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S. 루이스는 “불신자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사명이라고 생각한다”라고 주장했지만, 그는 전도에 서툴렀다. C.S. 루이스는 공격적인 개인 전도자는 아니었다. 루이스가 생활 현장에서 전도 활동을 열심히 했다는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C.S. 루이스가 개인 전도를 하지 않았다는 여러 증언이 남아 있다.
루이스의 운전기사로 오래 일했던 클리포드 모리스(Clifford Morris)는 루이스가 강력하게 전도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다수의 루이스 제자들은 루이스가 전도 활동을 보지 못했다고 한다. 교회사학자인 디킨스(A.G. Dickens)는 C.S. 루이스의 개인 지도를 받았는데 루이스가 기독교 변증가처럼 활동하지 않았다고 말했고, 루이스의 제자로 C.S. 루이스 전기작가가 된 조지 세이어(George Sayer)는 2년 동안 루이스가 기독교 신자인 줄도 몰랐다고 했고, 루이스의 제자인 해리 블라마이러스(Harry Blamires)는 10년 동안 루이스와 종교적인 문제를 토의한 적이 없다고 했다.
그런데도 많은 학자와 루이스 전기작가는 C.S. 루이스를 전도자라고 부른다. 그 이유는 몇 가지가 있다. 우선 루이스가 남긴 서적들로 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했고 변화된 사람들이 드러났다. 사실 루이스의 책은 지금도 전도를 계속하고 있다. 둘째는 공개적으로 기독교 진리를 전할 수 있었던 <옥스퍼드 소크라테스 클럽>에 적극적으로 참석하며 대학교 지성인들에게 기독교 진리를 전했다. 셋째로 루이스는 중요한 기회에 공개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대중 전도 활동을 했다. 그의 대중 전도 활동은 루이스의 전도자 입지를 공고하게 했다.
루이스의 대중 전도(강연) 활동은 그의 전도자로서의 면모를 보여준다. 루이스는 세 번에 걸쳐서 공개적으로 복음을 전했다. 루이스는 스크루테이프의 편지가 세간의 주목을 받은 것이 계기가 되어 영국 공군 군종감이 공군부대에서 기독교를 소개하는 강연을 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루이스는 이것이 전시에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라고 생각하고 공군부대 순회강연을 수락했다.
1941년 5월 루이스는 공군부대 강연을 마친 후 친구인 성공회 수녀 페넬로페에게 “공군부대에서 강연했는데, 완전히 실패한 것 같습니다”라고 편지했다. 반면 당시 공군부대 군종 목사였던 고드윈 허드슨 감독(Bishop A. W. Godwin-Hudson)은 “대성공이었다”라고 아내에게 소식을 전했다. 이런 평가 때문에 루이스는 전쟁 기간 내내 공군부대를 순회하는 선교 여행을 했었다.
영국 공군부대 순회 강연을 시작하기 전인 1941년 2월 루이스는 BBC 방송국 종교방송국 국장 J.W. 웰치 목사의 편지를 받았다. 웰치 목사는 당시 루이스가 내놓은 <고통의 문제>라는 책의 출판에 대한 축하를 전하면서 BBC 종교 방송을 진행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던 것이었다. BBC 방송국은 다양한 견지에서 건강한 기독교 방송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2차 대전의 전쟁 상황은 점점 심해지고 있었고, 당시 영국 국민은 불안에 떨었다. 백성들에게 신앙적 확신과 위로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아울러 당시 영국군 신병에 대한 한 조사에 따르면 부활절의 의미를 아는 신병은 23퍼센트에 불과했다. 전시에 장병 신앙은 매우 중요한 요소이고 장병 선교가 꼭 필요한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 BBC가 기독교를 소개하는 방송 강연을 기획했다.
1941년 8월 6일 수요일 저녁 7시 45분부터 15분간 첫 강연을 했다. 기독교 방송국 국장 웰치 목사와 부국장 에릭 펜 목사와 긴밀하게 협조하면서 진행했던 이 방송 강연은 그야말로 대박이 났다. 루이스는 청취자들로부터 많은 편지를 받았고, 방송 직후 강의 원고를 세 권으로 발간했는데 날개 돋친 듯이 팔렸고, 합본으로 발행한 <순전한 기독교>가 독자들의 큰 사랑을 받았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루이스가 대중 강연을 했던 또 하나의 경우는 옥스퍼드 대학교 기독학생회(OICCU) 책임자였던 엘리자베스 캐터우더(Elizabeth Catherwood/마틴 로이드 존스목사의 딸)의 초청으로 옥스퍼드 기독 학생회(OICCU)에서 “기독교는 무엇인가?”라는 주제로 강의를 했는데, 대학생들에게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명강의였고 많은 결신자를 낳았다는 보고가 있다. 비록 기독학생회라는 모임이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못한 학생들이 있었던 모임이었다.
넷째로 C.S. 루이스는 옥스퍼드 소크라테스 클럽(The Socratic club)에서 매주 불신자들을 만났다. 소크라테스 클럽의 회장으로 지도교수 역할을 했던 루이스는 소크라테스 클럽의 주례 모임에 빠짐없이 참석했다. 그가 소크라테스 클럽 회장을 맡은 1942년 1월부터 1954년 6월 케임브리지대학교 중세와 르네상스 영문학과 학과장으로 옮겨 갈 때까지 성실하게 회장직을 수행했다.
루이스가 회장직을 맡았던 기간에 약 200여 회의 주례 모임에 주재자로, 강연자로 혹은 논찬자로 참여했다. 소크라테스 클럽의 설립자요 의장이었던 옥스퍼드 대학교 교목이었던 스텔라 올드윙클(Stella Aldwinckle)이 루이스에게 소크라테스 클럽의 회장직을 맡아 달라는 요청했을 때 루이스는 큰 고민없이 수락했다. 이일을 자신의 사명으로 알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C.S. 루이스를 연구했던 마이클 트래버스(Michael Travers)박사는 루이스가 전도를 모든 크리스천 삶의 목표로 보았고, 루이스 자신의 문학과 집필의 핵심 목표가 전도라고 보았다고 했다. 루이스는 전도하기 위해 살았고, 전도하기 위해 글을 썼다. 루이스는 전도하는 일(기독교 복음을 변증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
C.S. 루이스는 전도를 실천하기 위해 주어진 기회를 활용했다. 이 기회들을 활용하면서 루이스는 대중 전도 활동을 하였고, 큰 결실을 보았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루이스는 이런 자신의 전도 활동을 전도 활동으로 보지 않고 “예비 전도(Pre-evangelism/ Praeparatio Evangelica)”라고 보았다는 것이다.
다음 호에 예비 전도를 살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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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7.2024