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성실장로교회 원로)
16-17세기의 영국의 청교도들이 영국교회 체제와 국가의 개혁을 위해 노력했지만, 영국 국교와 영국의 왕들의 거센 반대로 많은 고통과 어려움을 당했다. 이러한 여건 속에서 영국의 청교도들은 성도들 개인이 하나님과의 언약상태에 있음을 강조하는 개인 언약을 통하여 개인의 경건을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그러나 어떻게 보면 개인언약의 사상은 이미 16세기에 유럽 대륙의 종교 개혁자들에 의하여 잘 정립되었다.
청교도들이 개인 언약에 집중하였지만, 그러나 영국의 청교도들은 많은 핍박과 고통속에서도 신약 성경에 나타난 진정한 교회의 모습에 대해 많은 연구를 했고, 성경적인 교회를 세우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이들은 교회언약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영국 교회에 대항하여 싸웠다. 그런데 실제적으로 교회언약의 구체적인 실현은 영국이 아니라 뉴잉글랜드에서이다.
청교들 가운데 장로교파 청교도들은 교회 정치에 대하여 다른 개념을 가졌기 때문에 교회언약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아니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영국 국회에서 공식적으로 통과 되어 선포된 후에도 당시 영국의 청교도들은 공식으로 채택하지 아니하였다. 그 이유는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의 교회 제도가 장로교 정치 체제로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청교도들 가운데 분리파 (Separatists)와 독립파 (Independents)들은 모두 교회언약을 받아들였다. 그들은 모두 회중교회 (Congregationalism) 제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회중교회 청교도들의 교회 언약은 영국이 아니라, 뉴잉글랜드에서 확립되었고 정착되었다.
교회언약 사상의 중요한 부분은 자발성이다. 로마 캐톨릭과 영국국교에서 회원이 되는 과정은 비자발적이다. 청교도들의 교회개혁의 출발은 여기에서 시작된다. 회중교회 청교도들은 교회는 자발적으로 신앙을 고백하는 자들로 구성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영국교회는 영국에서 태어나면 자기의 자발적인 신앙고백과 상관없이 자동적으로 교회의 회원이 된다. 그러나 회중교회 청교도들은 이것이 교회의 타락의 원인이 된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잘못된 교회체제가 교회의 부패로 인도한다고 주장한다.
영국에서 회중교회은 분리주의 (Separatists)와 독립파 (Independents) 혹은 비분리주의자(Non-Separatists)로 나누어진다. 분리주의자들은 영국교회로부터의 완전한 분리를 주장하고, 독립적으로 예배할 수 있는 자유를 원하는 청교도 그룹이다. 여기에는 미국으로 이주한 필그림들(the Pilgrims)이포함되었다. 그러나 비분리주의자들은 영국교회안에 머물면서, 내부로부터 교회를 개혁하려고 노력한 청교도 그룹이다.
영국에서 로버트 브라운 (Robert Browne)은 1579년부터 분리주의적인 설교를 했다. 영국교회를 강하게 비판했고, 그 결과 영국교회로부터 많은 경고를 받았다. 1581년 브라운 중심으로 40여명이 모여 청교도 분리주의 회중교회가 시작되었다. 당시 이것은 불법이었고, 따라서 영국교회로부터 많은 탄압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개인이 스스로 자발적으로 교회언약에 서약하였다. 이것으로 첫 분리주의 회중교회가 세워졌다. 물론 교회언약의 개념은 메리 여왕시기부터 영국과 스코틀랜드에 존재했고, 유럽 대륙에서도 재세례파들이 교회언약을 사용하고 있었다.
브라운이 세운 분리주의 회중교회는 매우 어려운 상황 속에서 교회가 세워졌는데, 이들은 영국교회의 박해가 심하면 심할수록 더욱 주님께 순종하겠다는 서약을 했다. 이들은 박해하는 영국교회에 대항하기 보다는 주님께 더욱 충성하기 위한 교회언약에 더욱 순종했다. 브라운이 세운 교회의 교회언약 내용을 살펴보면, 첫째, 성도들은 자신이 자발적으로 선택한 교회의 회원이 되어서, 주님께 헌신하며, 성도들끼리 서로 교제하며, 죄악을 멀리할 것이라는 교회언약에 서약을 했다. 그리고 둘째는 성도들이 자발적으로 선택한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순종하는 서약이다. 셋째는 공예배를 말한다. 교회에서 질서있는 기도, 성경봉독, 권면, 위로 등을 한다. 그들은 교회에서의 질서를 강조했다. 넷째는 하나님 나라를 확장할 것을 서약한다. 교회는 복음을 전하는 사명이 있음을 고백한다. 당시 전도의 개념은 영국교회에서는 찾아 볼 수 없었다. 왜냐하면 영국교회의 회원은 모든 국민이며 태어나자마자 저절로 영국 교회의 회원이 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전도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회중교회는 개인이 자발적으로 선택한 교회이기 때문에 전도의 열심을 적극적으로 낸다. 청교도들은 자발적으로 교회의 회원이 되기 때문에 세상에서도 빛된 생활을 해야하며,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데 모든 사람들 앞에서 걸림돌이 되지 말아야한다.
놀위치 감독 (Norwich Bishop)은 분리파 회중교회 설립을 알고 (1581년 4월) 대단히 분노했으며, 교회 분열에 대해서 징계하였고, 브라운을 몇번이나 옥에 가두었다. 그러므로 그의 동료들과 회중은 1582년 네덜란드로 피신하여 미들버그 (Middleburg) 에 정착하였고, 그곳에서 회중교회를 세웠다. 브라운 자신도 감옥에서 풀려나 네덜란드로 가서 그들과 합류했다.
로버트 브라운의 책 “모든 참 크리스천의 삶과 양식을 보여주고 그들이 쿠르크족과 교황주의자들과 이교들과 어떻게 다른가를 보여주는 책” (A Book which shows the life and manners of all true Christians and how unlike they are unto Turks and Papistes and Heathen folks)에서 당시 분리주의 청교도 회중교회의 교회언약을 잘 설명한다. 교회는 하나님과 자발적으로 언약을 맺은 무리들임을 강조한다 (“a company, or number of believers, which by a willing covenant made with their God”). 브라운의 교회의 개념은 “교회는 예수 믿는 크리스쳔들이 자발적으로(voluntarily) 하나님과 언약을 체결하고 세례를 통하여 그 언약을 확증한 무리들이다.”
청교도들의 교회언약은 “나와 하나님의 관계”인 개인 은혜언약과는 다른 개념이다. 교회언약은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아니라, “교회 공동체 (Church Community)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말한다. 우리가 (교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과 맺은 언약에 신실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신다.
브라운은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그리스도의 통치하에 있으며, 거룩한 공동체로서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로 서약한 자라야한다.” 세례는 이 언약의 보증이 된다.
브라운에 의하면 교회는 교회 언약의 기초하에 조직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 교회언약은 강요적인 성격을 띠어서는 안되며, 자발적이여야 한다. 이 언약은 하나님과 맺어진다. 그리고 이 언약에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 (율법)을 지키겠다는 서약을 하며, 자신들과 자신들의 자녀들을 하나님께 헌신하여 교회의 회원이 되며, 나아가서 이 언약의 징표로서 교회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반드시 세례를 행해야 한다.
브라운의 교회관은 성도들은 세상으로부터 구분된 자들의 모임이며, 교회는 참 믿는 자들에 의하여 구성되어져야 한다. 이들이 하나가 된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과 언약을 체결한다.
여기에서 장로교회의 교회관과 차이가 있다. 장로교회에 의하면 지상교회는 알곡과 가라지가 함께 공존한다고 주장이다. 그러나 회중교회에 의하면 교회는 믿는 자들로 이루어져야 함을 강조한다. 이 문제는 교회역사상 계속 논쟁되는 주제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므로 회중교회 청교도들은 “가시적인 성도” (visible saints) 개념을 매우 강조한다. 교회는 오직 믿는 자들로 구성되어져야 한다. 그러므로 회중교회는 각자가 회원이 되기 위하여 개인 신앙고백을 매우 강조한다. 그들은 교회 회중 앞에서 자신의 신앙을 증명해야하며, 회중들은 그 신앙고백을 듣고 받아 주어야 교회의 회원이 될 수 있다. 이러한 교회관은 회중교회 (비분리주의 및 분리주의)에서 매우 중요한 사상이다. 저들의 교회관은 진실된 성도들로 구성된 성도들의 무리이다. 그러나 장로교회 청교도들은 지상교회는 항상 알곡과 가리지가 썪여 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브라운은 네덜란드의 피신중인 미들버그 교회에서 문제가 생겨, 1584년 자기를 따르는 소수의 교인들과 함께 스코틀랜드로 갔다가 그곳에서도 핍박을 당하여, 영국으로 돌아갔다. 브라운이 영국교회로부터 많은 고통을 당하면서 1587년 10월 7일, 그는 캔터베리 대주교의 권위를 인정하였고, 엘리자베스 여왕이 수장으로 있는 영국교회가 참된 교회이며, 앞으로 영국교회에 충성하겠다는 진술서를 쓰고 자신이 앞장서서 영국교회를 개혁해 온 청교도 운동을 포기하였다. 그러나 브라운은 청교도 운동을 포기했지만, 그러나 그가 주장한 분리파 청교도의 교회론은 계속해서 퍼져나갔다.
영국교회가 참 교회가 아니기 때문에 분리 해야한다는 분리주의 사상은 헨리 베로우 (Henry Barrowe)에게서도 나타났다. 베로우는 교회는 참된 신자들로만 구성되어져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칼빈의 제네바 교회도 비판했다. 왜냐하면 칼빈의 제네바 교회는 제네바 시민 전체가 교인이 되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영국교회도는 성도들이 자발성이 없이 무분별하게 영국 시민들을 자동적으로 교인으로 받기 때문에 영국교회도 참된 교회가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믿는 자들은 세상에서 구별되어, 자발적성을 통해 교회언약을 맺음으로 참된 교회가 된다고 주장했다. 이들에게는 언약의 자발성이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그러므로 이들의 눈에는 영국교회는 참된 교회가 아니기 때문에, 영국교회에서 분리되어져야 참된교회를 세울 수 있다고 주장했다.
분리파 청교도들은 참된 교회의 표지는 1) 말씀이 바로 선포되어져야 하고; 2) 성례가 성경대로 바르게 집행되어져야 한다는 칼빈을 비롯한 많은 개혁자들의 교회관에 동의하지 아니했다. 그들은 참된 교회의 표지에; 3) 치리가 신실하게 집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교회는 악을 제거하는 치리가 시행되어야 참된 교회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분리파 청교도들은 무형교회와 유형교회라는 개혁신학의 교회론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분리파 청교도들은 유형교회가 최선을 다해 무형교회의 모습을 나타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이 그들의 유형교회의 모습은 “가시적인 성도 (visible saints)”들의 무리이다. 그들은 교회의 순수성과 거룩성을 매우 강조했다 (purity & holiness).
영국교회는 분리주의 회중교회가 영국교회로부터 분리되는 것은 교회의 통일성 (unity)을 무너지게하는 큰 죄악이라고 주장하면서 분리주의 회중교회 청교도들을 크게 핍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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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4.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