 된다.
로버트 레이몬드 교수에 의하면, “틸리히의 구원관은 살아계신 하나님과 아무 관계가 없는 실존적 체험을 묘사하기 위해, 칭의 혹은 성화와 같은 성경적 용어들이 상징적인 언어에 불과하다. 그가 근본적으로 도달하게 된 결론은 예수에 대한 상징들인 죽음과 부활을 명상함으로 인간 안에 새로운 자아를 각성케 하는 것이다. 틸리히의 방법론과 대답을 적용시키면 마하트마 간디나 석가모니의 생애와 죽음을 묵상하는 가운데서도 꼭 같은 구원의 힘을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Robert Reymond, op. cit.)
케넷 하밀톤(Kenneth Hamilton)은 틸리히의 신학을 총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유연하고 정확하여 백과사전적이며 굉장히 독창적이고 인상적인 작품임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것은 기독교 신학이 아니요, 기독교 신학을 신지학적(神知學的) 존재론적 사색으로 해석한 것이다.” (Kenneth Hamilton, The System and The Gospel A Critique of Paul Tillich, Franklin Classics, 2018).
4) 상관관계 방법 (method of correlation)
틸리히에게 인간의 삶으로서의 문화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하나님은 “무한”하시지만, 그 하나님을 수용해야 할 인간은 “유한”한 상황 속에 있기 때문이다. 유한한 상황에 처해 있는 인간은 자신의 상황을 연구하며, 다양한 학문, 정치, 경제, 예술, 과학 등에서 인간의 상황을 표현한다. 그래서 그는 문화속에는 인간의 실존적 물음이 담겨 있다고 주장한다. 틸리히에게 “종교는 문화의 실체이고, 문화는 종교의 형식이다”라는 전제가 있다.
틸리히의 조직신학(Systematic Theology)에서 상관성의 방법, 즉 실존적인 질문과 신학적인 대답의 상호 의존을 통해서 기독교 신앙의 내용을 설명했다. 서론에서 그는 신학 방법론, 즉 상황과 케리그마의 대화 방법론을 제시한 후, 본론에서 이성(질문)과 계시(대답), 존재(질문)와 하나님(대답), 실존(질문)과 그리스도(대답), 삶(질문)과 성령(대답), 역사(질문)와 하나님의 나라(대답)를 변증법적으로 상관시켰다.
그는 “실존적인 질문을 통해 인간의 상황을 분석하고, 그 질문들에 대한 대답으로 기독교의 메시지로 대답하는 것이 조직신학의 목적”이라고 주장했다.
결론적으로 틸리히의 신학의 기초의 두개의 극(pole)은 메시지와 상황이다. 신학은 항상 이 양자 중 어느 하나를 희생시킴으로써 균형을 잃을 위험성이 있다.
“초자연주의적”인 방법은 메시지를 강조한 나머지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 방법은 메시지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물음을 무시한다. 바로 바르트적인 신정통주의 신학이 그러한 예이다.
“자연주의적” 방법은 첫 번째와는 반대로 상황을 강조한 나머지 메시지를 희생시킨다. 이 방법은 신학적인 대답을 자연적인 인간 상태에서 끌어온다. 바로 19세기의 자유주의 신학이 그러한 예이다.
“이원론적인” 방법은 자연신학(natural theology)을 이용하여 신과 인간 사이의 다리를 놓아 보려고 하며, 대답을 질문의 형태에서 유출해 내려고 한다. 바로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Thomism)이 그러한 예이다.
틸리히의 상관성의 방법은 바로 이러한 문제점을 극복하며 약점을 보완하려는 시도로, 그것은 기독교의 메시지와 현대의 상황을 결합하는 방법이었다.
틸리히의 상관성의 방법에 대하여, 조지 토마스(George F. Thomas)는 다음과 같은 올바른 비평을 내리고 있다. “틸리히의 상호연관의 방법은 그가 인간의 상황을 분석하면서 하나님의 법(Theonomy)에 뿌리를 두지 않고, 인간의 자율(autonomy)을 철학에다 적용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인간의 문제와 상황을 올바로 대처할 수 있는 처방을 제시한가.
토마스가 지적한 바와 같이, 결국 상관성의 방법을 통해 틸리히가 말하는 하나님은 기독교의 메시지와 관계가 없는 하나님이다. 틸리히의 하나님은 하나의 존재(being)도 아니며, 인격(person)도 아닌 신(神)이다.
로버트 레이몬드(Robert L. Reymond) 교수는 이렇게 비판한다. “틸리히는 실제로 성경이나, 기독교의 신앙에 귀를 기울여 본 일이 있는가 하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그가 성경의 사건들을 언급한 곳에는 항상 완전히 상징적으로 재해석하였고, 그렇지 아니하면 기독교적이라고 인정할 수 없는 기독교와는 거리가 먼 비인격적인 철학으로 다시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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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