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성실장로교회 원로)
교회 역사상 우리의 개인, 가정, 교회 그리고 사회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상 가운데 하나는 청교도 사상이다. 청교도 학자 페리 밀러(Perry Miller)는 “청교도 사상은 미국 문화의 근본 개념을 체계적으로 종합시켰고, 뉴잉글랜드의 첫 3세대는 거의 청교도 사상에 의해 세워진 사회였다” 했다. 하버드의 청교도 전문학자인 페리 밀러(Perry Miller)는 무신론자였지만, 청교도들을 사랑했다. 밀러는 또한 청교도 사상의 중심이 된 칼빈에 대해서도 잘 몰랐다. 밀러는 미국의 출발이 청교도 사상에서 시작이 되었고, 미국을 건설하는 힘도 청교도 사상에 있음을 알고 1930년대에 미국에서 청교도 사상을 부활하려고 시도했다. 밀러는 사람들에게 청교도의 탁월함과 문화에 미치는 영향을 깨닫게 하는 데 평생을 바쳤다. 물론 페리 밀러의 주장은 우리 개혁주의 성경적인 관점에서 많은 차이가 있다. 우리는 페리의 주장을 그대로 다 받아들일 수 없다. 밀러가 이해는 청교도 사상은 우리와 많은 차이가 존재한다. 그러나 그가 청교도 사상을 높게 평가하고 많은 연구를 한 점은 인정을 해야한다. 실제로 페리 밀러 이후로 미국과 영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청교도를 연구하게 된다. 미국에서 청교도를 주제로 한 박사 학위 (Ph.D.) 논문도 대부분 밀러의 영향이 절대적이다.
이렇게 청교도 사상이 개인, 가정, 교회, 사회에 끼친 영향은 대단한데, 그 힘의 원동력은 무엇일까? 그것은 곧 언약 사상이다. 청교도들은 신학적으로 항상 문제가 된 반율법주의 (anti-legalism)와 율법주의(legalism) 사이의 긴장과 또한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 사이의 긴장 관계를 언약 (covenant) 개념을 통해 잘 설명한다. 그들은 단순히 개인적으로 경건한 삶을 추구했을 뿐만 아니라, 교회와 특히 사회적인 거룩함 (societal holiness)을 추구했다. 언약 사상은 청교도들에게 사회적, 정치적, 그리고 종교적 개혁을 역동적으로 개혁을 할 수 있는 사상적인 기초가 된다.
그러면 먼저 청교도는 누구인가? 많은 연구들이 있었지만 아직까지 청교도의 기원과 청교도 (Puritan)이라는 명칭의 유래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학자마다 다양한 이론들을 제시할 따름이다.
청교도와 청교도 사상은 영국 종교개혁의 중요한 역할을 했다. 1560년대 엘리자베스 여왕 치하에서 처음으로 조직화된 청교도 운동과 사상의 형태를 취했지만, 그러나 청교도 사상의 뿌리는 엘리자베스 여왕의 시대보다 훨씬 이전부터 시작이 되었다. 성경 번역가 윌리엄 틴데일 (William Tyndale) 그리고 유명한 설교자 휴 라티머 (Hugh Latimer) 또한 토마스 비콘 (Thomas Becon)까지 올라간다. 그리고 청교도 사상의 확립의 더욱 중요한 요인은 영국의 카톨릭 여왕 메리 (Mary)가 개신교를 박해 했을 때에, 많은 영국의 개혁자들이 제네바를 비롯해서 유럽으로 피난갔고, 이들이 제네바에서 칼빈의 가르침을 받고 나중에 영국으로 돌아와서 종교개혁을 일으켰다. 어떻게 보면 메리 여왕이 카톨릭의 칼을 가지고, 영국의 청교도들에게 많은 핍박을 가했지만, 그것이 오히려 칼빈주의 입장에서 영국에서 종교개혁을 시도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청교도주의는 특별히 교회 운동으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청교도들이 볼 때에 영국 교회가 신약 성경적인 교회의 모습과는 큰 차이가 있었다. 청교도들은 구원론적인 교리뿐만 아니라, 이미 구원받은 성도들이 소속된 교회가 하나님앞으로 거룩한 성도의 무리가 (the corporate holiness of Christians) 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이 사상이 나중에 청교도들은 교회 언약으로 발전시켰다 (Church covenant). 청교도들은 항상 개인뿐만 아니라, 단체적, 사회적인 거룩함을 강조한다. 왜냐하면 교회는 단체적으로 (corporately) 하나님과 언약 상태에 있기 때문이었다. 이 언약의 관계가 잘 지켜질 때에, 하나님께서 그 사회 (교회) 전체에 복을 주시고, 반대로 언약을 파기하면 하나님께서 징계하신다. 당시 영국은 영국 국교회 (Church of England)로서 사회 전체가 교회였다. 이들은 성경에 나타난 언약의 축복과 (covenant blessings)과 언약의 저주 (covenant curse)를 굳게 믿었다.
엘리자베스 여왕 (1세)의 통치 기간 초기에 영국 국교회 내에 “엘리자베스 합의”(the Elizabethan Settlement)가 이루어졌다. 이 합의 (혹은 양보) 속에는 칼빈주의 교리들과 동시에 카톨릭 예배의 예식을 지속할 것이며, 그리고 교회 정치에서는 감독제도를 시행하였다. 이에 대하여 청교도들은 영국의 종교개혁이 중단된 것으로 판단하고 매우 분노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많은 학자들의 판단에 의하면 엘리자베스 1세의 통치(1558-1603) 아래에서 영국 교회는 대체로 개혁파 교회에 속했다 (물론 청교도들이 볼 때는 영국 국교회와 많이 타협과 양보를 했지만). 요약하면, 엘리자베스 여왕의 시대의 영국 교회는 신학은 개혁신학 (칼빈주의)을 가지고 있었고, 교회 예식과 교회 조직은 영국 국교회의 형태를 지니고 있었다. 당시 국교도 (Church of England)의 대주교(Archbishop)였던 윗기프트(Whitgift)는 헨리 불링거 (Henry Bullinger)의 설교집<The Decades of Henry Bullinger> (10개 단위의 설교집)을 모든 영국 국교회의 목회자들이 다 읽도록 지시했다. 헨리 불링거(독일어: Heinrich Bullinger)는 스위스의 종교개혁가이다. 울리히 츠빙글리의 후계자로서, 44년간 스위스 취리히에서 종교개혁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사실들을 보면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 시대에는 신학은 개혁신앙이었고, 예전과 교회 형태는 국교회의 형태를 지니고 있었다.
크롬웰 장군의 시대(1599-1658)에서는 청교도 안에 장로교회, 회중교회, 침례교회, 퀘이커교, 등 다양한 성도들이 포함되었다. 청교도들의 신앙의 색채는 매우 다양했다. 물론 나중에 청교도는 장로교회와 회중 (독립) 교회가 중심이 되었다.
청교도 운동에서 가장 중요한 문서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혹은 칼빈의 <기독교 강요>가 아니었고, 모국어 성경 (native bible)이었다. 물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칼빈의 기독교 강요가 청교도들에게 매우 중요한 신앙의 기준 문서였고, 청교도 사상에 매우 큰 영향을 끼쳤지만, 그러나 이보다 더욱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성경이었고, 특히 모국어 성경이었다. 청교도들의 신학과 신앙은 전적으로 성경에 기초했기 때문에 자기 나라의 말로 성경을 읽어야 함을 강조했다. 물론 16세기에 성경의 자국어 번역은 아직 초기 단계에 있었으며 많은 논쟁의 원인이 되었고 큰 어려움이 있었다.
당시 영어 성경번역 중에서 청교도들에게 제네바 성경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었다. 제네바 성경은 영국에서 메리 여왕의 박해를 피해 제네바로 피난가서 칼빈과 함께 연구하는 동안 1560년에 처음 영어판으로 출판되었다. 이 성경은 결국 1611년의 KJV로 대체되었다. 제네바 영어성경은 KJV 출판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청교도 운동과 사상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사적인 중요한 사건들을 알 필요가 있다.
1526년, 윌리엄 틴데일 William Tyndale) 의 신약 성경 번역판이 영국교회에 출판에 출판되었다; 1534년, 헨리 8세가 수장령 (Acts of Supremacy)을 발표하고, 로마 교회와 결별하다; 1547년, 에드워드 6세가 왕위에 오르다. 에드워드 왕이 즉위하자 영국에서 개신교 종교개혁이 활발하였다; 1553년, 로마 카톨릭 메리 여왕이 즉위하여, 이때 영국의 청교도들 300명이 순교당했고, 800 여명이 대륙으로 망명하였다. 이들이 제네바를 비롯한 유럽 대륙에서 영국의 종교개혁을 준비하다; 1558년, 엘리자베스 1세가 즉위하다. 엘리자베스 중재안 (Elizabethan Compromise)을 내어 놓았지만 그러나 청교도들은 이 개혁안에 만족하지 못했다. 그리고 국교령 (The Act of Uniformity)이 선포되고, 영국교회 기도집 (Anglican Prayer)이 공예배에 공식 문서로 채택되었다 (1559). 이 기도집 사용을 거부하거나 비방하면 범죄자가 된다; 1569-1570년, 캠브리지 토마스 카트라이트 (Thomas Cartwright) 교수가 사도행전 1,2장을 강론하면서, 영국 국교에 반기를 들었다. 카트라이트는 장로교 정치 형태를 주장했다; 1603년, 제임스 1세 (James I)가 즉위하다.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이 후손없이 죽자 영국의 튜더 왕조는 끝이나고, 스튜어트 왕조인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가 영국왕으로 즉위한다 (제임스 1세). 제임스 1세은 모계로서 영국의 튜더 왕조의 피를 잇고 있었다.
청교도들은 제임스 1세의 즉위로 영국의 종교개혁을 매우 긍정적으로 보았다. 그러나 1604년 청교도들은 햄프턴 궁에서 제임스 1세를 만난 후에 크게 실망했다. 제임스 1세는 1604년에 “햄프턴 코트 궁전 컨퍼런스”를 개최하여 청교도들의 견해를 청취하며, 영국 국교회 지도자들과의 공개 토론을 가졌으나 양측의 입장 차이가 워낙 컸기 때문에 합의점에 도달하지 못했다. 햄프턴 코트 회의 (Hampton Court Conference)는 천인 청원 (Millenary Petition), 즉 영국 청교도들 1000명이 서명한 그들의 요구사항에 대한 응답으로 1604년 1월 런던 근처 햄프턴 코트 궁전에서 열린 회의이다. 이 회의에서 청교도들이 청원한 요구사항이 제임스 1세에 의해 모두 거절되었다. 그러나 한가지 긍정적인 일은 오랫동안 필요성이 제기되어 오던 성경번역 작업의 시작이었다. 이것이 바로 킹 제임스 성경 (King James Version, 흠정역)이었다. 당시 물론 위클리프 성경, 윌리엄 틴데일 성경, 제네바 성경 등이 영어로 번역되어 있었기는 하지만, 킹 제임스 성경 발간은 청교도들에게도 매우 환영받을 만한 일이었다; 1620년, 청교도 분리주의자들인 (separatist puritans) 필그림이 신대륙 플리머스에 정착하다; 1625년, 청교도를 싫어한 찰스 1세가 왕이 되다; 1628년, 윌리엄 로드 (William Laud) 가 영국주교 (나중에 캔터베리 대주교)가 되다. 윌리엄 로드는 비국교주의자들 (nonconformity)을 쫓아내기 위해 시도하였다. 로드가 청교도들을 핍박했기 때문에 청교도들은 미국으로 이민하는 중요한 원인이 된다; 1630년, 존 윈드롭 (John Winthrop)이 많은 비분리 청교도들을 (non- separatist puritans) 이끌고 메사추세츠 만으로 이주하다; 1643-1646년, 웨스트민스터 의회가 모여 예배모범, 신앙고백서, 대,소요리문답이 작성되다; 1645-1646년, 올리버 크롬웰의 국회군이 왕의 군대를 무찌르고 시민전쟁이 종식되다; 1646년, 영국에서 감독제 교회 정치가 폐지되다.
1649년, 찰스 1세가 처형당하다. 1649-1658년, 올리버 크롬웰이 영국의 최고 통치자가 되다. 크롬웰은 영국에 청교도 사상을 확립하다; 1660년, 찰스 2세가 즉위함으로 영국의 왕정이 복고, 영국 교회는 감독제가 시행되다; 1662년, 새로운 영국 국교회 공동 기도문 (Anglican Book of Common Prayer) 시행됨과 동시에 2천명이 넘는 청교도 목사들이 목회지에서 쫓겨나다. 비국교인들은 옥스퍼드와 캠브리지에서 학위를 받을 수 없어서 비국교 학원이 설립되다; 1688년, 윌리엄과 메리가 영국의 왕과 여왕으로 공포, 명예혁명 (Glorious Revolution)이 일어나다. 청교도들에게 설교와 독립 교회 (Independent Church)를 세울 수 있는 권리를 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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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9.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